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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기자명 이미령

쪼그라든 세상서 만난 운명의 지배자 ‘자유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읽고 나서 감히 리뷰를 써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책이 몇 권 있는데 그 중에 한 권이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조르바는 보통 사람들의 격과 틀을 넘어서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유롭습니다. 너무 자유로워서 조르바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자유 그 자체이니, 조르바에 대해 뭔가 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럼에도 조르바를 말해보고 싶습니다.

보통 사람 격과 틀 넘어선 존재
자유 상징이자 그 자체인 인물

‘두목’이라 불린 책벌레 청년에
갑작스레 나타나 ‘동행’ 자청
‘붓다’ 되고자 노력하는 청년과
붓다 그 자체로 살아가는 조르바

정반대 성향 두 사람의 만남은
삶의 두 극단 선명히 부각시켜

인생 신비 만끽한 조르바의 삶
진리 고민 대신 진리의 삶 보여

이 책은 서른다섯 살 먹은 책벌레 청년이 비오는 이른 새벽, 크레타 섬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항구 술집에서 대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청년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읽은 이윤기 번역본에 의하면 그는 줄곧 ‘두목’이란 이름으로 불립니다. 딱 한 번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오그레.

청년은 절친한 벗과 막 이별을 한 직후입니다.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신하겠다는 벗은 이 청년을 안타까워합니다. 책상을 떠나지 않고 늘 오래된 문헌을 보며 현자의 삶을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벗은 이 청년에게 대놓고 비웃습니다. “책벌레!”라고 말이지요.

청년은 현재 불경을 베껴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분명 숫타니파타입니다. 숫타니파타에서 붓다와 마라, 혹은 붓다와 바라문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이 청년은 공책에 옮겨 쓰면서 붓다가 추구하는 경지에 대해 탐색하고 그에 도달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는 북적대는 도시를 떠나 조용한 섬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경지에 조금 더 바싹 다가가고 싶어 합니다. 하여, 이 청년은 지금 리비아에 면한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자리를 하나 얻었고, 그곳으로 떠나려고 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지요.

아무튼, 비오는 이른 새벽 항구의 선술집에서 창밖을 망연하게 내다보던 이 청년 앞에 웬 산적두목 같은 사내가 떡하니 등장합니다.

“여행하시오? 날 데려가시겠소?”

첫 만남 자체가 뜬금없습니다. 주의 깊게 그를 뜯어보며 “왜요?”라고 묻는 청년에게 조르바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왜요! 왜요! 그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난데없이 나타나서 자기를 여행에 데려가 달라는 이 늙은 사내를 앞에 두고 선뜻 ‘그럽시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청년에게 그는 또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나이는 60대로 접어든 게 틀림없고, 키는 훌쩍 큰데 깡마르고, 움푹 들어간 뺨에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와 잿빛 고수머리 그리고 밝고 예리한 눈동자를 지닌 사내 조르바는 이렇게 해서 청년 오그레의 갈탄광 매니저가 되어버립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렇게 청년 두목과 그의 매니저인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한겨울을 나면서 보고 겪은 일들을, 그리고 갈탄광을 열심히 파내려 들어가다가 쫄딱 망해버린 사연들을 적고 있습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태생부터가 자유롭게 살도록 되어 있는 조르바는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노라면 ‘이렇게 막 살아도 되는가’ 싶은 걱정이 일기도 합니다. 반면 청년은 완전 딴판입니다. 청년은 조용하고 사색적인 생활을 합니다. 밤새도록 숫타니파타를 베껴 쓰면서 자신의 책상 앞으로 붓다를 불러내어서 그를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지고지순한 정신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금욕적인 삶을 지향합니다. 먹는 걸 좋아하지 않고, 처녀들을 보면 그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탄광의 인부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신사입니다.

반면, 조르바는 술과 여자에 환장합니다. 온몸에 김이 나도록 먹어대고, 하루 세 끼 다 챙겨 먹어야 하고, 책 읽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종교에 대해서는 (신을 믿지 않는 나조차도 그래도 괜찮나 하고 겁이 날 정도로) 지독하게 비판적입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고 지금 현재에 살고 있으니 그 현재를 충실하게 살면 된다는 게 조르바의 인생관입니다. 탄광의 인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몰아세웁니다. 전쟁에 나가 숱한 사람들을 죽였고, 숱한 여자와 놀아봤고, 자식을 낳았지만 챙기지 않는 듯합니다. 그리고 다 늙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을 ‘두목’이라 부르며 붙어살면서 그의 돈을 탕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네다섯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앞서는 보지 못했던 구절이 눈에 들어오고, 예전에 무릎을 치게 했던 문장을 다시 만나면 가슴이 설레다 못해 구토가 날 지경입니다.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늙은 사내 조르바에게는 날 애달게 하는 매력이 넘쳐납니다. 그걸 찾아볼까요?

세상의 신화에 대해 너무나도 독창적인 해석을 내리는 조르바를 향해 책상물림 청년 두목이 이렇게 말합니다.

“조르바, 책을 써보지 그래요? 세상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주면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러자 조르바는 대꾸합니다.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못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이 말 하나에 조르바의 인생관이 담겨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에 대해 알아보느라고 한 번도 ~~인 적이 없었습니다. 아, 정말 그렇습니다. 불교신자는 붓다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하느라 일생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건 조르바 스타일이 아닙니다. 조르바는 붓다로 살아버립니다. 붓다에 대해 알아보는 게 아니라 붓다로 사는 것이지요. 진리에 대해 알아보는 게 아니라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자니 그것을 ‘논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원리로, 일할 때면 조르바는 일 그 자체가 되어 버립니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의 눈은 깨끗합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매 순간마다 새로 태어납니다. 세상을 언제나 처음 보는 듯 그는 감탄합니다. 돌멩이가 발부리에 채여 언덕길을 굴러갈 때도, 노새를 볼 때도, 이른 봄날 아침 들판을 가득 채운 봄꽃들을 보았을 때, 그는 감탄합니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남자를 봐도,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묻습니다.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살아야 할 때 제대로 살지 못하고, 늘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은 지금의 그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저울을 품에 넣고 다니는 이들은 늘 생명도 무게를 달며 값을 따집니다. 하지만 조르바에게 생명은 처음이자 끝입니다. 그는 조국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서 숱한 원수들을 무찔렀지만 끝내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저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중략)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절정은 마을의 젊은 과부 살해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너무나도 젊고 매력적인 과부를 짝사랑하던 어린 청년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자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맙니다. 그 죽음에 격분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살해하려고 몰려듭니다. 타락한 여자라고 단죄하지만 정작 저들은 그녀를 범하려는 마음을 품었던 데 대한 자괴감과 민망함, 그리고 자신들보다 더 매력적인 것에 대한 질투가 뒤섞인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과부는 젊고 매력적이고 임자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처참하게 살해당합니다. 그 과부를 마을 사람들로부터 지키려고 나선 사람은 조르바가 유일합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결국 숨이 끊어진 과부를 두고 통곡하다 그는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이 땅이 그런 몸을 가꾸는데 대체 몇 년의 세월을 보내왔을까요?”

그저 하나의 몸뚱이로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그 한 몸뚱이가 품고 있는 생명의 힘을 조르바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책에는 이것 말고도 멋진 구절이 가득한데 한 구절만 더 소개하고 글을 마쳐야겠습니다.

“나는 이곳으로 내 운명을 데려왔다. 운명이 나를 데려온 것이 아니다.”

자꾸만 사람들이 쪼그라들어 갑니다. 사람들이 뭔가에 잔뜩 길들여지고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게 보기 싫습니다. 남자답게 여자답게 맘껏 당당하고 속에 들어 있는 끼를 부렸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내 운명인갑다!”라며 탄식하지 말고 “내 운명을 데리고 간다”라며 호기를 부리는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자유인 조르바! 그의 인생관을 접하면서 내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누군가 붓다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자유!”라고 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스스로 불자라고 천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1283호 / 2015년 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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