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일제강점기 사찰림 벌채
12. 일제강점기 사찰림 벌채
  • 전영우 교수
  • 승인 2015.07.07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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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숲 벌채와 매매 모두 총독부 허가로 규제

▲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의 사찰 중 벌채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장성 백양사의 숲.

조선총독부는 조선 병탄과 함께 사찰령(1911년)을 통해서 사찰의 재산을 관청의 소유물처럼 통제하였다. 사찰의 산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병탄 이전까지 개개 사찰이 필요에 따라 시행해오던 임목의 벌채 행위는 금지되었고, 임야의 매매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임목의 벌채와 임지의 처분은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사찰림에 대한 이러한 허가 절차는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하였다.

총독부 사유림 벌채원에
벌채상황 기록으로 남아

21년 동안 645건 허가
지역별 경남 가장 많아

일제의 불교계 통제정책
사찰의 재정불안 이어져

불사·분담금 때문에 벌채
피폐한 재정에 금고 역할


역설적이게도, 일제강점기 개개 사찰의 산림운영 실태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덕분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 전역의 사찰은 소유 산림을 이용하고자 조선총독부에 벌채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사유림(寺有林) 벌채(허가)원’을 발급하였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은 조선총독부의 사찰림 벌채 서류를 온라인으로 공개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에서 공개하고 있는 디지털 자료에는 개개 사찰이 총 21개년(1915년, 1918년, 1922년, 1926년~1943년) 동안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벌채 신청서와 함께 벌채허가서가 수록되어 있다. 연도별 사찰림 벌채 허가 건수는 1건에서 77건으로 제각각이며, 허가 서류의 분량도 수천 쪽으로 방대하다.

 
방대한 내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뒤로 미루고, 먼저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연도별 조선총독부의 ‘사유림(寺有林)벌채허가원’ 건수부터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243개 사찰에서 21개년 동안 총 645건의 ‘벌채(연기 또는 수정 포함)허가원’이 발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찰의 숫자가 1300여 개소 내외(조선총독부 1916년도 연감: 1412개소, 1923년도 연감 1198개소)임을 고려하면, 전국 사찰의 약 5분의 1이 소유 산림을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벌채하였던 셈이다.

연도별 벌채허가 건수는 1915년 표충사를 필두로, 1918년 도갑사, 김용사, 갑사의 3건, 1922년 19건, 1926년 24건, 1927년 20건, 1929년 23건, 1930년 27건, 1931년 26건, 1932년 23건, 1933년 23건까지는 대체로 20건 내외였고, 벌채허가가 한 건도 없는 해(1916, 1917, 1919, 1920, 1921, 1923, 1924, 1925, 1928)도 다수 있었다. 사찰림의 벌채허가 건수는 1934년(39건)부터 증가하여 1935년(38건), 1936년(35건), 1937년(49건), 1938년(28건), 1939년(42건)까지 점차 늘어났고, 특히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에는 77건으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태평양전쟁 기간인 1941년 44건, 1942년 62건, 1943년 41건으로 집계되었다.

도별 벌채허가원을 집계한 결과, 경남(147건)의 허가 건수가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경북(104건), 전남(78건), 강원(74건), 경기(61건) 등의 순이었고, 가장 적은 지역은 함북(1), 평남(4), 황해(9), 전북(10회)이었고, 그 밖의 도는 30~40여 건의 벌채허가원이 집계되었다. 경남의 사찰들에서 벌채가 가장 빈번했던 이유는 넓은 면적의 울창한 사찰림 주변에 벌채목을 운송할 수 있는 도로 사정이 비교적 좋았기 때문이고, 함북이나 평남의 사찰들에서 벌채 허가 건수가 소수였던 이유는 사찰의 숫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도로 사정도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찰별로 벌채허가를 가장 많이 신청한 사찰은 통도사, 표충사, 백양사와 평북 보현사(11건)였고, 용문사(남해), 법주사는 10건씩 신청했다. 경기의 현등사(9건), 범어사와 옥천사(8건), 월정사, 유점사, 수종사, 영각사, 내원암, 대흥사, 화엄사, 함남의 석왕사와 개심사(7건), 동화사, 운문사, 직지사, 태인사, 용흥사, 각연사(6건), 김용사, 무량사(5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찰은 어떤 목적으로 산림을 벌채했을까? 1915년 표충사의 벌채허가원에는 사찰에서 쓸 땔감용 소나무 250본, 잡목 340본의 벌목 허가를 구하고 있다. 뒤를 이어 1918년의 도갑사, 김용사, 갑사의 허가원에도 유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도갑사는 대웅전과 해탈문 수선비용을 충당하고자 5정보의 곰솔(수령 20~30년생, 흉고직경 9~24cm) 7500본을 벌채 매각하여 300원을 확보할 계획임을 명시하고 있다. 김용사는 678정보의 소유 임야 중 107정보에서 상수리나무 등 총 1만3000여 본을 벌채하여 자체운영 중인 학교의 교육용 기구와 교과용 문구류 구매에 충당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갑사는 총 373정보의 사찰림 중 풍치에 장애가 되는 숲 70정보를 벌채하여 침엽수와 활엽수 혼효림으로 유도하고자 간벌(45정보)과 획벌(25정보)작업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찰 건물의 신축과 보수와 관련된 사찰림 벌채 신청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22년 동화사는 대구포교당의 개축 공사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고자 47정보의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숲에서 간벌재 7만 본을 벌채하였으며, 1928년 표충사는 소실된 대광전, 팔상전, 의향각을 재건하고, 불상 조성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고자 소나무 숲을 벌채하였다. 1937년 마곡사가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교체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고자 사찰림 벌채를 신청한 것도 유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결국 병탄 초기에 사찰림은 사찰 건물의 중건과 보수 경비나 사찰 운영비로 충당하고자 벌채되었던 셈이다.

사찰 숲은 주지의 잘못된 사찰운영으로 파생된 부채상환의 비상금고 역할도 감당했다. 사찰령에 의해 조선 총독이 임명한 주지의 권력은 강력했고, 사찰 소속의 모든 재산 관리권까지 쥐고 있었기에 그에 따른 부작용도 속출했다. 월정사, 통도사, 해인사는 주지의 잘못된 사찰운영으로 파생된 거금의 부채를 사찰림 벌채 수익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월정사는 지정입찰 방식으로 넘겨준 박달나무 벌채권의 임상이 실제 임상과 달라 일본인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주어야만 할 형편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배상금 일부는 토지 매각 대금으로 갚고, 나머지는 1928년 100년 이상의 보존가치가 큰 사찰 인근 산림의 벌채 수익금으로 해결하였다. 통도사의 경우, 주지가 만든 삼산자동차회사의 경영 불량으로 늘어난 부채를 해결하고자 1930년 통도사와 내원암의 산림을 벌채하였다. 해인사는 주지의 측근인 서울의 중앙포교소 사무원이 불법으로 빌린 금융조합의 부채를 해결하고자 1926년 산림 벌채원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일제의 불교계 통제정책은 사찰의 재정불안과 부채 증가를 더욱 심화시켰다. 조선총독부는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운영되고 있던 조선의 사찰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불교계를 중앙집권화시켰고, 교무원과 종무원으로 나누어져 있던 양 기구를 통합하여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 4월에 통합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예산은 교구본사들이 담당하는 말사와 함께 분담하는 1종 재산 충당금(기부금)과 2종 재산(1종 재산으로 발생하는 이자수익)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사찰마다 배정된 기부금을 의무적으로 내야만 했다.

매년 내는 교무원 납부용 기부금과 함께 미납금에 대한 이자도 내야만 했기에 교구본사의 부채는 점차 누적되었다. 개개 사찰들은 그 해결방안으로 소유임야를 벌채하여 얻은 수입이나 토지를 매각하여 그 대금으로 기부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사찰림 벌채가 가장 빈번했던 통도사와 백양사의 벌채허가원을 분석해본 결과, 1930년대 이후의 벌채 목적은 대부분 기부금 납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통도사는 10개년도의 벌채 중, 7개년도(1934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1942년, 1943년)의 벌채 수익금의 전부나 일부가 교무원 출자금으로 사용되었고, 백양사 역시 7개년도(1931년, 1933년, 1934년, 1937년, 1938년, 1941년, 1942년)의 벌채 수익금의 일부가 교무원 출자금으로 납부되었다.

일제강점기 사찰의 산림벌채 수입은 사찰 건물의 중건과 보수 등의 자체적 운영 경비와 부채상환은 물론이고, 교무원 출자금으로 충당되었다. 결국 사찰이 동원 가능한 확실한 환금성 재산은 조선시대부터 지켜온 사찰 숲이었고, 사찰 숲은 불안정한 사찰재정을 지켜준 비상 금고였던 셈이다. 비상 금고란 한두 번의 비상사태를 위한 금고이지, 화수분은 아니다. 자꾸 꺼내 쓰면 결국 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사찰 숲은 30년여 동안이나 비상금고 구실을 했을까?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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