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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전 속의 재가불자 수행

기자명 이제열

초기경전에 재가 아라한 다수…대승에선 수행이 불자 기본

▲ 재가불자들의 수행은 초기·대승불교를 막론하고 불교사 속에서 매우 당연하게 간주돼 왔고 활발히 전개돼 왔다. 사진은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재가불자들. 법보신문 자료사진

불교가 위대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단 불교교리가 안고 있는 탁월성 때문만은 아니다. 불교의 교조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인격과 삶이 세상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부처님의 일생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앞에 스스로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다.

재가불자는 승가 외호자 아닌
승가 유지토록 하는 존립 기반

산타티 재상 등 아라한 증득
탁월한 여성수행자들도 등장

수행은 삶을 변화시키는 행위
불교가 진리임을 알리는 요체

수행이 모든 불자로 확산돼야
세상과 불교 모두 발전할 것

세상의 참다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왕위까지 버리고 출가했다는 점, 난행과 고행의 길을 걸었다는 점, 최상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는 점, 일생을 오로지 중생을 위해 전법과 교화에 바쳤다는 점, 마음에 어떠한 악도 없고 번뇌도 없으며 청정하여 모든 존재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 죽음을 이긴 대열반의 모습으로 몸을 버렸다는 점 등 부처님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갖출 수 없는 인격과 삶의 모습을 보이셨다.

경전의 내용대로라면 부처님은 일체의 오류가 없는 존재이고 부족함이 없는 존재이다. 게다가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전승되도록 교단도 만들었다. 만약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만 설하고 교단을 세우지 않았다면 불교는 큰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귀의한 사람들의 수효도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세계로 뻗어 나아가고 오늘날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부처님이 교단을 세웠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불교에서 교단은 중요한 존재이다. 수행자 개개인이 뿔뿔이 흩어져 제멋대로 살아가는 곳이 아닌 정해진 계율과 질서 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수행하는 곳,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보호하며 실천하는 곳이 바로 교단이다.

알다시피 불교의 교단은 승가(僧伽)라는 말로 부르고 줄여서 승(僧)이라 한다. 승가는 상가(sangha)의 음역으로 개인으로서의 스님이 아닌 스님들이 모인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출가자는 비구와 비구니이고, 이 출가자들이 청정한 계율에 입각해 모인 단체를 승이라 하는 것이다. 더러 승가에 우바새와 우바이인 재가불자도 포함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으나 엄격히 말해 재가불자는 승가의 일원이라고 단정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재가불자가 승가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위치가 승가의 아래에 있다거나 권한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재가불자는 자신의 공덕을 위해 자발적으로 승가에 귀의하고 공양 올리는 것으로 명령을 듣거나 예속되지 않는다. 혹자들 가운데에는 재가불자를 ‘승가의 외호자’로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재가자들이 출가자에게 보시를 하고 불교를 외부세력으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승가의 외호자’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가불자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피상적 견해로 찬동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재가불자가 불교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승가의 존립은 위태로워진다. 승가는 부처님과 출가 비구들에 의해 시작됐지만 후에 재가불자들의 믿음의 힘에 의해 유지·발전되어 왔다. 부처님이 아무리 훌륭한 분이었다 해도 만약 수닷타 장자나 빔비사라왕 같은 재가불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승가의 형태는 빈약하기 그지없었을 것이고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무덤이나 동굴, 나무 밑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유랑 승가는 재가불자들에 의해 정착되고 체계화되고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수행과 설법도 의식주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승가가 재가불자들의 역할에 의해 유지되고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기에 재가불자들은 승가의 외호자가 아니다. 오히려 재가불자들은 승가 존립의 기반자라 할 수 있다. 이는 불교 안에서 재가불자의 위상을 정립하는데 있어 참조해야 할 내용이다. 부처님 당시 재가불자의 활동을 살펴보면 대략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부처님과 승가를 향한 보시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해탈을 위한 수행활동이다. 재가불자라 해서 부처님과 승단에 보시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재가불자들 역시 수행에 무관심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위대성은 재가불자들을 대함에 있어 재가불자들의 역할을 승단 쪽만 향하게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도 똑같이 자신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것을 요구하였고 출가수행자들처럼 세속에서 수행할 것을 권하였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꿰뚫어보아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알고, 무엇이 괴로움을 초래하는가를 알아야하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알아야하고,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서 실천하는 것이 우바새가 지혜를 갖추는 것이다. 비록 처자 권속을 거느리고 세속에 살면서 재물을 얻기 위해 갖가지 사업에 힘쓰더라도, 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삿되지 않고 바르게 집중하여 비추어보는 힘을 갖추기만 한다면 능히 삼매(三昧)를 얻을 수 있나니,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하루 속히 열반(涅槃)의 고요함을 증득할 수 있다.” ‘잡아함경’

부처님의 이같은 가르침은 재가불자들의 수행에 큰 결실을 가져오게 하였다. 수많은 재가불자들도 출가수행자들 못지않게 수행을 하여 도과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대표적인 재가수행자로 칫타장자, 하타카거사, 카치아라바가 거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칫타장자는 바이샬리 출신의 대상인으로 부호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에 힘써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부처님의 출가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덕망이 출중한 장로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설법과 논리가 매우 뛰어나 부처님으로부터 ‘재가법사제일’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후에 칫타장자는 암마라원이라는 절을 짓고 종신토록 수행하다 입적에 들었다. 필자는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유마거사가 이 칫타장자를 모델로 해서 나온 것으로 추측한다.

또 이들 외에 재가수행자 중에 사왓티성의 산타티라는 재상을 떠올릴 수 있다. 산타티 재상에게는 오래 전부터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기생은 춤을 추다가 위장에 충격을 받아 죽게 된다. 이에 산타티 장관은 큰 번민에 휩싸이게 되고 부처님을 찾아간다. 부처님을 찾아간 그는 부처님으로부터 인과의 설법을 듣게 되고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게 된다. 곧 그는 아라한의 지위에 들었으며 결가부좌한 채 공중에서 입적에 든다. 이 모습을 본 비구들이 부처님께 “저 산타티 재상을 무엇이라 불러야 합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은 “그는 위대한 속인이며 수행자이고 비구스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답하였다. 부처님은 재가불자에게도 스님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부처님 당시에 대표적 재가 여성 수행자로는 쿠줏다라, 벨루칸타키야, 수피야, 비수선, 우타나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삼매를 닦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여성 재가수행자들이다. 이 중에 쿠줏다라는 법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 났던 여성이었고, 벨루칸타키야는 수많은 장로비구로부터 찬사를 받을 만큼 지혜로웠던 여성이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수행을 하다가 도과를 성취한 여성도 있다. 바로 기원정사를 지어 바친 수닷타장자의 막내딸 수마나이다. 그녀는 정신적 충격으로 중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오온을 관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다가 사다함의 경지를 오른 상태에서 몸을 버린다.

‘앙굿다라니까야’에서는 21인의 재가 아라한이 소개되고 있으며, 기타 경전들에는 구체적인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수많은 재가자들이 도과를 성취했다고 전한다. 대개 부처님 십대제자하면 사라풋타나 목건련 등 비구 십대제자를 연상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십대제자는 비구들에게만 한정했던 것은 아니다. 십대제자는 비구니 십대제자도 있었고, 우바새 십대제자도 있었으며, 우바이 십대제자도 있었다. 초기경전과 달리 대승경전은 아예 수행을 불자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대승에서는 출가수행자와 재가불자를 구분하여 쓰지 않는다. 출가자에게 중심을 두고 설해진 초기불교와는 달리 대승의 설법은 발심을 한 모든 사람을 향해 설해진다. 수행은 발심여부에 달려있지 출가와 재가에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대승 수행의 극치를 설하고 있는 ‘화엄경’에서 많은 구도자들의 모습이 재가불자의 신분을 띠고 있는 것과 ‘유마경’ ‘승만경’처럼 재가불자의 이름을 따 설법을 진행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초기·대승을 막론하고 불교 속에서의 재가불자들의 수행은 매우 당연하게 간주돼 왔고 활발하게 진행 되어왔다.

어떤 종교이건 그 종교의 힘은 체험에서 나온다. 체험이 없는 종교는 죽은 종교이다. 이는 불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 속에서 진리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불교는 더 이상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오늘날 불교의 교세가 약한 이유도 체험과 관련이 있다. 법의 체험자가 불교 속에서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게 되고 구도심의 퇴보를 가져 온 것이다.

▲ 이제열 법사
1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불교지만 과연 재가자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과 수행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빈약하기 그지없다. 수행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행위이며 불교가 진리임을 세상에 알려주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가불자들의 수행은 매우 중요하다. 척박한 불교 현실 속에서 미래불교에 희망이 있다면 재가불자들의 수행활동에 걸 수 있다. 수행은 출가라는 공식을 깨고 수행을 일반화시키는 쪽으로 가야만이 세상도 불교도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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