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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양주 운길산역-수종사-한음 별서터

두물머리 품은 산사서 시서화 세 보물을 얻다

▲ 세조와 서거정, 그리고 다산과 초의도 이 길을 올랐다. 저마다 가진 보물 하나를 풀어 놓으려!

"진정성 없이 시 쓴다면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 길어 내려는 것"

수종사 산길은 생각보다 가파르다. 몇 굽이를 휘돌아 걸었지만 산사는 보이지 않는다. 등줄기 따라 흐르는 땀이 그치지 않지만 운길산 깊은 품안에 드니 한적함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겸재 정선도 이 산길을 걸었을까? 화폭에 수종사 담아놓고는 ‘붓 놓은 순간 오른 것이나 다름없다’ 했을 수도 있겠다.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한양(서울) 주변의 진경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독백탄(獨栢灘) 한 폭을 남겼다. ‘홀로 있는 잣나무(독백)’와 ‘여울(탄)’의 조합인데 누가 보아도 지금의 두물머리 풍경이다. 독백은 홀로 떠 있는 잣나무 섬, 즉 지금의 족자섬을 이른 것이다. 그러니 독백탄은 족자섬 여울(족잣여울)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혹, 마주할 기회가 있다면 눈 여겨 보시라. 화폭 오른쪽에 보이는 절은 운길산 수종사고 왼쪽에 보이는 마을은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마재다.

겸재 정선이 세상을 뜬지 3년 후 다산 정약용(1762~1836)이 태어났다. 19살 나이에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다산은 마재마을에서 유년을 보냈는데, 그 때 자주 올랐던 산사가 수종사다. 어릴 때 뛰어놀던 정원이기도 했고 과거공부를 하던 고시원이기도 했다. 14살 때 지었다는 시 ‘수종사에 노닐며[遊水鐘寺]’에는 세상 곳곳을 두루 다닌다 해도 수종사만은 잊지 않고 다시 찾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 담겨 있다.

‘담쟁이 험한 비탈길 끼고 우거져/ 절로 드는 길 분명치 않은데/ 응달엔 묵은 눈 쌓여 있고/ 물가엔 아침 안개 흩어지네/ 샘물은 돌구멍에서 솟아오르고/ 종소리 숲 속에서 울려 퍼지네/ 유람길 두루 밟지만/ 돌아올 기약 어찌 다시 그르치랴.’

샘물은 돌구멍에서 솟아오른다 했는데 그때 그도 종소리를 들었을까? 다산은 수종사 관련 기록에서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고사인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고 적었다. 물 떨어지는 소리를 종소리로 들은 왕이 있다. 다산보다 340여년 앞서 태어난 세조(1417~1468)다.

▲ 만남과 헤어짐을 안은 두물머리.

등창치료차 길을 떠났던 세조는 두물머리에서 하루를 머문다. 아마도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병을 치료한 직후였으리라. 운길산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고 세조는 소리를 따라 산에 들어섰다. 숲길을 따라가 보니 오랜 세월 보낸 흔적이 역력한 절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희유하게도 그 바위벽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문수동자 만나 마음을 열었으니 물방울이 내는 소리조차도 종소리로 들렸을 게다. 세조는 쇠락한 절을 중창(1459년)하고 ‘물소리가 종소리인 절’ 수종사(水鐘寺)라 했다.

▲ 물소리가 종소리인 절의 전경.

가파른 길 끝나니 일주문이다! 고즈넉한 평탄 산길이 아침 햇살을 품은 채 저 불이문까지 이어졌다. 비탈계단 끝에 걸려 있는 요사채가 ‘삼정헌(三鼎軒)’이다.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세 가지 존귀한 것’, ‘세 개의 보물’을 담은 집이다. 세 가지 보물은 무엇일까? 두물머리 내려다보이는 삼정헌에 앉아 차 한 잔 하며 꼽아보자. 대흥사 일지암에서 40여년을 보낸 초의 선사도 수종사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세 보물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다.

초의 선사가 처음으로 수종사를 찾은 건 1815년이다. 잠시 머무르다 겨울추위를 피해 수락산 학림암(학림사)에 가 해붕(海鵬) 스님을 모셨다. 추사 김정희와의 만남이 처음으로 이뤄진 것도 이 때다. 1830년 초의는 생애 두 번째로 수종사를 찾는다. 이 때 초의는 석옥 화상의 시에 차운한 시를 남겼다. ‘수종사차석옥화상운’ 12수 중 한 수를 보자.

‘혼미할 때 누가 가져온 앙산 차는/ 낡은 경전 나른히 잡은 (나의) 눈곱을 씻어주네/ 수종사 아래 마음 알아주는 이 있으니/ 인연 따라 백운가에 머무네.’

시 속의 ‘수종사 아래 마음 알아주는 이’는 초의를 알아주었던 다산과 그의 자제들을 이른다. 추사와의 인연이 맺어진 학림암 걸음도 다산의 큰아들 유산 정학연의 배려로 시작됐다. 초의와 다산일가와의 친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가늠해 볼만한 대목이다.

젊은 시절 초의는 스승을 찾고 있었다. 차향을 따라 초의의 일생을 써 내려간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박동춘 지음)를 통해 당시의 초의 심정을 엿보자.

‘참다운 가르침이 멀어지면 큰 거짓만 크게 일어나는 것. 이미 마을마다 선비 가득하지만 어디에도 어진 사람 찾기 어렵네. 내 도리 행해보려 해도 어디에 물어야할지 끈이 없구나. 이리저리 향기 나는 곳 찾아가 봐도 끝내는 비린내 나는 생선가게 같았지. 남쪽으로 모든 성을 돌아다니랴. 청산의 봄을 아홉 번이나 보냈다오.’

유배 온 다산을 보고는 ‘하늘이 해남에 어진 스승을 보냈다!’며 감탄한 초의는 가르침을 청했다. 다산 역시 초의의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는 경서와 시문의 심오함을 전했다. 초의가 불유선을 회통할 수 있었던 건 당대 최고의 진보 유학자 다산에게 공부했기에 가능했으리라.

초의에게 전한 다산의 ‘시학론’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시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본디 뜻이 저속하면 억지로 청고(淸高)한 말을 해도 조리에 맞지 않다. 본디 뜻이 편협(偏狹)하고 비루(鄙陋)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길어 내려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한다.’

시만 그러할까! 그림도 그렇다. 작가의 깊은 심상이 담기지 않은 그림은 어색해 보인다. 왠지 억지로 모양을 내고 색을 입힌 듯하다. 그런 그림 앞에 사람은 오래 서 있지 않는다. 선도 마찬가지다. 지고한 수행을 통해 건져낸 일갈이 아니라면 선사의 일언은 사자후가 아니다.

▲ 다산이 머물렀던 여유당.

다산과 초의 그리고 추사를 관통하는 코드가 있다. 세 사람 모두 시와 그림, 그리고 선(禪)에 밝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차를 좋아했다. 삼정헌의 뜻을 두고 ‘시와 선, 차가 하나’라 보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허나, 삼정헌의 존귀한 보물 세 가지를 무엇으로 꼽을지는 각자의 마음에 달렸다. 필자는 시, 화, 선을 꼽는다. 차는 이 세 보물을 하나로 묶어주는 금줄로 보고 싶다. 그래야 어디에 앉든 차를 내는 순간 시화선이 멋지게 풀리지 않겠는가!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풍경이 장관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만남과 헤어짐을 안은 두물머리가 확연히 보이고, 저 멀리 다산이 뛰어 놀았을 마재마을도 보인다. 동문선을 지은 서거정(1420~1488)이 수종사에 올라 ‘동방의 절 중 제일가는 전망’이라 한 이유를 알 듯하다.

세조가 수종사라 이름한 후 서거정이 올라 풍광에 감탄했고, 겸재는 저 아래서 여기를 바라보며 독백탄을 그렸다. 다산은 그 그림 속을 노닐었다. 멋진 남자다! 유배를 마친 다산은 수종사를 다시 찾으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나이가 듦에 한껏 수종사를 뛰어오르지 못하는 심경도 시를 통해 토로했을 정도로 그는 운길산보다 더 큰 품으로 절을 품었다. 삼정헌에서 우려낸 차향이 유독 깊고 맑았던 건 수종사 특유의 석간수 때문만은 아니다. 시와 그림, 그리고 선기가 스며있는 도량이기 때문이리라!

해탈문을 나서니 세조가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반긴다. 두물머리 앞을 흐르는 강이 제 스스로 언 몸을 풀면 은행나무도 제 스스로 새순을 돋을 게다. 그러면 봄이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남양주 운길산역. 2번 출구로 나와 운길산로를 따라 20여분 걷다 보면 수종사 입구 표지판(진중리)이 보인다. 차와 사람 모두 다닐 수 있는 산길이다. 가파른 길인만큼 가능한 등산을 권한다. 수종사 일주문까지 1시간이면 충분. 경내까지 10여분 소요. 송촌리 하산길을 택한다면 등산할 때와는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한음 이덕형 별서터를 둘러 본 후 문안산길 5코스 중 새로 낸 샛길을 따라 마을 구경하며 20여분 걸으면 등산할 때 보았던 수종사 표지판(진중리)이 보인다. 한음 이덕형 별서터를 시작으로 문안산길 5코스(2.4km)를 따라 운길산 역으로 걷는 것도 좋다. 수종사 031)576-1792

이것만은 꼭!

 
한음 이덕형 별서터 : 조선 역사상 최연소(31세)로 대제학에 오른 이덕형은 임란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고, 250여편의 한시를 남겼다. 그 역시 말년에 수종사에 올라 탄핵의 시름을 달래다 생을 마감했다. 별서 ‘대아당’이 있던 자리에 그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하마석이 남아 있다.

 
다산유적지 : 운길산역에서 약 5km 떨어져 있다. 차로는 15분, 걸어서는 1시간 20분. 다산 정약용의 고향 마재마을에 조성된 유적지에는 다산기념관과 생가, 묘, 사당 등이 들어서 있다.

 
팔각오층석탑 : 고려 시대 팔각 석탑의 전통을 이은 조선 시대 석탑. 기단부는 불상대좌(佛像臺座)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 양식이다. 왕실의 원력에 조성된 석탑임이 출토된 사리장엄(舍利莊嚴)과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2013년 이 석탑의  역사, 예술, 건축학적 가치를 인정 해 보물 1808호로 지정했다.
팔각오층석탑 옆에 있는 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7호)는 태종의 다섯 번째 딸 정의 옹주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원통형 탑신의 운룡문이 화려해 이채롭다. 일각에서는 정의옹주가 이 탑의 화주로 참여했을 뿐 그의 탑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에 따른 학술조명이 필요해 보인다.

 
두물머리 :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기에 양수리(兩水里)로 불려왔다. 두물머리는 양수리의 순 우리말. 400년된 느티나무와 연꽃, 갈대꽃이 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물과 꽃의 정원으로 불리는 세미원은 2.5km 떨어져 있다.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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