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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기자명 이미령

갑작스레 닥친 불행과 재난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

'페스트'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책세상
1940년대 중반의 어느 해 4월16일 아침, 프랑스의 오랑시에 살고 있는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진찰실 밖에서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이렇게 한 마리 죽은 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미 대재앙은 시작되었지요.

‘페스트’로 대재앙 닥친 오랑시
하루 아침에 죽음의 도시로 전락

자신의 일 묵묵히 수행하는 의사
탈출 시도·병에 저항하는 기자
저마다 다른 심리 생생하게 묘사

자유 빼앗긴 채 폐쇄된 도시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현실
메르스 직면한 우리사회와 같아

불행한 사람에 대한 몰이해 우려
누구도 재난에서 자유롭지 않아

도심 곳곳에 죽은 쥐들이 속속 나타나면서 고열을 앓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고, 사망자들이 속출합니다. 의사들과 시 당국은 ‘설마 설마…’하며 마음을 졸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들은 끔찍한 페스트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공표하려니 그 뒷감당을 해낼 자신이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쥐떼들의 몰살과 사람들의 사망이 잇따르자 결국 오랑시는 다음과 같은 전보 공문을 받습니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하루아침에 죽음의 도시가 되어버린 오랑시. 사람들은, 아니 도시 전체가 이제 전염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도시 밖으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통제가 되자 사람들은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끔찍한 증세를 보이며 사람들이 쓰러져 나가니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페스트라는 범인이 딱히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황망합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통행에 제약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도시 밖으로 나갈 수도, 도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게 되었으니 억울합니다.

자유를 빼앗긴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죽음의 도시에 갇혔으니 이후 멀쩡한 자신들이 병에 걸려 죽든지 말든지, 그건 그대들의 몫이라는 뜻도 됩니다.

대체 이건 누구의 잘못인가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이들은 끔찍한 상황에 내던져진 것일까요? 사람들은 “아, 차라리 지진이라면! 한번 와르르 흔들리고 나면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전염병은 막강하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오랑시 사람들에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페스트로 인해 도시가 폐쇄되자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이 현실을 누구의 탓이라 몰아붙이지 않고 받아들이고서 담담히 자신의 일을 그 자리에서 해나가는 의사 리외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현실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으니, 누군가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그런 태도가 영웅주의라고는 생각하지 않나요?”

하지만 이에 대한 의사 리외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이건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이 성실성이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느냐는, 환자 진료에 지친 의사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인물도 있습니다. 잠깐 취재차 들렀다가 그만 페스트에 감염된 오랑시에 갇혀 버린 기자 랑베르입니다. 그는 이런 재난 상황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이 낯선 도시의 상황은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랑베르 기자는 쉬지 않고 이 도시를 빠져나가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남아서 사람들과 힘을 합쳐 페스트에 저항합니다.

도시가 폐쇄되어 일상의 필수품들이 서서히 동나기 시작하자 암거래가 활기를 띱니다. 코타르처럼 이때 한몫 잡자는 사람들도 나오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또 어찌되었거나 원치 않은 이 상태가 공동의 환경으로 주어졌으니 함께 난관을 타개해야 한다는, 타루나 그랑과 같은 매우 적극적인 대처형의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 개인의 불행이기 때문에 모두가 자기만의 문을 열고 나와서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반면 전염병을 신의 분노와 징벌이라고 보고 이런 재앙도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나름대로 유익한 점이 있다고 여기는 파늘루 신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신부는 외칩니다. 인간이 사악해지고 타락했으니 이런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고요. 신부는 설교시간에 이 불행한 사태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을 더욱 깊게 심어주면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이처럼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상태-카뮈는 이런 상태를 ‘페스트’라고 하는 기막힌 설정으로 그려내면서 이 상황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내가 전율하는 부분은,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극복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불행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딱 저마다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는데, 이때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불행이라는 ‘현실’을 ‘추상’적으로 대하려는 생각이라고 카뮈는 지적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어떤 의미를 자꾸만 덧붙이고 모호한 관념으로 대할 때 인간은 그런 불행을 제대로 대처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불행이 다시 반복될 때 또 다시 절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서 이 부분은 파늘루 신부가 어린 아이의 죽음을 마주할 때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페스트에 걸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이 어린 생명을 구원해 달라고, 그래도 신은 사랑이시라며 기도하는 신부를 향해 의사는 말합니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구원’이라는 사탕발림을 거부하며, 지금은 죽음과 불행을 직시하고 그것들과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이 의사의 생각입니다. 이런 어린 양들의 저항에 신부는(혹은 종교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실존을 온갖 메타포와 이론으로 치장하고서 저 멀리 있는 구원만을 들먹이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전생을 들먹이는 종교인들로서는 이런 ‘어린 양’들의 저항, ‘죄 많은 범부중생’의 반발에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의사는 자신의 이 과격한 발언까지도 사과합니다. 그런 종교적 자세 또한 불행한 현실에 대처하고 싸우려는 하나의 방식일 테니까요. 이렇게 한계에 봉착한 인간은 저마다의 지혜를 짜내서 힘을 합해야 한다고 카뮈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지금 현실이 딱 그렇습니다. 온통 뒤틀리고 꽉 막힌 난제(難題)로 가득합니다. 혹시 이런 세상을 향해, 인간의 마음으로 이 세계가 펼쳐지며,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호령하실 텐가요?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이 세계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한둘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외경계 대상들과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그물코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인노릇 제대로 하라고들 말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나 하나만 중심을 잘 잡으면 세상 모든 일이 잘 돌아간다고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독불장군식의 생존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관계를 잘 유지해나가야만 나도 살 수 있고, 나 하나가 함부로 살다간 역시 누군가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관계 속의 생존입니다.

이런 관계속의 생명체가 바로 ‘나’인데, 촘촘한 그물망 어딘가에서 탈이 납니다. 때로는 자연재해로, 때로는 전염병으로 다가오는 그 탈은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데, 저마다의 안위를 위협당할 때 우리는 관계를 잊어버리고 쪼개집니다. 이 불행은 내 탓이 아니요, 나 혼자만 살 궁리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불행이라는 현실은 추상이 되어 버립니다. 두려움과 소외감이라는, 막강한 추상의 힘으로 다가옵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

카뮈의 <페스트>는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을 때, 그리고 자기 책임도 아닌 일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려들 때 사람들의 혼돈과 방황과 항변과 저마다의 극복의지를 세밀하게 담고 있습니다. 특히 전염병으로 폐쇄된 도시 안에서 매일 죽음의 공포와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극복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모습들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몇 달이 지나 오랑시의 페스트는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닫혔던 도시의 문도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고, 재회의 기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 순간부터 자신들이 어떤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는지를 죄 까먹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그 지독한 불행을 겪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행을 생생하게 목격한 의사 리외는, 시내에서 터져 나오는 환희의 함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생각합니다. “이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말이지요. 그는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크고 작은 공동체와 가족들이 ‘격리’와 ‘폐쇄’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갇히게 된 것은 저들이 죄를 지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안전지대 안팎의 모두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중이지요. 그런데 저들을 향해 ‘죄인’이라거나 따돌리려는 기미가 보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분명 메르스는 멈출 것이고 우리는 예전의 평온을 되찾겠지요. 그러나 속수무책과 무방비와 은폐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바로 동시대의 불행을 더 심하게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오해하고 왜곡할 때 인간은 그런 재난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재난이 반복될 때 또 다시 절규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런 사태에서 자유롭지도 무관하지도 않다는 카뮈의 작품은 바로 이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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