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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철벽 뚫으려는 선의 향기 따라 신심을 긷다

108선원 참배하는 순례단

▲ 봉암사 태고선원 스님들 사시예불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번 생에 깨달음 얻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이리라. 예불에 동참한 108선원순례단원 신심도 더 깊어졌다.

가로등만 눈을 밝히고 있었다. 빛 따라 버스 한 대가 움직였다. 정차한 곳에선 스님과 하얀 옷을 맞춰 입은 이들이 내렸다. 승차하는 사람들을 합장 반배로 성심껏 맞이했다. 다음 정차할 장소는 문경 희양산이었다. 의왕 청계사 향기법문 108선원순례단(단장 성행 스님, 이하 순례단)이 모두 오르자 버스는 스스로 불을 밝혔다. 그리고 새벽 어스름 뚫고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희양산파 종찰로 향했다.

의왕 청계사서 2012년 창립
사찰과 선원 등 41곳 참배
하안거·동안거에 대중공양

단장 성행 스님 늘 솔선수범
가는 곳마다 목탁 치며 안내

1월28일 10차 순례 봉암사
태고선원 스님과 사시예불
수좌 적명 스님 법문 경청
마애불 친견뒤 김룡사 순례

순례단이 10차 순례지로 정한 곳은 조계종립 태고선원 봉암사였다. 신라 헌강왕 5년(879)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 스님이 창건한 이래 선도량으로 일관해온 선찰(禪刹)이다.

순례단은 사찰과 선원 등 108곳을 순례하겠노라 원력 세운 이들이었다. 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에게 대중공양 올리고 사찰 순례하면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키겠다는 굳은 신심의 발로다. 단장이자 의왕 청계사 주지 성행 스님이 10년 넘게 홀로 안거 때마다 선원 대중공양을 다니다 도반을 찾던 중 시절인연이 닿았다.

외국계 은행에서 26년 근속하고 그만 둔 유경희(59·자연) 회장이 본격적으로 청계사에 다닐 무렵이었다. 개인적으로 108순례를 했고, 100일 새벽기도를 세 번 회향할 즈음이었다. 경전반 끝나고 쓴 후기를 본 성행 스님이 유 회장을 만났고, 순례단 발족이 무르익었던 것. 순례단은 2012년 10월15일 창립했다. 2013년 1월23일 경주 불국선원, 불국사, 석굴암, 기림사, 분황사를 첫 순례지로 택했다. 이를 시작으로 백천사 방생법회와 조계사, 길상사, 천불선원, 대승사, 용문사, 직지사, 석가사, 고금당선원, 고운사, 봉정사, 제주 남국선원, 약천사, 홍련암 등 38곳의 사찰과 선원을 순례했다. 하안거와 동안거에는 꼭 선원 찾아 대중공양을 올렸다. 버스 한 대 인원인 42명으로 단원을 제한했다. 선원이나 사찰 찾을 때 많은 숫자는 도리어 폐를 끼칠 수 있다는 배려였다.

▲ 성행 스님은 가는 곳마다 직접 목탁치며 순례단을 이끈다.

1월28일, 순례단 실은 버스가 희양산에 다다랐다. 성행 스님은 가사 수하고 일주문 앞부터 걷기 시작했다. 공양물 가득 실은 버스는 부득이하게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지객승이 순례단을 맞았다. 태고선원에는 95명이 동안거 중이었다. 스님들은 4곳에서 정진하고 있었다. 6~8시간부터 10시간, 14시간을 정진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화두라는 은산철벽을 뚫고자 선기가 번뜩이는 선불장이었다. 이번 순례에 동참한 단원 37명은 묵언했다. 발소리도 숨을 죽였다. 화두 성성할 때 십리 밖 소리도 천둥소리로 들린다는 지객승 말씀에 숨소리도 숨겼다.

대웅보전에는 줄 맞춘 좌복이 스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례단은 준비해온 꽃, 과일, 초, 향, 떡을 공양 올렸다. 이번 순례로 회향하는 최복경(정각심·86), 오유순(자명심·83), 김정아(혜성화·82), 이흥순(자심월·80)불자 등 순례단 고문인 원등(圓燈) 보살들이 정성스럽게 불단에 공양물을 내려놨다. 공양 뒤 순례단은 법당 한 쪽에 좌복 깔고 앉았다.

어디선가 죽비소리가 들렸고 오전 11시가 되자 스님들이 하나 둘 좌복에 앉았다. 순례단은 합장했다. 죽비 사시예불이 끝났다. 부처님을 향해 3배, 신중단 향해 1배 그리고 죽비소리와 함께 예불은 끝이었다. 시간 낭비는 없었다. 군더더기 없는 절에는 온마음이 실렸다. 태고선원 봉암사 스님들 사시예불은 짧고 간결했다. 1분이면 족했다. 그러나 깊었다. 스님들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얼음장 같은 법당 바닥처럼 냉철했다. 이번 생에 깨달음 얻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이리라. 예불에 동참한 108선원순례단원 신심도 더 깊어졌다.

▲ 조계종립 태고선원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의 소참법문.

선방에서 50년 넘게 수행해온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사시예불 마친 순례단을 맞이했다. “보살행 원력이 느껴진다”고 덕담을 건넨 스님은 소참법문으로 순례단에게 기도의 길을 제시했다.

“법당에서 소원 비는 기도는 초급입니다. 중급은 자신의 소원을 정해진 숫자만큼만 하는 것이지요. 만족할 줄 알고 내려놓은 뒤 마음에 생긴 여유에 남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그때부터 진정 남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계속 넓어지면 주변을 넘어 인연 없는 존재들의 고통까지 구제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이 기도가 쌓이면 알게 모르게 우리 마음은 부처님이 돼 가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부처님에게 이제 중생 제도 그만두라 말씀드리고 당신을 대신해 자신이 깨달음 성취해 중생을 제도하겠노라 서원하십시오. 이게 기도입니다.”

순례단 가슴이 뜨거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예고 없이 모두가 합장하고 스님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 봉암사 마애불을 참배하는 순례단.

십시일반 정성 모아 과일과 소정의 공양비를 원주스님에게 전한 순례단은 마애불로 발길을 옮겼다. 목탁소리 난다는 계곡 앞 바위는 얼어붙어 있었다. 상관없었다. 지심으로 3배 올리고 난 뒤 미련 없이 김룡사로 떠났다.

암자에 울타리 치고 일체 출입을 금하며 10년 동안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긴 수행을 마친 성철 스님이 최초로 설법한 절로 유명한 곳이 김룡사였다. 원등보살 앞세운 순례단은 성행 스님이 목탁을 들자 간단한 의식으로 참배를 마쳤다. 몇몇 단원들은 법당에서 화두를 들었고, 다른 이들은 김룡사 곳곳에 배인 성철 스님 향기를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전날 집에서 저마다 소원지에 적어온 바람들을 소각하며 연기와 함께 간절함 마음을 하늘로 띄워 보냈다.

▲ 순례단은 참배한 곳마다 염주알에 새겨 한 알씩 꿴다.

염주 세알에 각각 태고선원과 봉암사, 김룡사가 새겨졌다. 순례단이 참배한 곳을 염주 한 알에 새겨 108염주를 만들어야 회향이었다. 해당 사찰의 낙관을 찍어 간략한 메모를 남겨 당시 가졌던 마음도 되새긴다. 이제까지 염주 알에 박힌 선원과 사찰은 41곳. 이번 순례가 마지막인 단원과 처음인 단원에게 태고선원 봉암사는 인상 깊게 남았다. 원등보살 5명이 떠나고 신입단원 5명이 들어왔다. 신입 정상재(상적·61)불자는 “불교대학 수료하고 도반들과 입단했다”며 “적명 스님 법문에 감명 받았다. 시간나는 대로 참석해 신심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반면 떠나는 원등보살에게는 아쉬움이 짙게 배었다. 오유순 불자는 “첫 순례였던 경주가 생각난다”며 “석굴암 부처님 미소가 마음에 남았는데 다시 찾아 행복했고. 더 이상 순례를 함께 할 수 없어 미안하다”고 전했다. 원등보살 최고령 최복경 불자는 “봉정암도 오르고 인도 순례도 다녀왔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안타깝다”며 “공양미를 가방에 넣고 사찰을 순례할 때마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순간이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 봉암사 대웅보전에서 순례단 기념촬영.

순례단은 조기졸업(?)한 원등보살들에겐 사진첩과 낙관수첩, 다 채우지 못한 염주로 단주를 만들어 선물했다. 성행 스님이 고마움을 담아 직접 카드에 글을 섰고 회장은 한지로 하나하나 손수 카드를 만들었다.
동 틀 무렵 출발해 땅거미 진 뒤 돌아온 버스 안 순례단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보다 환희심이 일렁였다. 은산철벽 깨부수려는 선의 향기가 깊을수록 순례단 신심도 함께 여물어 가고 있었다.

문경=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281호 / 2015년 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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