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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분별-상

‘좋고 싫음’의 선판단이 정확한 지각을 흐리게 해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가려 선택하지 않으면 될 뿐이니라(至道無難 唯嫌揀擇).” 3조 승찬 스님이 쓴 ‘신심명’의 첫 문장이다. 조주 스님이 자주 언급하여 더 유명해진 문장인데, 100칙으로 된 ‘벽암록’에는 이 문장과 관련하여 조주 스님이 등장하는 공안이 4번이나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달마대사 얘기에 이어 제2칙으로 언급된다. 가려 선택함(揀擇)이란 선악호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도’라고 명명된 지혜는 선악호오, 미추정사(美醜正邪)를 분별하지 않는 것을 요체로 한다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의 선사들은 분별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불도의 근본이라고 가르쳤다.

실제는 달콤한 초콜릿임에도
똥 모양이었을 때는 거부감
‘더럽다’는 관념이 만든 편견
분별은 ‘마음의 문’을 닫게 해

그런데 어떻게 분별없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이 뱀인지 새끼줄인지, 바이올린 소리인지 해금 소리인지, 밥인지 똥인지 분별하지 않고서 어떻게 말하고 행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분별력이 없다’는 말은 기본적인 판단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비난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던가. 그런데 불도를 깨친 분들은 어이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라고 하는 것일까? 차안의 삶을 떠난 이상적 삶을 말하려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대상을 구별하고,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자체가 분별은 아니다. 분별은 ‘특별한’ 종류의 구별이다. 똥 모양으로 초콜릿을 만들어 놓고 먹으라고 하면 쉽게 먹을 수 있을까? 어느 심리학자는 어린애 장난 같은 이런 의문을 직접 실험해 보았다고 한다. 결과는? 너무도 리얼하게 똥처럼 생겨서 였는지 대부분의 성인들은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어린 아이들은 별다른 주저 없이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똥 모양으로 만들긴 했지만, 초콜릿임을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먹지 못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똥은 더럽고 지저분한 분비물이라는 관념이, 똥 모양의 초콜릿도 먹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게 똥인지 초콜릿인지를 구별하여 판단하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어떤 악기 소리인지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걸 모두 분별이라고 하진 않는다. 눈에 들어온 모습을 보고 ‘이건 똥이네’라고 판단할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럽다’와 ‘깨끗하다’ 같은 관념을 덧붙이며 판단한다. 귀에 들어온 소리를 듣고 ‘이건 피아노 소리네’라고 지각할 때, ‘아름답다’와 ‘추하다’라는 관념을 덧붙이며 지각한다.

이처럼 호오와 미추 같은 ‘2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구별이나 판단, 인식을 분별이라 한다. 2차적 관념이 덧붙여진 인식이란 점에서 분별은 인식(cognition)이라기보다는 재인식(recognition)이고, 호오의 판단이 덧붙여진 것이란 점에서 ‘구별’이라기보다는 ‘선별’이고 ‘선택’이다. ‘가려서 선택함’을 뜻하는 ‘간택’이라는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2차적’ 관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발생하여 덧붙여지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지각 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일어나는 관념이란 의미는 아니다. 가린 다음에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려는 힘이 가리는 구별작용에 ‘이미’ 스며들어 있어, 가림과 선택함이라는 이중의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일단 달라붙기 시작하면, 1차적 관념보다 더 빨리, 혹은 더 강하게 작용한다. 똥이 아닌데도 비슷하기만 하면 어느새 더럽다, 싫다는 간택이 앞서 달려가 똥이라고 오인하는 게 그런 경우일 것이다. 똥을 보면 보자마자 피하게 되고, 똥이란 말을 들으면 듣자마자 찡그리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관념이 강하면 초콜릿조차 똥모양으로 만들어지면 먹지 못하게 된다. 반면 그런 2차적 관념이 약하거나 일종의 ‘장난’으로 받아들인 아이들은 별 부담 없이 그걸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관념’이라고 말했지만, 생각을 동반하거나 생각을 통해 작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생각이 작동하기 이전에 작동한다. 아니, 감각이나 감정 속에 스며들어, 호오의 감정이 되어 작용한다. 의식해도 바꾸기 힘든 무의식이 되어 작용한다. 요컨대 분별이란 호오와 애증의 선판단이 함께 작동하는 판단이고, 그렇기에 호오와 애증의 감정 아래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그래서 승찬 스님은 앞서 인용한 ‘신심명’의 문장 바로 다음에 이렇게 썼던 것이다: “오직 애증을 떠난다면 사태의 실상이 통연명백하다(但莫憎愛 洞然明白).”

그런데 왜 분별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어차피 우리가 행동한다는 것은 몸에 좋은 것과 나쁜 것, 보기 좋은 것과 보기 싫은 것을 선택하는 것 아닌가?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구별하는 걸로 먹고 사는 소믈리에나 바리스타 같은 이들도 있고, 훌륭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하고 알려주는 평론가들도 있지 않은가? 아니, 동물로서 생존하기 위해선 내 눈앞의 저 놈이 내게 이로운 놈인지 해로운 놈인지를 재빨리 분별하여, 달려들 건지 도망갈 건지를 얼른 결정해야 하지 않는가?

물론이다. 사실 인간의 판단능력은 바로 저런 동물적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고, 인간의 뇌란 생각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바로 저런 판단을 내리면서 진화된 기관이다. 호오의 분별은 저런 상황에서 발달한 동물적 본능에 속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것은, 2차적인 관념임에도 일단 달라붙으면, 생각 이전에 일어나고, 감각보다 앞서 감지하며, 이성보다 강하게 작동한다. 그렇기에 ‘도를 깨치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선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감정은 너무 단순해서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을 막아버리고, 분별은 너무 빨라서 생각하기 전에 판단한다는 것이다. 고수나 산초 같은 향신료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 냄새가 나는 것만으로 일단 찡그린다. 그게 들어간 저 국물이 무슨 맛인지 먹어보려 하지 않으며, 그것을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싫다는 감정이 맛도 보기 전에 밀쳐내게 한다.

분별간택이란 그게 일어난 순간 실은 이미 선택까지 ‘마친’ 셈이어서, 이미 선택할 것인지 말 건지 생각할 여지를 별로 남겨두지 않는다. 그 선택이 생각의 암묵적 전제가 되어 생각의 방향을 이미 결정한다. 그렇게 분별은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면 생각 없이 받아들이거나 정당화하려 한다. 싫어하는 것이면 생각하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생각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입증하려 한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난 이해할 수 없어!” 알다시피 이는 어떻게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묻는 말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1961년 이탈리아 작가 피에로 만초니는 자신의 똥으로 90개의 통조림을 만들어 ‘예술가의 똥’이란 레이블을 붙여 전시했고 그것을 같은 무게의 금값을 받고 팔았다. 30g의 똥을 담은 그 통조림 중 하나를 런던 테이트갤러리는 2002년 3만8000달러에 샀다. 똥에 대한 호오미추의 분별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똥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파는 작가나 그걸 돈주고 사는 갤러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만초니는 바로 이 분별심을 겨냥하여 똥을 통조림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똥이 미를 다루는 예술이 되고, 똥이 금보다 수만 배 비싸게 사고 팔리는 이런 사태 앞에서 똥은 더럽고 지저분한 것이라는 호오의 마음을 그대로 견지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예술과 똥을 가르는 분별심이 사라질 때, 예술에 대해서도 똥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부처가 뭐냐는 물음에 대해 “뒷간 똥막대기다”라고 답했던 운문스님의 잘 알려진 말도 그럴 것이다. 부처와 똥막대기를 가르는 분별을 넘어설 때, 우리는 비로소 부처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분별심이 사라진다면 갑자기 나를 놀라게 하며 끼어든 저 앞의 자동차에 대해서조차, ‘뭔가 바쁜 일이 있겠지’, ‘내 자동차를 보지 못했나 보지’, 혹은 ‘뭔가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진경 교수 solaris0@daum.net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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