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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자세히 듣다

기자명 서광 스님

목마른 자 물마시듯 말뜻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지금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를 위해 설하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으면 응당히 이와 같이 머물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지혜 증득해가는 필연적 과정
간절한 마음 있어야 변화 가능
들은 뒤 사색하는 과정 필수
무조건 따르는 방식은 역효과

‘금강경’을 독송하거나 공부할 때 어떤 자세로 듣고 보고 배워야 할까? 부처님께서는 지금 자세히 들으라고 했는데 어떻게 듣는 것이 자세히 듣는 것일까? 규봉 종밀선사가 인용한 ‘지도론’에 의하면 ‘법을 듣는 자는 단정하게 우러르는 것이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말뜻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마음으로 슬퍼하고 기뻐하며 감동하는 이를 위해서 설법을 한다’고 한다.

또 종밀 스님은 ‘십지경’을 인용해 ‘목마른 자가 냉수를 생각하듯 하고, 굶주린 자가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듯 하며, 병자가 좋은 약을 찾듯이 하고, 벌떼가 꿀에 매달리듯 하여 우리들도 또한 이와 같이 감로법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금강경’을 공부할 때는 온 마음, 온 몸으로 하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심한 갈증의 순간에 마시는 한 모금 물의 효능처럼 자기 존재의 실체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의 상태에서 듣는 가르침은 그 즉시 진실한 변화,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 ‘금강경’을 공부할 때 순간순간 떠도는 마음으로는 본질과 실상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들뜬 마음이나 알음알이의 순간에는 아무리 훌륭하고 진실한 내용도 제각각 편집되고 왜곡되기 때문에 반드시 고요한 마음 상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독송이나 사경, 법문을 하거나 들을 때는 먼저 떠도는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올바르게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시작명상(入定, opening meditation)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위에서 ‘자세히 들으라’는 부분을 각묵 스님의 산스크리트본에서는 ‘잘 들어라. 그리고 마음에 잘 새기라’로 옮기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듣고 마음에 잘 새기는 것일까? 유식심리학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4가지 번뇌가 없는 상태, 즉 자기중심적 판단비교, 자기중심적 애착, 자아에 대한 그릇된 견해, 자아에 대한 무지가 작동되지 않는 마음의 상태에서 듣고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체의 방어기제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이나 편견, 부정, 투사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자세히 들으라’를 보다 적극적인 실천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지혜를 증득해 가는 문사수(聞思修, 듣고 사유하고 실천하는)의 3단계 과정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동서고금의 양서를 통해 사유하고 사색하는 교육풍토에서 성장하지 못한 탓에 우리들은 뭔가를 보거나 듣게 되면 쉽게 행동하고 반응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기 일쑤다.

심지어 출가수행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도 사유하는 훈련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자기조건에 맞게 적용할 수 있도록 반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군대식 훈련을 받듯이 듣고 무조건 행동에 옮겨야 하는 교육 시스템이 주를 이룬다.

교육에서 사유하고 토론하는 작업이 결여되면 그 관계는 상하수직구조, 상명하달, 일방통행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어 종국에는 창의성이나 지혜를 증장시키는 일과는 무관하거나 오히려 상반된 결과를 낳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언으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스스로를 의지하고 진리를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 내면에 잠재된 불성, 선천적으로 타고난 지혜가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지금 듣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 인간관계에서 순간순간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깨달음으로 이끄는 최선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반드시 ‘지금 여기에서’ 요익중생을 위해 어떻게 쓰일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서광 스님 한국명상심리상담연구원장 seogwang1@hanmail.net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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