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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익산 왕궁리탑의 연대 문제

새로운 문헌·장엄구 발견될 때마다 연대·국적 논쟁 재점화

▲ 익산 왕궁리사지 오층석탑. 국보289호. 전체적인 인상은 부여 정림사탑을 닮았지만, 옥개석 아래 층급은 미륵사탑과 닮았다.

우리나라의 불탑은 특히 석탑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 중국이 벽돌을 쌓아 만든 전탑(塼塔), 일본은 나무를 짜 맞춘 목탑을 주로 세웠다면, 우리나라는 화강암을 쌓아올린 석탑을 위주로 발전했다. 이러한 석탑도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로 크게 3분된다. 고구려계가 강원도 평창 월정사의 8각 다층석탑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백제계 양식은 익산 미륵사탑, 부여 정림사탑과 같이 목탑을 석조로 번안한 양식에 연원을 두고 있다. 신라계 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시작된 전탑을 모방한 양식계통이다.

양식상 백제계 탑으로 인식돼
1965년 해체시 발견된 장엄구
고려 양식으로 밝혀져 새 국면

시굴조사서 백제 유구 발견 후
백제 왕궁터의 고려탑으로 인식

日학자 공개한 ‘관세음응험기’
왕궁리탑 연대 추정 새 견해 제시
백제 때 소실된 제석왕사탑과
장엄구 목록 동일해 학계 주목

이번에 다룰 익산 왕궁리(王宮里)의 5층석탑이 백제계 석탑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분명히 부여 정림사탑을 많이 닮은 탑이다. 문제는 이 탑을 단지 ‘백제계’가 아니라 아예 ‘백제’ 탑으로 보려는 해석이 제기되면서 불거졌다. 이 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백제계 석탑 양식을 닮았으면서도, 왠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예를 들어 감은사 석탑이나 나원리 석탑 같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석탑과도 유사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서 백제계 석탑이 신라의 통일 이후 신라계 석탑양식과 결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언뜻 보아도 부재들의 세부 처리는 부여 정림사탑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정림사탑의 고아하고 섬세한 아름다움보다는 신라 고선사탑이나 감은사탑처럼 웅장하고 당당한 느낌을 더 강하게 풍기고 있다. 우리나라 미술사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 선생도 이를 통일 직후의 탑으로 해석하고 있다.

▲ 1965년 왕궁리사지 석탑 해체시 드러난 심초석. 그 위에 뚫린 사리공 안에 장엄구가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다 1960년에 이르러서는 점차 이 탑이 백제석탑이 아니겠느냐는 의견들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65년도에 이루어진 이 탑의 해체수리 이후 게재된 고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박사의 간략한 논고에서 이 탑을 백제석탑으로 보고자 하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수영 박사는 오히려 해체수리 당시 탑 안에서 나온 고려시대 양식의 금동불 및 사리장엄구를 근거로 탑의 연대를 고려초로 내려보는 견해를 제기하였으며, 따라서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을 기원하며 세운 탑으로 그 성격을 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이후 왕궁리탑은 백제계 석탑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초기의 석탑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왕궁리탑 주변을 시굴조사했는데, 당시 주요 쟁점은 이 지역의 이름, 즉 ‘왕궁(王宮)’에 걸맞게 이 지역이 과연 백제의 왕궁터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이 수도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학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고, 더불어 왕궁리탑의 연대 추정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백제의 기와 및 궁궐의 담(宮牆) 기초가 확인되고, 기와를 쌓아 만든 백제 특유의 기단(瓦積基壇)도 발견됨에 따라 ‘익산천도설’에 무게를 실어주게 되었다. 하지만, 백제 유구로 추정되는 강력한 자료가 발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탑만큼은 계속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로 편년되는 양상을 유지했다. 다만 백제유구가 확인된만큼 원래는 목탑이 서있다가 백제멸망기에 불탔을 것으로 추정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1953년에 일본 쿄토 쇼렌인(靑蓮院)에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문헌이 마키다 다이료(牧田諦亮) 교수에 의해 발견되고 이것이 1970년에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전량(傳亮), 장연(張演), 육호(陸昊) 등이 찬한 관음보살의 기적 관련 기사를 한데 묶어놓은 것인데, 이중에 백제의 천도와 관련한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어 익산 지역 사찰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 왕궁리사지 석탑 출토 사리함(좌)과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단지(우). 두 금속공예품 표면에 새긴 문양은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이지만, 같은 시대양식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고 있다.

특히 중요시 되는 부분은 백제의 무왕이 지모밀지(枳慕蜜地), 즉 지금의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과 639년 겨울 제석정사(帝釋精舍)가 벼락에 의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사이다. 제석정사는 왕궁리사지에서 멀지 않은 절터인데, 과거 이곳에서 ‘제석사’ 명문이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제석사지임을 확인하게 된 곳이다. 그런데 논란이 된 내용은 비록 제석사탑이 불탔지만 그 안에 있던 칠보, 수정사리병, 금동판에 새긴 금강경 등의 장엄구는 무사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언급한 이들 장엄구의 목록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품목이 왕궁리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의 내용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왕궁리탑에서도 이미 금강경판이 발견된 바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를 금판에 새긴 것으로 알았지만, 근래의 정밀한 조사결과 은판에 금도금한 것임이 밝혀져 학계를 더욱 놀라게 했다. 어찌 보면 순금제판보다 은판은 더 저렴한 것일지 몰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순금으로 보일 정도의 완벽한 도금기술이라면 오히려 금판보다 더 비싼 기술특허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관세음응험기’에서 동판이라고 했지만, 은판에 금도금했으니 동판이라고 오해했을 법한 일이다.

여하간 이를 통해 새로운 추론이 가능했다. 즉, 제석사가 불타고 이를 복구할 때 같은 자리에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왕궁리탑 자리로 옮겨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석사탑에서 구해낸 장엄구를 그대로 왕궁리탑에 넣었다는 것이다. ‘관세음응험기’에 의하면 ‘다시 절을 짓고 몇배로 공경하여 공양하였다’ 하였으니, 그야말로 왕궁리탑이 백제 무왕대에 제석사를 대신하여 세워진 탑임을 증명하는 사료가 된 셈이다.

▲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심초석. 왕궁리사지 석탑처럼 심초석에 구멍을 내어 사리공을 마련했다.

거기다 2001년 시작된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가 막바지에 이르른 2009년 드디어 심초석이 드러나고 그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다. 이때 드러난 심초석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네모난 구멍을 뚫는 방식은 이미 왕궁리탑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 바 있었고, 아울러 출토된 금속공예품의 제작기법까지 유사한 점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사리봉안기를 통해 미륵사지 석탑이 639년에 세워지기 시작했음도 확인되었다. 바로 제석사가 불에 탔던 그 해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왕궁리사지에 있던 절은 미륵사지와 거의 동시대의 절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결국 미륵사 공사가 한창이던 때에 제석사가 불탔기 때문에 640년 이후에는 미륵사와 왕궁리사지 두 군데에서 동시에 거대한 불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견해는 근원적으로 ‘관세음응험기’의 출현으로 인해 맞아떨어진 한편의 드라마 같다. 우리는 과연 이 ‘관세음응험기’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기록도 아니고, 중국의 기록이니 객관성이 결여된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중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익산천도설이 얼마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시끌벅적한 사건이었는지 두말할 나위도 없다고 해석해야할까? 정말로 제석사탑의 사리장엄구가 왕궁리탑으로 옮겨간 것이었을까?

아직 논의는 진행형이다. 비록 사리장엄구의 목록이 같고, 그 형식이 미륵사지탑 장엄구와 유사하지만, 양식적으로는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고, 이를 모방한 후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거기다 새롭게 백제도, 통일신라도, 그리고 고려도 아닌 후백제 시기의 탑일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왕궁리탑의 스펙트럼은 걷잡을 수 없이 넓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미술사 연구자들에게는 보다 분명한 과제가 주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이 논쟁의 배후에는 ‘익산천도설’에 대한 찬반양론도 첨예하게 깔려있다. 이곳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과연 미륵사, 제석사, 왕궁리사지와 같은 대규모 사찰이 세워질 필요가 있었을까? 아울러 그렇게 천도했다면 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이에 대한 한 줄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여기서 개인적 소견을 말하자면 이렇다. 멀리도 말고 지금 대한민국을 살펴보면 한때 수도 이전이 계획되면서 충남 세종시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청사가 들어섰다. 만약 후대에 고고학자들이 발굴한다면 틀림없이 천도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규모와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의 수도는 엄연히 서울이다. 어쩌면 무왕 이후 백제도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개혁을 추구했던 무왕은 천도를 계획했으나, 부여에 기반을 둔 기득세력에 의해 결국 절반만 옮기는 천도에 그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1400년전에 있었던 천도인 듯, 천도 아닌 듯 천도한 것 같은 사실에 대해 지금의 학자들이 당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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