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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공-하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어떤 소리도 될 수 있는 잠재성이기에 어떤 소리도 아닌 ‘소리 자체’와, 우리의 귀를 끊임없이 울리며 오는 모든 소리들 전체, 여기서 진제와 속제의 둘 아닌 세계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여기에 하나의 체(體)와 수많은 상(相)들을, 그 상들의 다종다양한 용(用)을 대응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개념에 익숙한 이라면 실체의 한 속성과 수없이 많은 양태들의 세계를 재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든
무엇으로 규정되는 순간
본체 아닌 일부만 드러나
잠재된 가능성까지 볼 때
하나의 본체 이해하게 돼

그런데 공성이 모든 것의 체를 이룬다고 한다면, 어떤 하나의 사물이나 한 사람에 대해서도 공성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소리들의 체를 이루는 공성을 보는 것이야 진동의 주파수로서 소리 자체의 잠재성을 보는 것이라 해도, 어떤 한 사람이나 하나의 사물에서 공성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사람이든 이런 저런 규정을 갖고 있으며, 교체되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하는 수많은 규정성들 속에서 산다. ‘프란츠 파농’이란 이름을 갖는 어떤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는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이다. 즉 그런 규정을 갖는다. 그리고 한 때 식민모국이었던 프랑스에서 지원병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의과대학에 유학을 해 의사가 되었다. 정신의학을 공부했고 알제리에서 임상을 하며, 알제리 해방운동에 관여했다. 이 모두가 그 사람에 대한 규정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 찾아보는 프로필, 혹은 그가 거쳐간 삶의 연대기는 그런 규정들의 집합이다. 그런 규정들을 모두 안다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만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나 파농은 어느 기차 칸에서 “어머, 흑인이야!”라는, 한 소녀가 조그맣게 흘린 감탄사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된 얘기를 쓴 적이 있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 그때 ‘흑인’이라는 규정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규정 속에서 그는 단지 한 사람의 흑인, 그것도 백인들이 부여한, 결코 편하지 않은 위치나 의미들에 포위된 흑인으로만 파악될 뿐이다. 그는 ‘흑인’이란 규정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참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그런 규정 앞에서 그는 상처받고 절망한다. ‘흑인’이란 그 규정을 벗어날 수 없는 한, 그것에 의해 가려진 자신의 존재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임을 절감한다. 그저 한 사람의 흑인일 뿐이다. 흑인이라는 규정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기보단 알 수 없게 해주는 요인인 것이다. 흑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면 크게 달라질까? 부호만 바뀐 어떤 하나의 대상에 머문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가 흑인이란 규정 대신 의사라는 잘난 규정을 들이밀고 싶었던 것을 아닐 게다. 의사라는 규정은 ‘흑인’이란 말에 절망하면서 흑인들의 정신세계에 다가가고자 했던 젊은 날의 그에 대해 별로 알려주는 것이 없다. 의사라는 잘 나가는 직업, 좋은 입학성적으로 추론되는 브라이트한 지능, 혹은 돈을 벌어 출세할 가능성이나 지적 재능 같은 것을 짐작하는 것으로 그의 정신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흑인’이란 규정만큼이나 그 사람의 ‘본체’에 다가갈 수 없으며, 다가가는 걸 저해하는 규정일 뿐이다.

정신의학자나 알제리해방운동의 전사 같은 규정 또한 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규정도 파농이란 사람의 ‘본체’를 드러내주지 않는다.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가린다. 그 규정들을 모두 합하면 그의 ‘본체’를 볼 수 있을까? 그것이 우왕좌왕하며 구불구불 나아가야 했던 행적에 대해 알려주는 한, 그렇게 남다른 궤적을 그려야 했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한 조금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가면서도 아주 다른 생각을 하고 아주 다른 방식으로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길의 끝에서 실패라고 절망하는 이도 있지만, 그 실패에도 다시 시작하려는 이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것은 파농이란 사람의 겉에 드러난 일부분만을 드러내줄 것이다. 그가 쓴 책을 본다면, 우리는 그의 사유, 그의 존재에 좀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규정성에 가린 채 그가 생각하고 살아간 방식을 보여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말년에 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란 책에 대해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장-폴 사르트르가 호의를 갖고 써준 서문을 보고, 그가 자신을 크게 오해했다고 안타까워해야 했다.

물론 파농이란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규정성들이나 그가 쓴 책과 다른 어떤 숨은 본질을 끝내 감추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규정들이란 그의 일부를 드러내고 표현한다. 흑인이고 의사고 해방운동의 전사고 하는 것 모두 그의 일부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이며, 그 일부를 규정성을 표시하는 말로 ‘평균화’해버리기에, 드러내는 것만큼 가리는 것이다. 그때 가려지는 것은 그런 규정성의 어둠 속에 있는, 드러나지 않았고 충분히 표현되지 못한 그의 잠재성일 것이다. 그 규정들과 소통하지만, 하나의 규정이 드러나는 순간 그 규정의 뒤로 밀려나며 숨겨지는 잠재성.

파농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그가 얻었던 수많은 규정성을 살았고 또한 살아야 했던 사람이며, 그와 다른 많은 규정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많은 규정성을 갖고 있었으면서, 그 규정성들 뒤로 물러나 있는 무규정적 잠재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모든 규정들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규정불가능성,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잠재성, 그것이 파농이란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의 본체가 갖는 공성을 본다 함은 이런 것 아닐까? 그 모든 규정성을 통해 존재하지만, 어떤 규정성으로도 포착될 수 없는 규정불가능한 잠재성을 보는 것.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한 복제인간이라는 이중의 규정에 갇혀 경찰에 쫓기는 이들을 따라가며 펼쳐진다. 유전자복제로 눈을 만드는 노인은 자신을 찾아온 로이를 알아보고 “네 눈은 내가 만들었어”라고 말하지만, 그에 대해 로이가 응수한다. “영감, 내가 이 눈으로 무얼 봤는지 알아?” 그의 이 한 마디는, 그 노인이, 그를 쫓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경찰이 “상상도 못할”, 그들의 모든 규정을 벗어난 어떤 체험들을, 그것을 거치며 형성된 거대한 잠재성을 암시한다. 그것은 로이 자신의 입으로도 ‘말할 수 없는 것’일 게다. 말해도 알 수 없는 것일 게다. 책까지 써서 말했지만 사실은 말할 수 없었던 파농의 그것처럼.

하나의 동물이나 사물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고기’라는 운명적 규정에 갇혀 움직일 수도 없는 축사에서 그저 사료를 먹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소나 돼지라면, ‘고기’라는 규정만큼 자신의 ‘본체’를 가리는 게 없을 거라며 치를 떨 것이다. 땅을 가는 일을 하며 농부의 ‘친구’라는 규정을 얻는다고 해도, 그 규정이 소의 본체를 드러내줄 거라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는 인간에게 고기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존재로서 그의 ‘본체’는 그런 규정 뒤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잠재성 없이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의 경우에는 더욱더 난감하다. 동물들처럼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에 인간이 부여한 용도나 목적성이, 그런 규정성이 본질이요 본체라는 환상이 깨기 어렵게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 용도(규정)가 다하면 존재할 이유를 잃고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들로선 그 규정성이 다하지 않도록 악착같이 매달려야만 할 것 같다. 버려진 주전자와 시계, 그 옆의 행주치마….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는 그것들의 잠재성, 그것 또한 버려지기 전이나 후나, 규정성을 유지하거나 잃거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용도적 규정성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 규정성 뒤에 숨어서.

공성을 본다는 것은 용도의 규정 속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규정으론 포착할 수 없는 잠재성을 보는 것이다. 시인들이 그러하듯이, 쓸모없음을, 거기 숨은 많은 잠재성을, 그 검은 땅 속에서 새로 피어나는 다른 존재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자비로운 기계/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아무도 펼치지 않는/양피지 책…”(진은영, ‘쓸모없는 이야기’)

이처럼 용도의 규정 바깥에 있는 ‘쓸모없음’을 보고 그것을 통해 사물들에 부과된 운명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의 가능성을 여는 것을 블랑쇼는 ‘사물의 구원’이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사물의 공성을 보는 것, 그것은 사물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의 규정성에서 벗어나 소나 돼지의 잠재성을 보는 것이, 그에게 하나의 구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말은 더욱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이란 규정에서 벗어나 어떤 한 사람의 잠재성을 보는 것이, 흑인이란 규정성을 피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작은 구원이 될 수 있음 또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진실은, 그럼으로써 진정 구원받는 것은 그런 ‘구원’의 행위를 통해 사물이나 사람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구원하는 자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기이한 ‘구원’의 시도를 통해 닫힌 듯 보이는 삶의 어떤 출구를 찾게 될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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