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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미타불의 진면목

기자명 이제열

석가모니불과 중생 내면에 담긴 영원한 불성

▲ 일본 교쿠린인 소장 아미타불도. 고려 후기 조성됐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해온 사람도 불교교리를 모두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일반불자들에 불교는 오르지 못할 산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불교가 안고 있는 교리의 난해성 때문이다. 불교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은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이는 신행의 기본이랄 수 있는 불타관과 보살관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대승불교의 수많은 부처님은
불성의 여러 모습 드러낸 것
각 부처님의 공덕과 성취는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어

평생 불자로 살았다하더라도 교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불보살들의 의미와 서로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불자는 그리 많지 않다. 불교는 석가모니라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다. 그럼에도 수많은 초월적 성격을 지닌 부처들이 등장한다. 그만큼 불교 신행형태는 복잡하다. 초기경전에는 가섭불을 비롯한 과거칠불과 이십사불을 언급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들어오면 과거천불, 현겁천불, 미래천불, 백억항하사불, 무량아승지불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화엄경’에서는 온 법계에 부처가 가득하여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대승불교의 불타관은 얼핏 불교를 다신론 종교, 혹은 교체신론 종교로 오인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마치 허공이나 주변에 부처들이 영적인 모습이나 신적인 모습을 띠고 활동하는 것처럼 비쳐진다. 불자들이 경전에 등장하는 부처님들에 관해 일으키는 의구심은 대강 이런 내용들이다. 불교에는 왜 이렇게 많은 부처님들이 존재하는가? 또 이 많은 부처님들은 누구이며 그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부처님들은 석가모니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불자들이 일으키는 이러한 의구심들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불자들의 신앙형태는 중심점을 잃고 혼란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지금 주제로 삼고 있는 아미타불의 정체성과 본질에 대한 이해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아미타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곧 기타 모든 부처님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과 직결된다.

불교는 분명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과거에 몇 분의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했는지 현재에 몇 분의 부처님들이 계신지 사실적 근거는 없다. 불교는 연등불에 의해 탄생한 종교도 아니고 미륵불에 의해 탄생한 종교도 아니며 아미타불에 의해 탄생한 종교도 물론 아니다. 불교는 역사적 실재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운 종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난 어떤 부처님도 세상에 직접 나타나서 중생들에게 설법을 한 예는 없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외한 대승불교에 나오는 부처님들은 누구인가?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대승불교의 모든 부처님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별개의 인물들이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의 권화신이라는 점이다. 권화신이란 법을 깨닫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신 부처님이 다른 이름과 역할을 지닌 부처님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는 한량없고 부사의한 공덕을 구비하고 있다. 권화신은 바로 이와 같은 공덕이 새로운 부처님의 이름과 형태를 띠고 중생들 앞에 나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난다는 것은 경전 안에서 나타난다는 의미지 실제 형상을 지니고 나타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속에는 일체의 더러움이 없고 온갖 청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를 부처님으로 삼은 것이 곧 비로자나불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에는 과거로부터 닦아온 바라밀의 공덕이 가득 차 있다. 이를 부처님으로 삼은 것이 노사나불이다. 이런 식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보배로 삼으면 다보불, 번뇌의 병을 치료해주는 능력으로 파악하면 약사여래불, 움직임없는 이치로 보면 부동존여래불 등 얼마든지 새로운 부처님을 탄생시킬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반드시 다른 부처님으로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보살로도 변화하는데 부처님 깨달음에 들어 있는 지혜를 보살화시키면 문수보살, 행위를 보살화시키면 보현보살, 자비를 보살화시키면 관세음보살이다.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인로왕보살 등 한량없는 보살들도 원리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근거해 누가 부처님의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수많은 이름을 탄생시켜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대승불교에 등장하는 수많은 부처님들의 정체를 설명하는 다른 하나는 모든 부처님들이 대승불교에서 중요하게 삼고 있는 불성의 공덕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동일한 깨달음인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설한다. 그리고 그 불성에는 모든 부처들이 성취한 일체의 공덕이 들어있다고 가르친다. 중생의 마음은 번뇌가 아닌 청정과 광명과 기쁨과 자비가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량없는 대승불교의 부처님들은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불성의 다양한 공덕을 불격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수효가 아무리 많아도 중생들의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중생의 마음 안에 들어 있다. 이로써 중생들이 수행을 통해 자신의 불성을 깨닫고 드러내기만 하면 일체의 부처님과 한 몸이 되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중생과 국토를 제도하게 된다. 하나의 불성이 일체제불이 되고 일체제불은 중생들 각자가 지닌 불성과 동체가 되어 온갖 차별을 벗어나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대승불교의 부처님을 이해한다면 이제 아미타불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그 윤곽이 드러난다. 앞서 밝혔듯 아미타불은 수명이 끝없는 부처님, 광명이 끝없는 부처님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수명과 광명의 끝없음은 아미타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곧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그러하고 모든 부처님이 그러하며 나아가 일체중생의 불성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른 부처도 아니며 중생의 불성과 무관한 부처님이 아니다. 아미타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실현하신 생과 사를 뛰어넘은 불생불멸의 열반을 목숨화 시킨 것이며 동시에 온갖 번뇌를 몰아낸 지혜를 광명화시킨 것이다. 또한 중생의 나고 죽는 목숨 가운데서 죽음을 초월해 영원으로 존재하는 분이며 어두운 번뇌 속에서도 광명을 잃지 않는 분이다. 지금도 중생 마음 안에 불성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중생이 성불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을 논하기 전에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일체 부처님과 중생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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