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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죽음 극복한 김지영 포교사

“죽음과 삶 교차하는 자리에서도 가피의 씨앗은 싹 트더라”

▲ 김지영 포교사의 얼굴에는 몇 해 전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건저올린 봄볕 같은 따사로움이 가득하다.

세 번 죽음과 직면했다. 남다를 것 없이 평범했던 삶이었다. 그렇고 그런 고비들을 넘기기도 했지만 뭐 하나 특별할 건 없었다. 하지만 죽음은 이야기가 달랐다. 생과 사의 경계는 느닷없이 찾아와 온 우주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세 번의 죽음이었다. 살아온 시간들은 비틀렸고 갈라졌다.

그러나 빛은 막장에 이르러서야 희망의 등불이 되어준다. 균열된 틈으로 부처님 가피가 싹트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절망의 순간들을 신록의 환희로움으로 덮었다. 죽음의 순간에 직면할 때마다 관세음보살을 외우던 김지영(54, 길상득) 포교사. 간절한 신심으로 역경들을 이겨낸 그의 얼굴에는 활짝 핀 가피가 뿜어내는 꽃내음이 가득 흐르고 있다.

그가 처음 죽음과 마주했던 것은 2006년 어느 날이었다. 컴퓨터 학원을 차렸지만 실패를 맛보았으며 스포츠용품 납품회사에 입사해서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온갖 상처들을 마음속에 쌓아만 두고 있었던 것이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다. 처음 내과를 찾았을 때는 아무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의사의 권유대로 산부인과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난소에 혹이 발견된 것이다.

배에 구멍을 내고 혹을 긁어냈다. 일주일 후에는 실밥을 뽑기 위해 다시 침상에 누웠다. 실밥을 뽑던 의사가 급하게 수술실을 나갔다. 떼어낸 혹의 조직검사 결과를 묻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의사의 한숨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이고 저런, 아직 젊은데….”

난소암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진행됐는지, 전이가능성은 어떻게 되는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수술일정을 잡고 예약절차를 마쳤다. 병원을 나서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병원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능인선원 불교대학을 2개월째 다니던 무렵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처음 불교를 접했지만 우연한 사건을 통해 마음을 접었던 그였다. 그러다 2005년 친구 몇 명과 계동 격외사에서 차를 마셨던 것이 계기가 돼 능인선원 불교대학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있었다.

암 선고를 받고 2주 후 수술을 받았다. 난소와 자궁, 맹장, 임파선을 모두 들어냈다. 대수술이었다. 다행히 수술결과는 좋았다. 일반병실로 옮겨진 후 산소호흡기를 뗐다. 그러나 또 한 번 죽음의 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수혈을 위해 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혈관을 짚지 못했고 결국 의사가 허벅지에 주사바늘을 찔렀다. 5분도 되지 않아 배가 부풀어 오르며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대동맥이 터진 것이다. 피가 고인 배는 임산부보다 더 높이 솟아올랐다. 앰뷸런스를 타고 큰 병원으로 이송됐다. 대동맥이 터지면 80~90%가 사망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교사·회사원 평범한 삶 살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 인한 난소암
수술 성공했지만 대동맥 파열
호전되자 곧 항생제 쇼크까지
환자복에 해수관음 사진 넣고
하루 종일 사경하며 염불 외워
기적처럼 완치돼 퇴원한 이후
포교사고시 공부 1달 만에 합격

봉사활동·사회복지 공부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 보내
여성 불자 108인에 선정되기도

중환자실에 누워 있으니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다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달려왔다. 아버지는 그와 함께 능인선원 불교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손에는 해수관세음보살과 서옹 스님의 입적 사진이 들려 있었다. 해수관세음보살 사진을 환자복 주머니 양쪽에 넣고 머리맡에는 입적 사진을 붙였다. 아버지는 항상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라고 했다.

두 번째 죽음의 순간 이후 열흘 동안 눕지도 앉지도 못했으며 물조차 마시지 못했다. 영양제 주사와 진통제로 간신히 삶을 연명해갔다. 몸 한쪽 호스에서는 피가 나갔고 또 다른 한쪽 호스에서는 피가 들어갔다. 피골이 상접했지만 입에서는 언제나 관세음보살이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놓고 간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사경하고 염불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처럼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고 일반병실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때 남편은 휴가를 내 하루 종일 병실을 지켰다.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하루라도 편히 쉬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보냈다. 다음날 새벽 5시, 세 번째 죽음의 순간이 엄습했다. 간호사가 항생제를 투여했는데 갑자기 손끝, 발끝부터 마비증세가 올라오고 입에서는 쓴물이 나왔다. 혈압과 맥박이 정신없이 치솟았다. 의사가 달려들어 응급처치를 실시했다. 항생제 쇼크였다. 이 경우 응급처치 없이 5분이 경과하면 사망확률이 높다고 한다. 응급처치는 3분 이내에 이뤄졌다.

그는 환자복에서 해수관세음보살 사진을 꺼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 난소암을 극복했던 그를 다시 두 번이나 살려낸 가피가 신비롭고 감사할 뿐이었다. 그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불교공부를 시작하리라 마음먹고 봉은사 기초교리반과 불교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암 수술 후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뒤늦게 항암치료를 받는 상황이었다. 민머리에 가발을 올리고 뼈만 남은 몸을 휘적거리며 1주일에 세 번 봉은사로 향했다. 기초교리반과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불교대학원에서 공부를 이어가려 했으나 자격이 안됐다.

마침 포교사 제도가 눈에 들어왔다. 1차 시험이 한 달 남짓 남은 시점이었다. 이미 진도가 한참 나간 후였지만 포교사단과 조계사에서 특강을 들었다. 나머지 시간은 두문불출하며 공부했다. 하루 10시간 책을 들여다봤다. 모든 게 생소했기에 남들보다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치르고 며칠 후 1차 합격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몸이 다 회복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몸을 혹사 시킨 결과 안면마비가 왔다. 최종합격을 위해서는 봉사활동을 해야 했기에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며 성지순례팀을 인솔했다. 해인사와 통도사, 송광사 등 전국 각지의 사찰을 방문했다. 인솔봉사는 생각보다 간단해서 대부분 순례팀과 함께 기도하며 신심을 키워갔다. 보훈병원 법당에서도 환자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봉사활동을 펼쳤다.

포교사 13기 최종합격 통보를 받고도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포교사단 음성팀에서 2년 동안 활동하며 팀장도 맡았다. 그 후에는 서울 구룡사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입문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행상담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2009년부터는 공부의 범위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평생교육사, 보육교사, 다문화복지사 등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원광디지털대와 명원문화재단에서 다도를 배웠다. ‘산천어들의 모임’을 만들고 김성태 선생을 초청해 불교인문학 강좌를 진행했다. 한 달에 한 번 조계사에서 진행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정진기도를 올리는 등 신행생활도 놓치지 않았다.

▲ 포교사단 지역봉사팀의 일원으로 서울 구룡사에서 인문교육과 신행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그의 삶은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남편은 그가 암 선고를 받은 시기부터 아침마다 금강경을 독송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독송을 하지 못했을 경우, 밤늦게 술을 마시고 귀가했더라도 금강경을 외운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을 독송한 결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직장에서 좋은 일들이 잇달아 생긴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딸도 언제나 붓을 잡기 전엔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며 주변사람들도 하나 둘씩 금강경을 독송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그는 어두운 죽음의 순간들을 뚫고 봄처럼 눈부신 생의 빛을 맞이했다. 얼굴에는 항상 싱글벙글 웃음이 떠나지 않고 주위에는 긍정적인 기운이 가득하다. 과거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들을 미워하며 병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모든 이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2011년에는 불교여성개발원의 ‘여성 불자 108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 지난해 중앙신도회가 주최한 행복바라미 모금캠페인에도 동참했다.

그는 현재 노인복지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며, 용산구청 치매지원센터 봉사활동을 하며 노인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지게 됐고, 지금부터는 그 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부처님 법을 알리겠다는 원력은, 꼭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로 마음 깊이 각인됐다.

따사로운 미소로 웃음 짓는 김지영 포교사의 얼굴에는 몇 해 전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 번의 역경과 세 번의 기적이 교차하는 자리에 피어난 가피의 꽃내음 때문이리라. 오늘도 김지영 포교사는 기도하고 봉사하며 새로운 시간들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

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242호 / 2014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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