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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명량’ 신드롬이 뜻하는 것들

기자명 정장진

스스로 깨달음 구하는 적극성 없다면 기적도 없다

▲ 영화 ‘명량’은 충무공 이순신을 다룬다. 그러나 현실감 떨어지는 해상 전투에도 정치적 감수성이 가미된 이중서사로,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이 글이 불자들을 만날 때 즈음이면 영화 ‘명량’은 관객 1500만을 불러 모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작품이 되어있을 것이다. 진정 궁금한 것은, 대체 무엇이 그토록 많은 이들을 영화관으로 이끌었을까, 의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순신? 모르는 사람이 없는 민족의 성웅이다. 거북선, 난중일기, 충무공 등은 귀가 따갑게 들어온 말들이며, 우리 모두는 그의 시까지 줄줄 외우고 있지 않은가. 광화문 네거리에 가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젊잖게 뒤에 앉아 계신 세종대왕을 보호하는 듯이 긴 칼 옆에 차고 우람한 모습으로 서있는 충무공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겨레 성웅 충무공 이순신 영화
12척과 330척 해상 전투 백미
정치적 감수성 읽힌 이중 서사
 
현실 같지 않은 서술로 반감도
전쟁 같은 현실은 녹록치 않아
준비 없으면 세파에 쉽게 침몰
 
충무공, 할 말이 아직도 남은 것일까? 아니면 이제껏 못한 말들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영화 ‘명량’은 이렇게 해서, 영화 그 자체로서 보다는 하나의 신드롬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영화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영화 그 자체로서는 함량 미달이라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다. 조금, 아주 조금 모자라는 영화이고 아쉬운 영화이기도 하다. 불자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불자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야 할 부분이라도 있는 영화일까?
 
많은 이들이 ‘명량’을 두고 극 중에 나오는 명대사라고 하면서 단지 인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댓글도 달고 한다. 대부분 기자들 역시 명대사들을 인용하며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그런 명대사들 중에는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도 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한 관객들이 많다고도 한다. 또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거나 “독버섯처럼 퍼진 두려움이 문제지. 저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하는 대사도 명대사들로 꼽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영화에서 가장 눈 여겨 봐야 할 명대사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가 아닌가 싶다.
 
 
12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왜군의 대함대를 물리친 것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이 기적에 가까운 승리는 오직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2대 300, 얼토당토않은 이 수식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아니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무모하기 짝이 없고 위험천만하기도 하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허구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식인 것이다.
 
영화와 현실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영화대로 보고, 현실은 현실대로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 관점이 바로 불자의 관점이다. 영화에 스님들이 등장하고 염주도 돌리시고 기도도 올리지만, 또 직접 창과 칼을 들고 왜놈들을 베기도 하지만, 거란이나 몽고를 부처님 힘에 의지해 물리적으로 물리치겠다고 대장경을 새겼다고 믿는 것이 허황된 것이듯이, 어떤 다른 기적 탓에 12척의 배로 300척의 왜군을 물리쳤다고 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영화를 전혀 잘 못 보는 것이며, 불자의 관점과도 대척적인 것이다.
 
우연이겠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난 비슷한 시기인 16세기 말, 흔히 무적함대로 일컬어지는 스페인의 아르마다(Armada)가 영국을 침공한다. 펠리페 2세 당시의 이야기인데, 총사령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1588년, 대포 2000문을 장착한 전함 127척, 수병 8000명, 육군 1만9000명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이끌고, 또 당시 스페인 영이었던 네덜란드에 들러 네덜란드 육군 1만8000명과 합류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전쟁에서 스페인은 대패하고 만다. 당시 영국은 전함 80척, 병력 8000명이 전부였다. 영국에서는 이 역사적인 승리를 기억하기 위해 그려진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를 ‘아르마다 초상화(Armada Portrait)’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국은 어떻게 해서 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일까? 상대적으로 작은 영국 배들의 민첩한 기동력과 야음을 틈탄 화공 그리고 무엇보다 잘 훈련된 수병들 덕분이었다. 수는 부족했지만 공격과 후퇴가 자유스러운 선형(線形) 대형을 유지하고 밀집되어있는 스페인 함대를 좌충우돌하게 만든 것이다. 날씨와 거친 북해를 잘 모르던 스페인 함대의 준비 소홀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전쟁은 부처님 힘으로 하는 것도, 영화 ‘명량’에서처럼 아낙들이 흔드는 치마폭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12척 배로 300척이 넘는 대함대를 상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아있던 거북선 한 척마저 불타버렸지만, 거북선 한 척 가지고도 300대의 왜적 함대를 상대할 수도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전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12척이 아니라 120척, 아니 1200척의 전함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어야만 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12척 전함만 갖고 있었다면, 영화이기에 망정이지,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전쟁에는 유비무환이 진리인 것이다. 전쟁에는 기적 같은 없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그래서 기적 타령만 하고 있으면, 죄 없는 백성들만 죽는다. 불교는 가장 이성적인 종교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이들은 영화와 현실을 혼돈한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한 방법이겠지만, 심각한 것은 이 재미를 어설픈 애국심이나 일본에 대한 증오의 감정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덩어리진 감정은 위험하다. 감정의 덩어리는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더 강한 덩어리가 되려고 한다. 이는 무서운 혼돈이며 지적 미숙에 다름 아니다. 대개의 종교적 광신이나 국수주의로 불리는 맹목적 애국심이 여기서 나온다. 일본의 극우파가 여기에 해당한다.
영화 ‘명량’은 겉으로는 전쟁영화이고 영웅영화이며 또 역사영화다. 그러나 이것저것 섞어 놓은 야릇한 영화이기도 하다. 충도 나오고, 민심도 나오고, 효도 나오고, 기적도 나오고, 고뇌도 나오고, 승리의 함성도 나온다. 같은 감독의 ‘최종병기 활’보다 질이 떨어진다. ‘활’은 주제가 훨씬 명료했으며, 서사와 묘사의 선도 더 굵었다. 활이라는 한 없이 가볍고 작은 무기에 역사라는 무게를 싣는 착상도 돋보였다. ‘명량’은 오히려 1000만, 1500만 하는 관람객 동원이 흥미 있게 느껴진다.
 
‘명량’에서,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울돌목 와류에 휩쓸려 들어가는 대장선을 진도 사람들이 작은 목선들을 타고 들어가 갈고리를 던져 끌어낸다. 서서히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띠기 시작하는 장면인데, 이어 왜군 함대는 후퇴를 하기 시작한다. 왜군의 300척 함대 전체가 침몰해서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아닌 것이다. 듣기로는 ‘명량’을 제작한 감독이 3부작으로 충무공을 다룰 생각이라고 한다. 아직 두 편의 영화가 남은 것이다. 그래서 살려 돌려보낸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젠가 제작될 예정인 영화를 보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추세라면 ‘명량’은 1500만명은 족히 동원할 것으로 보인다. 이 관중몰이는 물론 2014년 8월 한국의 상황이 일조를 했다. 진도가 어딘가! 진도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뼈아픈 섬이다. 진도 앞바다에 얼마나 많은 어린 생명들을 묻었는가. 오늘의 현실과 중첩되어 나타나는 영화의 장면들과 대사들은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보게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선장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서부터, 제일 먼저 탈출한 반바지 차림의 선장까지, 그리고 5억원이 넘는 이름도 생소하기만 한 초고가 외제 승용차를 타고 도망 다닌 사이비 교주의 죽음에 대한 의혹까지, 이 모든 것이 영화를 진지하게 보게 했다.
 
영화 속에 숨어 있다가 현실과 중첩되어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비유적인 정치적 의미를 읽게 하는 이중서사는 ‘왕이 된 남자, 광해’에서도 ‘변호인’에서도 관객들을 감동시켰던 코드다. 대중적 영화가 일깨운 정치적 감수성과 공동체 혹은 국가, 나아가 그 국가의 선장에 대한 인식은 결코 폄하될 수 없다. 영화 ‘명량’이 세월호 사태 이전에 기획 제작된 영화이기에 감독의 관점이 더 돋보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여기까지다.
 
어쩌면 이것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어릿광대가 왕이 되었을 때 영화가 현실과 충돌하며 현실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오는 예리한 파열음도, 영화 미학의 둔중한 망치소리도 ‘명량’에서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들과 함께 들판을 거니는 충무공,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몸을 태우던 영화의 첫 장면과 그리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연결이 되지 않는다.
 
모든 영화를 불교식 관점에서 볼 수는 없다. 그리고 꼭 그럴 필요도 없다. 또 영화는 영화이고 불교는 불교라고 하나마나 한 소리도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모든 영화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불교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불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자연스럽게 삶의 모든 부분들의 관련성을 파악하며 인간 마음의 세세한 움직임들 전체를 아우르는 미학이며, 철학이고 치열한 논리 투쟁의 장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모르긴 몰라도 가장 이성적인 종교다. 성령이라는 타력을 믿는 종교인 기독교에 비해 불교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여기서 깨달음은 이성을 큰 축으로 한다. 사물의 관계와 세상의 궁극적 본원과 그 움직임들의 전후좌우의 맥락을 맑고 깊게 보아야 깨달음이 가능하며, 그 깨달음을 보편적 진리의 장엄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면 이는 집착과 허망함으로부터 이성이 승리를 거둘 때 가능한 것이다. 영화도 이성으로 보아야 한다. 분석적으로.
 
‘명량’은 12척대 300척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통해 과연 무엇을 전하고자 한 영화인가?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었다고? 이것은 신파에 가깝다. 일본군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허술하게 묘사되어있다지 않는가. 최민식 빼놓고는 유명 배우들이 왜군의 장수들로 등장했음에도 누구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다. 왜군의 장수들은 이국적인 갑옷만 치렁치렁 걸치고 눈에 힘이나 주고 인상만 쓸 뿐 영화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59호 / 2014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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