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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무아-하

수많은 ‘나’가 사라지고 태어나는 변이의 과정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자아’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일정한 사고패턴이나 제한된 행동패턴을 형성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파악하기 위해 매우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적절한 대처의 방식(이를 ‘행동도식’이라고 한다)을 찾게 되면, 적은 에너지를 들여 편하게 행동하게 된다. 이런 행동도식들이 모여 ‘나’의 일정한 행동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행동패턴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매번 힘들게 다시 생각해야 하고, 항상 긴장된 주의상태에서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런 패턴에 매여 버리게 되면, 새로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그 패턴 안에 제약된다는 점이다. 삶의 가능성이 ‘나’라고 불리는 성격이나 패턴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잠정적인 것
어떤 것도 나가 아니기에
모든 나를 긍정하게 돼

‘자아’를 확고하게 유지한다는 것은 이미 형성된 뉴런들의 패턴들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걸 뜻한다. 만나던 방식으로만 사람들과 만나고, 습관화되거나 비슷한 행동만을 하며, 이미 알던 대로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어려운 일, 귀찮고 힘든 일, 새로운 일을 가능하면 피하게 된다. 이는 뇌를 비롯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갖는 유연성과 가변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덕분에 힘과 에너지 소모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쓰지 않는 힘은 그저 불어나는 살이나 완고해지는 고집 말곤 줄 데가 없어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반면 자아의 경계가 유연하고 새로운 상황에 열려 있다면, 뇌와 다른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게 된다.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뉴런망들을 만들 것이다. 에너지 소모는 많겠지만, 그렇게 사용된 에너지는 새로운 능력으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은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실패나 불화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 모든 일을 분별하고 판단한다. 거기에 안맞는 것에 대해선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세상이 모두 자기 생각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론 그리 될 리 없으니, 이들의 삶은 힘들고 피곤할 것이다. 이들 옆에 있는 이, 이들을 만나야 하는 이들도 힘들고 피곤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많은 경우 ‘권위적’이다. 자신이 아는 거나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남들이 의당 따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이와 무관하게 ‘노인’이 되기 쉽다.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이나 경험을 추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고능력을 확장하고 행동의 유연성을 늘려가려는 게 젊음의 특징이라면, 젊다는 것은 나이와 무관한 것이다. 뉴런이 연결망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새로이 생성된다 함은, 나이 많은 젊음이 있을 수 있음을 뜻한다. 반면 이미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믿고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협소한 시야에 갇힌 채 단단하게 경직되어 가는 이라면,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이미 충분히 ‘늙은’ 것이다. 50세 정도가 되어야 자아가 안정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저 유연하고 열린 젊음을 잃고 자아 안에 갇혀가는 시기가 대개 그 시기라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나에게 남에게도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남에게는 폐가 되고 나에게는 안타까운 어떤 상태를 표시할 뿐이다.

무아란 ‘본래의 자아’나 ‘불변의 자아’, 혹은 ‘참된 나’나 ‘진정한 나’ 같은 건 없음을 뜻한다. 그것은 지금의 ‘나’는 특정한 관계(연기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잠정적인 것이며, 그런 ‘나’의 동일성과 확고함에 대한 믿음이란 허구적인 것임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나’의 동일성에 대한 믿음이 허구적이라 해도 그것을 버리는 건 쉽지 않으며, 그것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도 무아를 말한다면, 그건 대체 무슨 의미에서일까?

자아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이든 단단해지는 순간 나를 가두는 벽이 된다. 무아란 그런 벽을 반복하여 깨고 지금의 ‘나’를 반복하여 넘어설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아란 지금의 내가 죽고 다른 ‘나’가 태어나는 사건이며, 그런 사건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끝없는 변이의 과정을 기꺼이 수긍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넘어서려고 선택하는 것 역시 ‘나의’ 선택인 한, 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건 나의 죽음이 아니라 확장에 불과한 거 아닌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게 다가오는 삶은 많은 경우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온다. 나의 죽음을 동반하는 나의 선택이란 ‘외부’라고 불러 마땅한 그 뜻하지 않은 것과 내가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뜻하지 않은 것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옴을 수긍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는 죽음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명명한다. 가령 시인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시가 그에게 다가가는 사건이고, 그렇게 다가간 시를 시인이 적는 것이다. 그렇게 시가 다가갈 때, 시인의 생각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비워지지 않으면, 그의 ‘자아’가 죽지 않으면, 다가갔던 시는 자아의 열기 앞에서 녹는 눈처럼 지저분한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다. 시가 쓰여진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시가 시인에게 다가갔을 때, 그의 안에 있던 ‘누군가’, 시인이 ‘나’라고 불렀을 누군가가 죽는 것이고, 그렇게 죽으며 비워진 자리에 시가 들어가는 것이고, 그의 손을 움직여 글로 쓰게 하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시는 내게 현기증 같은 것이었다. 현기증은 내 몸으로 찾아온 낯선 몸의 시간 같은 것이었다.”(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서문)

‘누군가’란 나, 너, 그를 특정할 수 없는 이이기에 ‘비인칭’ 대명사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내 안의 누군가가 죽는 것을 블랑쇼는 ‘비인칭적 죽음’이라고 부른다. 내게 다가온 것 앞에서 나를 채우고 있던 ‘누군가’(비인칭 대명사)가 죽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채우고 있던 것이기에 ‘나’라고 알고 있던 것이지만, 실은 나를 채우고 있던 ‘어떤 것’이고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죽으며 비워진 자리에서 ‘누군가’ 다른 이가 탄생한다. 비인칭적 죽음과 동시에 오는 이 탄생을 ‘비인칭적 탄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비인칭적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시인들뿐일까. 내 삶의 궤적을 크게 비트는 사랑 앞에서 그렇듯, 우리의 삶이란 모두 뜻하지 않은 것과 만나는 사건의 연속 아닌가. 다른 것은, 시인과 달리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의 ‘나’의 궤적을 고수하기 위해 그 모든 사건을 밀쳐내며 간다는 점이다. 없었으면 좋았을 ‘사고’라고 저 옆에 치워두며 간다는 점이다. 무아란 시인들처럼 내게 다가오는 어떤 사건들 앞에서 발생하는 비인칭적 죽음을 반복하여 긍정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사건의 영원한 반복임을, 기쁜 긍정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아의 죽음’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나’들의 탄생이고, 그런 ‘나’들을 거쳐가는 변이의 과정이다. 뒤집어 말하면, 그 많은 ‘나’들을 살기 위해서 나를 비우는 것이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서 수많은 ‘나’들을 사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죽지 않는 인간?에서 다음과 같이 쓸 때, 그는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 무아를 통찰한 ‘나’란 어떤 ‘나’도 ‘나’라고 부를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그 모든 ‘나’들이 ‘나’임을 수긍하는 나다. 그래서 무아는 그때마다의 무수한 ‘나’들, 무상한 ‘나’들의 긍정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도 ‘마음’이 아니기에 그 모든 마음을 긍정하는 <금강경>의 역설적 논법을 빌어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떤 ‘나’도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라고 한다.”(諸我皆爲非我, 是名爲我)

수많은 ‘나’들을 사는 것이 가능한 것은, 다시 뇌 얘기를 빌어서 하자면, ‘자아’로 응집된 패턴화된 뉴런들의 연결망만으로 우리의 뇌가 닫혀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행동들 안에 우리의 신체가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자아 형성 이전의 아기의 뇌가 천조 개라는 최대치의 시냅스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보르헤스 식으로 말해 “모든 사람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대치의 잠재성을 모든 아기들이 갖고 있음을 뜻하는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무아란 능력의 최대치를 뜻하는 잠재성을 향해 우리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그 잠재적 능력을 통해 다른 ‘나’들로 바꾸어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잠재성을 통해 최대치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갓 태어난 아이도 6식을 갖추고 있습니까?”는 학인의 물음에 조주 스님은 답한다.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

그 학인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투자스님에게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는다. 투자스님의 대답:

“한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뇌의 잠재성을 보는 것조차 여전히 뇌 안에 갇혀 사고하는 것이고, 뇌의 능력 안에서 사는 것이다. 뇌 이전의 신체는 뇌 이상의 잠재성을 갖고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아의 잠재성은 뇌가 생기기 이전, 수정란으로 거슬러 올라가 마땅하다. 그러나 수정란에 굳이 멈출 이유가 있을까? 수정란으로 현행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 수많은 수정란들로 열린 잠재성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혜능스님이 던진 유명한 물음은 무아의 문제를 거기까지 밀고 가려는 게 아니었을까? “부모도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이란 대체 무엇인가?(父母未生前 誰是本來面)”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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