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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박태승 풍기 심우원 상임법사

“다른 이의 아픔 공감하는데서 자비행은 시작됩니다”

▲ 박태승 법사는 “확고한 목표를 세워 최선을 다하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면 행복은 반드시 따라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부터 자네는 서녘 서(西)에 배 주(舟), ‘서주’야.”

“서쪽으로 가는 배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서쪽으로 가는 배. 서방정토, 극락정토로 가는 반야용선 말일세. 반야용선이 되어 많은 이들을 태우고 서방정토를 향해 나아가야 하네. 꼭 그런 불자가 되시게.”

‘西舟’ 법명처럼 서방정토 발원
풍기불교법우회·심우원 창립
재가불자 ‘생활불교운동’ 매진
순국소년병 재조명사업 추진도

꼭 40년 전 일이다. 석주 스님은 박태승(82) 풍기 심우원 상임법사에게 부처님과의 지극한 인연법을 설하면서 이름 앞에 서주란 법명를 주었다. 그의 하루는 ‘서주’란 법명을 새기면서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가슴을 따뜻하게 덥히고 머리를 차갑게 씻는다. 하루하루를 우직한 소처럼 석주 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걸음을 옮기니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되었고 좋은날은 행복한 한 해를, 다시 행복한 십년을 완성해 나갔다.

박 법사는 지역 불자들에게 지혜와 원력의 ‘유마’로 통한다. 풍기지역을 불국토로 이끌 신행조직인 ‘풍기불교법우회’를 창립했으며 심우원(尋牛園)이란 도량을 열어 신행에 진력해 왔기 때문이다. 안동·청송교도소에서는 재소자들을 참회의 길로 인도하는 교정위원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군장병들을 위한 법당이 되어 아들들을 가슴에 품어 안았다. 회갑을 넘기자 그는 생업인 인쇄업도 그만 두었다. 인쇄하는 낮 시간에도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과 지혜를 일깨우는 포교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박 법사의 반야용선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석주 스님의 일평생 가르침을 담아 세운 ‘서주’란 당간지주로서, 아직 서방정토에 이르지 못했으니 노 젓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그를 아는 불자들은 그에게 ‘신심 돈독한 원력보살’이라 칭송한다. 박 법사와 함께 40여년간 생활불교운동을 함께해 온 선진규 봉화산 정토원장은 “이(理)와 사(事)를 겸비했다”는 말로 그를 평가했다.

“박 법사는 불교를 공부하는데 머물지 않고 재가모임을 만들어 함께 공부하고 실천하는데 앞장서 왔죠. 공부하는 이(理)와 함께 재가불자들의 원력을 결집해 풍기불교회관인 심우원을 개원했으니 사(事)를 실행한 것이겠지요.”

현재 박 법사와 함께 풍기불교법우회를 이끌고 있는 전인환 법사도 30여년 전 그의 지도로 불교에 입문했다. 전 법사는 “1974년 재가모임을 조직하고 심우원을 개원하기까지 풍기불교법우회의 오늘을 있게 한 분이 바로 박 법사”라며 “항상 주위를 맑고 향기롭게 만드는 청정한 재가수행자”라고 말했다.

40여년 전 불교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컴컴한 암흑에 갇혀 지냈다. 꿈 많던 중학생 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년병으로 징집됐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스물셋이 돼서야 제대했다. 그러나 청년이 되어 찾아간 집은 말 그대로 폐허였다. 살아야 할 희망을 찾고 싶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가난과 전쟁으로 배움이 짧았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막노동’과 ‘날품팔이’가 전부였다. 고향을 떠나 객지를 전전했다. 불혹을 앞둔 어느 날, 풍기에 작은 인쇄소를 열어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객지를 떠돌면서 익힌 손재주에 성실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쇄소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었다. 생계에 대한 걱정과 어려움은 멀어져 갔지만 그의 가슴 속 한가운데 자리 잡은 검은 응어리와 한(恨)은 좀처럼 씻기지 않았다.

“늘 억울하고 원망스러웠죠. 나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세상은 왜 이렇게 불평등하고 불공평한 것인지…. 불만, 불평만이 가득했으니 일상이 결코 즐겁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쇄소에는 교회나 성당, 사찰과 관련한 인쇄 일이 많이 들어왔다. 당연히 일감을 들고 온 목사나 신부, 스님 등 종교인들과 대화할 기회도 많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가슴 속 깊이 박힌 검은 응어리와 한에 대해 묻곤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얽인 실타래를 시원하게 풀지 못했다.

“목사님이나 신부님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섭리’라며 그냥 받아들이라 했죠. 그런데 어떻게 그냥 받아들이라는 건지,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냥 이해하고 순응할 수가 없었어요. 신이 있다면 공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비구니스님이 인과와 연기를 설명하시면서 불서 몇 권을 주셨어요.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스님이 주신 책을 탐독했죠. ‘모든 공포와 두려움은 바로 나에게서 비롯됐다’ 바로 여기에 답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조금씩 생각의 방향을 바꿔보았다. 모든 게 나에게서 비롯됐다고 하지 않았나. 부정과 증오의 마음을 씻어내고 긍정과 행복의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했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깊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아나 아물듯 검은 응어리도, 아픔도 긍정과 행복의 마음 앞에 조금씩 녹아 내렸다. 그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커졌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함께 나누고 싶어 마음을 굳혔다. ‘도반들과 인연을 짓고 함께 공부할 공간을 만들자.’ 막연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변하니 희망이 솟구쳤다.

희망을 보여준 비구니스님을 찾아갔다.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허탈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의 눈에 비친 불교는 할머니들이 불상에 엎드려 절하면서 가족의 복을 비는 기복적인 모습뿐이었다. 답답했다. 법당에는 젊은이도, 남성불자도 없었다. 법회라는 말조차 생소한 시기였으니 오히려 당연한 모습이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먹고 살기 빠듯한 1970년대 사찰의 일반적인 모습은 그러했을 터. 그럼에도 그의 마음에 막 자리 잡은 신심(信心)은 줄어들지 않았다.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밝히겠노라 발원했다.

“이곳저곳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서울에 가면 무진장 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도움을 주실 거라 하는 거예요. 곧장 조계사로 향했습니다. 참으로 호탕하고 넉넉한 분이였습니다.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러자’ 하시는 겁니다. 당시는 고속도로도 없던 때라 풍기에 오시면 하루를 묵어야 하는데 그런 수고조차 마다하지 않으셨지요. 여기에 통도사 종범 스님, 선진규 법사 등이 흔쾌히 마음을 내시면서 풍기지역에 법회를 열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생긴 겁니다.”

산사를 찾아가는 수고로움을 덜고, 남성 불자들도 쉽게 동참할 수 있도록 풍기읍내에 법회공간을 마련했다. 읍내에서 법회를 하니 사람들은 그냥 ‘읍내법회’라 불렀다. 우선 가까운 지인들을 법회에 초대했다. 시작은 조촐했다. 풍기지역 불자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지금껏 경험한 불교와는 다른 낯선 모습이었으니 법회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두세 차례 법회를 봉행하니 상황이 급변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불교의 새로운 모습은 말 그대로 화젯거리가 됐다. 여기에 무진장 스님, 종범 스님, 선진규 법사 등의 열정적인 법문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읍내법회’에는 동참하려는 불자에다 구경나온(?) 사람들까지 더해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석주 스님과의 인연도 이즈음의 일이다. 불교공부에 목말랐던 그는 1974년 서울 도선사에서 열린 불교학생회 지도교사 수련법회에 참석했다. 당시 계사로 참석한 석주 스님을 뵙게 됐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함께 불교를 공부하는 재가불자모임’을 구상하게 됐다. 그해 11월, ‘풍기불교법우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으로 취임했다. 그제야 ‘읍내법회’는 ‘풍기불교법우회 정기법회’라는 여법한 이름을 갖게 됐다.

법회가 활성화되자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났다. 바로 장소 문제였다. 특정 사찰의 신도조직이 아닌 까닭에 마땅한 신행공간이 없어 항상 법회장소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다.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법회를 이어오길 20년. 창립 20주년 기념법회에서 박 법사를 비롯한 풍기불교법우회는 자신들만의 신행공간을 마련하고자 뜻을 모았다. 부처님오신날 봉축연등 모연으로 기금을 모으고 십시일반 모금운동으로 원력을 결집했다. 그렇게 15년간 1억원을 모연해 마침내 2009년 풍기읍내에 330㎡의 법당을 마련했다. 그리고 함께 불성(佛性)을 찾아 공부하고 정진하자는 의미로 ‘심우원(尋牛苑)’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풍기불교법우회는 지난 11월29일 창립 40주년과 심우원 개원 5주년을 축하하는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윤회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다음 생에 대해 생각하지도, 바라지도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우니 금생에 열심히 정진하란 간절한 당부입니다. 확고한 목표를 세워 지혜의 씨, 복덕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면 행복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심우원 불단 왼쪽에는 태극기와 함께 ‘참전순국소년병영가(參戰殉國少年兵靈駕)’ 위패가 봉안돼 있다. 한국전쟁 당시 박 법사처럼 소년병으로 징집돼 참전했다 순국한 3260위의 영가를 위한 것이다. 6·25참전소년병전우회 회장 소임도 맡고 있는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이후 옛 전우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항상 몸과 마음, 입으로 ‘아미타부처님’을 염송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순국한 전우들을 천도해 극락으로 보내자고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여리고 어린 목숨을 내놓은 이들이니 반드시 환생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어느 생이든 해탈하고 성불해 육도윤회의 굴레를 함께 벗어나자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소년병들의 공로가 정당하게 평가받고 후세에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기도입니다.”

박 법사의 삶에는 ‘유마경’의 가르침이 올곧게 깃들어 있다. 유마거사는 문병온 문수보살이 어떻게 병이 들었냐고 묻자 자비심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말한다. 공감(共感)은 보살의 마음이다. 박 법사는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며 반야용선이 되기를 서원한다.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는데 행복이 있기에 그는 더불어 함께 웃는 하루하루를 위해 쉼 없이 노를 젓는다. 그가 지금 웃고 있는 이유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272호 / 2014년 1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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