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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귀천 모든 손 감싸는 장갑에서 부처님 마음 느꼈지요”

‘미술인생 30년’ 정경연 교수

▲ 교육자이자 ‘장갑작가’로 돌아가는 정 교수는 염화미소를 화두로 삼고 부처님 가르침이 작품과 생활에서 단단히 손을 맞잡길 염원한다.

섬유의 날실과 씨실의 가장 기본 패턴을 이루고 있는 면장갑은 수공예, 서민, 노동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장갑을 낀 손은 모두 균등한 존재가 된다. 이러한 손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소통의 도구이기도 하다.

장갑 이용한 데뷔작 미술계 파란
경계 넘어선 ‘장갑작가’로 불려
불심 독독한 어머니 영향에 불연
25년간 홍익대 불교동아리 지도

뇌수막종에도 여성개발원장 수행
여성불자 개개인 역량결집 중점
불교여성광장 건립 기틀 마련

“소중한 시간·인연들 지침 삼아
부처님 가르침 생활서 실현할 것”

30년 간 ‘장갑’을 소재로 대중과 이야기를 나눠 ‘장갑작가’라 불리는 홍익대 미술대학 정경연 교수는 “손과 그를 감싼 장갑을 통해 ‘평등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30년 간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손, 노동자들의 땀과 삶이 배어있는 장갑 등 다양한 시각이 만들어낸 기형적 모양은 대중의 목소리를 가진 삶의 형태로 표현됐다. 독실한 불자인 정 교수는 그 안에 평등과 자비, 인연이라는 부처님 가르침을 담았다. 무의미한 만남도 손끝을 스치며 인연으로 발전하듯, 장갑을 통해 따뜻한 감성의 체온을 공유하는 것이다. 정 교수는 “결국 내게 있어 면장갑의 존재는 작가적 삶의 여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화두며, 깨달음을 강구하며 정진하는 도반인 셈”이라며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과 자비, 무욕무심, 무아 등이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 홍천 백락사에 전시했던 ‘일락전’ 중 한 작품.

그녀와 장갑과의 인연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유학을 떠난 어린 딸이 타지에서 고된 작업으로 손이 상할 것을 걱정하며 어머니가 마음을 담아 보내온 수십개의 면장갑이 그 시작이다. 면장갑을 보는 순간 쭈글쭈글한 할머니의 손, 노동자의 손, 수화하는 손 등 손과 장갑에 대한 강한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정성을 담아 장갑을 보내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첫작품은 1976년 세상의 빛을 보며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회화와 공예, 섬유 등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미술 장르간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게 당시 미술계의 평이다.

그녀는 2001년 세연을 접으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어머니의 사랑으로 처음 작품을 구상할 수 있었다”며 “강한 불심으로 늘 평등을 말하고 사회공헌에도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는 종교적 스승이자 내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불연과의 시작과 끝도 작품이 그러했듯 어머니로부터다. 삶이 불교 그 자체였던 어머니는 경봉 스님의 유발상좌였다. 생각과 행동, 일상이 불법의 실천이었던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일찍이 불연을 맺고 그 가르침을 자연스레 체득했다.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모태신앙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불교에 더욱 몰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에 그 의미가 더해졌다.

▲ 홍익대 미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정 교수.

1980년 26세라는 나이에 파격적으로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임용되고 출산을 한 후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다. 그녀는 모든 게 어머니의 정성스런 기도 때문이라는 생각에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홀로 경전을 펼쳐 틈틈이 익혔다. 불법에 흠뻑 빠져있을 때 만난 것이 홍익대 불교학생동아리다.

1980년대 초는 학생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에 나섰던 시기였다. 경찰서에 잡혀간 학생들을 빼내 올 수 있는 사람은 지도교수뿐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경찰서를 들락거려야하니 어느 누구도 동아리 지도교수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달랐다. 학생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학생과 제자 관계를 넘어 도반이란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불교동아리와의 인연이 25년간 이어졌다.

홍대 불교동아리는 몇 해 전 학생 수 저조로 해체됐다. 동아리활동보다는 스펙 쌓기에 급급한 이 시대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30여년의 전통을 자랑했고 한때는 동아리방에 서있을 자리조차 없어 수십명의 학생들이 복도에 늘어선 채 법회를 봉행해야만 했던 동아리였다. 100명 이상이 모여 법회를 할 때는 학생회관 전체에 목탁과 염불 소리가 펴져 장관을 이뤘다. 아쉬움이 많지만 그녀는 긍정을 찾으려 했다.

“최근엔 학교 밖에서 청년불자들이 부처님 법을 따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잖아요. 각 사찰의 청년법회라든지 정토회 같은 곳에 청년불자모임이 많이 생겨났으니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 믿고 싶어요.”

불교동아리 지도교수를 시작하며 불교와의 인연은 더욱 돈독해졌다. 동아리를 지도하던 법사들과 함께 불교공부에 빠진 것도 이때부터다. 방학이 되면 스님을 찾아가 ‘초발심자경문’에 몰두했다. 수없이 해외 학회에 가고 밤샘 작품 활동에 몰두하는 시기였지만 경전을 공부하면 피로가 풀리고 자신감이 생겼다. 작업을 마치고 새벽녘 홀로 ‘반야심경’을 욀 땐 영험한 기운이 주위를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일주일에 2번은 절에 방문했다. 조계사와 봉은사, 능인선원에서 열리는 불교강좌에 참석하며 불교공부에 집중했다. 합천 원당암 혜암 스님을 찾아가 참선을 하고 양산 백련암에 올라 수없이 절을 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땐 통도사 극락암을 찾아 기도했다. 구도에 대한 욕망이 아주 컸던 40대 초반엔 100일간 밤 11시면 관악산에 올라 자시(子時)기도를 하고 기수련에 몰두했다. 수업과 작업 활동, 기도로 하루 2~3시간 자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렇게 30년을 쉴 새 없이 달려왔다.

▲ 11월27일 불교여성개발원장 소임을 이임했다.

3년 전 불교여성개발원장 자리를 제안 받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작품에 대한 고뇌로 90일간의 묵언수행을 마친 후였다.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원장직을 받아들인 건 뇌수막종 양성 판정을 받고난 후다. 수술에 따른 실명 위험성이 커 수술도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뇌종양을 “선물”이라고 했다.

“병원을 나서는데 거짓말처럼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여여함이었을까요. 진단 이후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원장직을 맡고 더욱 바쁘게 살았죠. 덕분에 제 자신을 더욱 아낄 수 있었어요.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면 하루를 번 것같아 매일 매일이 부자같아요.”

그녀는 지난 2년간 원장직을 맡으며 여성불자 역량결집에 중점을 뒀다. 여성 역량강화 교육 프로그램 개발, 불교여성개발원 합창단 창립, 다문화가족법회 시행, 불교기관과 업무 협약 등 여성이 주체가 될 수 있는 활동에 적극 나섰다. 불교여성광장 건립을 위한 기금 마련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큰 성과다.

2년 간 최선을 다해 달려왔기에 자리를 내려놓는데 아쉬움은 없다. 그녀는 “모든 일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강조하며 “30여년 전 성철 스님이 지어주신 관음행(觀音行)이라는 법명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처음 법명을 받아들고 “관음과 행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어렵고 무서웠다”는 그녀는 “진정한 ‘행’은 이제부터 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앞으로도 불교계에서 해야 할 것 일들이 많다. 불교포럼 공동의장으로, 홍천 백락사에서 진행하는 환경설치미술전 운영위원장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불교여성개발원 회원으로서 적극 활동하는 것도 회향의 일부라 생각한다.

그녀는 인생을 소설책에 비유했다. 책장을 넘기면 장면이 바뀔 뿐이지 근본이 바뀌거나 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소중한 시간 많은 인연을 맺었고, 참다운 스승을 만나 어떻게 공부하고 실천해야하는지 지침서를 얻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나침반으로 삼아 부처님을 향해 항해해야죠.”

12월 말 이탈리아 로마 전시회를 시작으로 그녀는 ‘장갑작가 정경연’으로 되돌아간다. 정 교수는 ‘염화미소(拈華微笑)’를 화두로 삼았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부처님 가르침이 작품과 생활에서 촘촘하고 단단히 손을 맞잡길 염원하는 마음에서다. 빈부귀천 막론하고 모든 손을 품는 장갑의 품을 닮고 싶어서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272호 / 2014년 1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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