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법문을 들으라
이해할 수 없는 법문을 들으라
  • 법상 스님
  • 승인 2015.06.2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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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는 불교대학도 다니고, 교리공부도 하고, 법문도 듣고 하면서 불교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스승은 온갖 방편으로 제자를 잘 이해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불교공부를 아무리 많이 하고, 교리를 잘 이해하고 전한다고 할지라도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좌절을 겪는다.

불법을 ‘이해’하려 하지만
그것은 접근 불가한 방법
꽉 막히는 순간이야말로
공부하기가 가장 좋은 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아주 단순한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처음 불교를 공부할 때 ‘아!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하는 기쁨도 알게 되고, 환희심도 느낀다. 교리를 배우고, 경전을 이해하면서 점점 더 진리를 알아간다는 기쁨은 더해만 간다. 그러나 바로 이 단계에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불법을 ‘이해’해 왔던 것이다. 불법을 머리로 이해하고, 알음알이로 헤아려 왔던 것이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식(識)’으로 헤아려서 불법을 이해한 것이다. 식이란 알음알이, 분별심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상을 아는 마음이다. 즉 불법을 대상으로 세워 놓고 식이 불법을 알려고 해 왔던 것이다. 아무리 불법을 잘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의 대상으로서의 불법을 이해한 것일 뿐 불법 그 자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 법은 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알거나 헤아려 이해되는 대상이 아니라 다만 그저 체험되고, 계합되고, 확인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 말 또한 방편일 뿐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하는 내가 있고, 이해되는 대상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불법은 이렇게 나누어지거나 쪼개어지는 것이 아니다. 육조혜능 스님은 이를 ‘불법은 불이법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불법을 이해하려고 해 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왔던 방식이 바로 이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법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우리가 무언가를 배워왔던 그런 방식으로는 접근 불가한 어떤 것이다.

그러니 각오를 해야 한다. 불법을 참으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불법을 이해하려고 하는 그런 방식을 과감히 깨뜨려야 하는 것이다. 불법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불법을 공부하면서 ‘이제 좀 알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불교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를 여법하게 설하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도저히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된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선사스님들의 법문이 일반인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유다.

물론 스님들은 방편으로 이해하기 쉬운 법을 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우리들 또한 불법을 이해하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르는 법문’ ‘선의 법문’을 만나게 되더라도 좌절하거나, 이런 법문은 난 이해못한다거나 라는 등의 이유로 그 귀한 진짜 공부의 인연을 가로막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참된 공부는 법문을 듣고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법문을 아무리 들어도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야 한다. 즉, 식이라는 분별심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꽉 막힌다고 한다.

제자가 묻고 스승은 답한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바람이 분다.” “차나 한 잔 해라.”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이렇게 답변을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건 뭐지?’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생각을 따라가고, 말의 뜻을 헤아리려는 습성이 튀어나와 저 말뜻을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법을 들으면 그저 꽉 막히면 된다. 그저 ‘모를 뿐’이다. 진리는 알아야겠는데 알아듣지는 못하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생각도 해서는 안 되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전혀 솜씨를 부릴 수 없게 되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저 답답할 뿐이다. 바로 이때가 공부하기 좋은 때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공부는 이해가 잘 되면 방편의 세속제의 길을 가는 것이고, 이해가 안 되고 모르겠으면 본질의 제일의제로 도약하기 위한 것임을 알면 된다. 둘 다 좋지만, 결국에는 후자의 길을 가야만 한다. 모르는 법문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해할 수 없는 법문을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 들으라.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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