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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끝)

“30방망이를 치면 과연 발아래에서 대광명을 놓을까”

▲ 지공 화상은 떠난 달마대사를 다시 모시고 싶은 양무제에게 단념하라고 이른다. 두두물물이 달마임에도 이를 깨닫지 못한 양무제를 향한 가르침이었다. 사진은 김홍도의 ‘절로도해도’, 간송미술관 소장.

[참구]
<본칙>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간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착어 ← 지공 화상에게도 30방망이를 쳐야겠다. 과연 발아래에서 대광명을 놓을까?)”

양무제에 본심 밝힌 지공 화상
달마가 달마를 찾는 모순 지적
온 천지가 곧 달마임을 가르쳐
금덩어리 잘라도 조각 모두 금

“30방망이” 꺼낸 원오의 착어
어리석음 벗어나 깨닫게 하고
깨달음에 눌러앉는 집착 질타

“어설프게 흉내만 낸 선으로는
시방삼세 제불 대할 면목 없어”

한마디의 말로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지공 화상의 역량은 이 구절에서 정점에 달한다.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간다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가운데 지공 화상은 그의 본심을 드러낸다. 지공 화상은 양무제, 아니 모든 선 수행자에게 간절하게 말하고 있다. 단념하라. 미련 없이 단념하라. 달마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일시에 모시러 간다 해도,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달마에 대해 이보다 더 단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지공 화상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물은 물을 적시지 못하고, 금이 금으로 바뀔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달마가 달마를 맞이하러 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선사는 이렇게 읊었다.

“달마불래동토(達磨不來東土) 달마는 중국에 온 적이 없고, 이조불왕서천(二祖不往西天) 혜가도 인도에 간 적이 없다.”(‘전등록’ 권18)

두두물물(頭頭物物),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달마다. 인적 없는 길가에 누운 옛 비석은 무상을 일깨우는 달마요, 봄날의 동백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알려 주는 달마이며, 자존심 상하게 하는 그대의 핀잔은 겸손을 가르치는 달마다. 온 천지가 달마투성이 아닌가? 아득한 옛적부터 달마는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원오 선사는 본칙 평창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제창하고 있다.

“달마대사는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웅이산 정림사에서 장례를 치렀다. 후위(북위)의 송운(宋雲) 화상은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총령(葱嶺, 파미르고원)에서 손에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달마대사를 만났다.”

‘전등록’ 권3에 나오는 달마대사의 전기에 의하면, 송운 화상이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달마대사의 묘를 열어 보게 했다. 과연 빈 관에 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죽은 달마가 신 한 짝을 들고 걸어가다니? 이 무슨 말인가? 죽을 때는 오직 죽을 뿐, 철저히 죽을 때 생사를 초월하는 소식이 있다. 달마니 신 한 짝이니 이런 것들은 한때 주어진 이름, 즉 가명(假名)에 불과하다. 이 가명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완전히 죽을 때 새로운 진리세계가 전개된다. 이때 달마도 신도 ‘나’도 일체가 가명을 초월하여 참다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가명인 달마는 죽었다. 이제 생명은 그 본래의 무애자재한 모습을 회복한다. 달마대사가 신 한 짝을 들고 가는 것은 이 새로운 세계의 자유자재한 창조적 삶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끈질기게 집착하는 ‘나’는 죽고 죽어 그 흔적조차 없다. 달마대사의 손에 들린 신 한 짝은 그 죽은 당체(當體)를 증명해 보인 것이다.

달마대사는 입적하여 어디로 갔는가? 예, 여기 있습니다. 황금 덩어리를 자르면 조각조각 모두 황금이다. 달마대사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천지, 산천초목이 그대로 달마대사의 세계이다. 이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기는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이고 들리는 일체가 실제로 이 새로운 세계 그대로여야 한다는 점이다. 뼈를 깎는 수행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언제나 남의 이야기로만 남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래서 원오 선사는 착어에서 “지공 화상에게도 30방망이를 쳐야겠다. 과연 발아래에서 대광명을 놓을까?”라 하였다. “달마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고 절묘하게 말한 지공 화상. 있는 그대로가 달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지공 화상인데 왜 그에게 30방망이를 쳐야겠다는 것일까?

사변적(思辨的) 희론이나 논쟁으로 시종해서는 생사를 초월하는 소식을 알 수 없다. 철저히 죽어야 한다. 사량 분별이 완전히 끊기고, 끊긴 흔적조차 없을 때까지 죽어야 한다. 어설프게 죽은 ‘반생반사(半生半死)’도 안 되고, 아직도 깨달음의 냄새가 나는 ‘반청반황(半靑半黃)’도 확실히 죽어 다시는 냄새가 나지 않아야 한다.
“지공 화상에게도 30방망이를 쳐야겠다”는 착어는, 미혹한 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깨닫게 하고, 깨달음에 눌러앉은 이는 깨달음을 빼앗아 진정한 달마로 되살아나게 하려는 후학들을 향한 원오 선사의 절절한 질타이다. ‘대사일번, 대활현전(大死一番, 大活現前)’, 철저히 죽어서 완전한 모습으로 되살아나는 실천적 체험이 없으면 선(禪)은 가짜다. 목숨 걸고 뛰어들어 원오 선사의 죽비에 완전히 죽어 보라.

이때 나의 발밑에서는 살아 있는 달마가 대광명을 발한다. 누구나 갖추고 있는 태고(太古)의 대광명, 생한 적도 멸한 적도 없는 무생(無生)의 대광명이 온 천지를 뒤덮어 일체는 진리 그대로이다. 내 발밑의 살아 있는 달마를 모르고 달마를 찾아 밖으로 헤매는 어리석은 이들이여, “무승자박(無繩自縛), 묶는 것도 없는데 스스로 속박한다”는 것을 알아라.

한편 설두 선사는 “온 나라 사람이 모시러 간다고 해도 그는 돌아오지 않습니다”에 대한 자신의 경지를 송(頌)으로 이렇게 읊고 있다.

“그리워하지 마라. 청풍(淸風)이 천하 대지에 끝없이 가득하다.”

“청풍이 천하 대지에 끝없이 가득하다.” 이 게송이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청풍잡지, 유하극(淸風匝地有何極)’, 청풍이 천하 대지에 끝없이 가득하다. 걸음걸음마다 청풍이 일어 무수한 달마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

걸음걸음마다 이는 청량한 바람이나 자신의 발밑에서 발하는 대광명은 석가 출세 이전, 아니 이전도 이후도 없는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의 모습이다. 이 본래면목의 작용이 곧 ‘살아 있는 달마(活達磨)’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일상. 아, 바쁘다 바빠.

모든 생각이 다 죽은 맨눈으로 “청풍이 천하 대지에 끝없이 가득하다”를 참구하라. 남의 견해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솟구쳐 나와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는 견처(見處)를 보여 봐라.

설두 선사는 “청풍이 천하 대지에 끝없이 가득하다”고 읊은 뒤, 누군가를 찾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모두 자라가 목을 움츠리고 있는 모습만 하고 있을 뿐,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미소를 짓는 자도 없었다. 참으로 개탄을 넘어서 슬퍼할 일이다. 이에 설두 선사는 제자와 후학들을 위해 노파심에서 다시 송으로 읊었다.

“선사(설두)는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에 조사가 있느냐?’ 스스로 ‘예’ 하고 대답하며 말했다. ‘불러서 내 다리나 씻도록 해야겠다.’”

설두 선사는 대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에 달마가 있느냐?”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스스로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이, 달마를 여기에 불러 오너라. 내 다리를 씻게 해야겠다”라고. 설두 선사는 불교인들이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기는 달마를 하인 취급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을 근본부터 잘라 버렸다.

달마조차 하인으로 부리는 자는 ‘불여만법위려자(不與萬法爲侶者)’, 곧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일체로부터 초탈한 자이다. 그러나 초탈한 흔적도, 깨달음의 냄새도, 성스러운 여운도 없는 흔하고 흔한 보통사람이다. 그가 진정한 달마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 설명하려 해도 온전히 표현할 수가 없다. 스스로 진정한 달마가 되어 보는 길밖에 방법이 없다.

‘향상(向上)의 수행’이란 위로 위로 깨달음을 향해 가는 수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정점의 깨달음에 자리 잡고 눌러앉으면 그것도 집착이 된다. 여기서 뛰쳐나와 다시 복잡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른바 ‘향하(向下)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정 사람들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어 구제하는 회두토면(灰頭土面)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깨달았다는 흔적, 성자의 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제1칙의 맨 마지막을 달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달마가 불법을 안다(知)는 것은 용납하지만, 불법을 깨달았다(會)고는 용납할 수 없다.”

‘달마는 불법을 말하고 불법대로 살고 있지만 불법을 깨달았다는 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깨달았으되 깨달았다는 의식조차 없는 이에게는 시방 세계가 곧 자기의 전신(全身)이다.  온 천지가 내 몸이니 귀한 것도 싫은 것도, 피해야 할 것도 붙잡아야 할 것도 없다.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참(眞)을 행하고, 가는 곳마다 청풍을 일으키며 대광명을 발하는 대장부다.

화두 참구에 철저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흉내 내기에 그친다면 무슨 면목으로 시방삼세의 제불과 역대 조사들을 대하겠는가? ‘벽암록’을 불태운 이유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기 바란다.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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