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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장조화, ‘유민도’

기자명 조정육

어떤 수난도 확고한 신념을 뛰어넘지 못한다

계정혜 삼학에 의지해 남을 위해 헌신한다면 처처가 모두 화장세계다~ 허운대사

▲ 장조화, ‘유민도(流民圖)’, 1943년, 종이에 먹, 200×1,202cm, 중국미술관 소장.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에
몸이 크게 상했던 허운대사
고난의 나날들 계속됐지만
중창불사에 매진하며 정진

‘유민도’ 걸작 그린 장조화
문화혁명으로 수모 당해도
예술인의 정신 잃지 않아

“그런 사람이 없단 말씀입니까?”

허운(虛雲,1840~1959)은 노스님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와 함께 있던 문길(文吉)은 누구란 말인가. 1882년 7월 보타산에서 시작해 오대산에서 끝난 3보1배 순례는 3년 만에 끝났다. 총 길이 4천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5번 왕복한 거리에 해당된다. 절강성 보타산(관음보살), 산서성 오대산(문수보살), 사천성 아미산(보현보살), 안휘성 구화산(지장보살)은 중국의 불교 4대 명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3보1배를 하며 보타산에 있는 사찰들을 순례했다. 허운대사도 그 길을 걸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어느 덧 45살이었다. 뭔가 정리가 필요했다. 그가 3보1배를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20년이 넘도록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 것과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허운은 보타산을 출발해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을 거쳐 산서성에 있는 오대산에 도착했다. 그동안 겪은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덥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낮에는 절을 하고 밤에는 잠시 쉬었다. 인적 드문 산길을 걷다 보면 여러 날 굶은 것은 다반사였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동짓달의 추위가 매서웠다. 인적이 끊긴 초막에서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7일 동안 계속 눈이 내렸다. 허운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다. 눈을 떠 보니 한 걸인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그가 문길이었다. 문길은 오대산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이라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때부터 문길은 허운이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옷을 빨아주고 짐을 들어주었으며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문길의 도움으로 허운은 편안하게 3보1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었다. 늦은 밤에 어느 절에서 묵게 되었는데 기근으로 사람들이 굶어 죽는 판에 속인까지 재워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문길은 허운에게 먼저 오대산에 가 있겠다고 말하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두어 달이 지나  허운은 마침내 오대산에 도착했다. 문길이 맡겨 놓은 짐을 받은 허운은 문길을 찾았으나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멍하게 서 있는 허운에게 노스님이 합장하며 말했다.

“문길은 문수보살의 화신인데, 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입니다.”

후한(後漢)때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당송(唐宋)대에 화려한 꽃을 피웠다. 원(元)대 이후 청(淸)대까지도 불교는 1,000여 년 동안 융성했으나 정신적인 깊이에 있어서는 당송시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불교를 이끈 설두중현(雪竇重顯), 대혜종고(大慧宗?), 굉지정각(宏智正覺), 운서주굉(雲棲?宏), 감산덕청(?山德淸) 등 위대한 선사들도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원대 이후의 선사들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허운대사를 끝으로 중국편을 마치도록 하겠다. 특별히 허운대사를 선택한 이유는 격변기를 보낸 불교 수행자로 조동종의 법을 받았으며 당나라 말기에 끊겼던 위앙종, 법안종, 운문종의 종지를 되살린 선승이자 중생구제를 위해 일생을 바친 선지식이었기 때문이다.

허운대사는 7월 29일 복건성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절에서 관음기도로 얻은 아들이었다. 허운대사의 어머니가 출산을 했을 때 사람이 아니라 벌건 살덩어리였다.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이내 숨을 거두었고 다음 날 한 의원이 그 살덩이를 갈라 아이를 꺼냈다. 그 아이가 허운대사였다. 허운대사는 양모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허운대사의 어릴 때 이름은 충국(忠國)이었다. 어릴 때부터 육식을 금하고 책 읽는 데 몰두했던 충국은 17세에 사촌동생과 함께 호남성 상봉사에서 아버지 몰래 출가.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충국에게 도교서적을 읽게 하고 도사를 만나게 했으니 충국은 도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버지는 충국에게 전(田)씨와 담(譚)씨 두 여인을 혼인시켰다. 그러나 충국은 밤마다 두 부인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었고 나중에 함께 출가자하는 약속까지 했다.

대를 이으라는 아버지의 성화를 견디기 힘들었던 충국은 19세에 사촌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56일을 걸어 복건성 용천사(湧泉寺)에 도착했다. 여기서 수계를 받고 고암(古巖)이라는 법명을 받고 지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전국 방방의 절을 찾아다녔다. 허운대사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용천사 뒤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3년을 보냈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은 허운대사는은 다시 절에 내려와 4년 동안 소임을 맡았다. 그러나 수행에 진전이 없자 다시 산에 들어가 3년 동안 수행했다. 31세 때 어떤 스님의 소개로 천태산 용천암에 있는 융경(融鏡)스님을 찾아가 공부 시작했다. ‘누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가’라는 화두를 시작으로 천태지관 수행법과 경전 공부를 병행했다. 융경스님이 입적하자 6년 동안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들을 찾아다녔다.

허운대사가 보타산에서 오대산으로 3보1배 순례를 떠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자신을 낳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출가한 아들을 찾아다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위한 순례였다. 갚을 수 없는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참회와 감사의 순례였다. 오대산에서 시작된 성지순례는 해외로 이어졌다. 티벳 라싸를 비롯해 부탄,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을 걸어서 참배했다. 2년간의 해외성지순례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계족산, 황산, 구화산 등을 걸어 다니며 수행을 계속했다. 드디어 56세에 강소성 고민사(高旻寺)에서 정각을 이루었다. 58세 때 절강성 아육왕사에서 부처님 사리에 예배하기로 했는데 병이 났다. 죽음을 앞둔 허운대사는 부모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소지공양을 했다. 그는 일심으로 염불하며 백만배를 하면서 모친의 왕생극락을 염원했다.

허운대사는 60세까지 자신의 수행을 위해 정진했다. 60세 이후로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사에 헌신했다. 1905년 66세에 운남성 축성사 불사를 시작으로 그의 보살행은 계속되었다. 당시 중국은 1912년에 청이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으며 1921년에는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는 등 격변의 시기였다. 불교는 미신이라고 손가락질 받았고 봉건주의의 산물이라고 배척받았다. 절은 더 이상 서슬 푸른 수행자들을 찾아볼 수 있는 청정도량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계율을 알지 못했고 절은 양반자재들이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도첩을 사서 사는 도피처였다. 부처님을 모신 도량에서 도박을 하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허운대사는 가는 곳마다 도량을 정비했다. 계율의식을 고취시키고 불교학자를 불러 강좌를 열었으며 대장경과 불교서적을 비치했다.

허운대사가 도량을 정비할 때 꼭 지키는 원칙이 있었다. 청규를 제정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고 대웅전 불사를 마치면 반드시 장경루를 지어 경전을 비치하였다. 그는 선사였지만 경전, 즉 교를 매우 소중히 했다. 장경루에 비치할 경장은 반드시 스님이 해외에서 손수 가져왔다. 어지러운 세상에 경전을 보존하는 일이 불교를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할 수 있어도 행을 할 수 없다면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고 하면서 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더욱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경전 공부도 꼭 필요함을 역설했다. 선과 교 못지않게 염불도 권장했다. 1954년 115세에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진여사 대웅전을 중수할 때 그를 찾아온 사람들 1,500명에게 계를 주면서 ‘아미타불’염불운동을 펼쳤다. 그는 “수행은 움직임 가운데서 닦아야 하며, 반드시 앉아서 눈을 감고해야 수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일체처에서 수도”하라고 가르쳤다.

그의 노력으로 허물어진 법당은 위용을 갖추었고 스님들은 수행자의 본분을 되찾았다. 1952년까지 운남성, 복건성, 광동성, 강서성에 있던 수많은 사찰들이 지속적으로 복원되었다. 그의 보살행은 불사에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 전쟁 중이었다. 일본과의 항전으로 어려움을 겪는 정부에 법회 시주금을 보냈고 죽 배급소와 무료 의료실을 열어 난민구제에 나섰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고 불교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불자가 되었다. 신해혁명을 이끈 잠학려(岑學呂)는 허운대사가 계단에 오르자 대웅전 앞 늙은 매화에서 갑자기 수십 송이의 꽃이 만발하고 산에서 내려 온 호랑이가 계단에 얌전히 엎드리는 것을 보고 계를 받았다. 

허운대사의 보살행은 평생 계속되었지만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1949년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중화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 종교탄압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51년 112세의 허운이 광동성 운문산 대각사(大覺寺)에 머물 때였다. 2월 어느 날 공산당 병사들이 들이닥치더니 불사금으로 받은 돈이나 금괴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허운은 그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들은 갈비뼈가 부러진 허운을 ‘반혁명분자’라고 부르며 방장실에 가둔 뒤 음식도 주지 않고 대소변 보는 것도 금지했다. 그들은 허운대사가 죽었는 지 확인하기 위해 2~3일에 한 번씩 들여다보며 구타를 계속했다. 허운대사의 법문집을 불태우고 스승이 보는 앞에서 제자 스님들을 고문했다. 그 사건으로 많은 스님들이 뼈가 부러지거나 고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중국불교사에서 알려진 운문사변(雲門事變)이었다.

운문사변은 곧바로 국내외에 알려졌다. 사방에서 허운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세계 각국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해 태국 국왕, 베트남 총리, 인도 네루 수상 등이 허운대사의 석방을 요청했다. 곤란에 처한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허운대사를 석방했다. 대신 베이징으로 올라오게 해서 광제사에 감금했다. 공산당은 1952년 10월 1일 천안문광장에서의 국경절 경축행사에 허운대사를 참석시키면서 공산당의 선전도구로 이용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허운대사는 강서성 연수현에 있는 진여사에 가겠다고 요청했다. 1954년 115세에 진여사에 내려와 중일전쟁으로 파괴된 가람을 복구했다. 전 대중이 직접 땅을 개간하고 수행하는 선농병행의 노력과 홍콩과 해외 화교들의 도움으로 진여사의 불사는 원만히 진행되었다. 허운대사는 선종5가 중 종맥이 끊긴 위앙종을 되살려 진여사를 위앙종 종풍 본찰로 만들었다.

그러나 허운대사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운대사에 의해 진여사가 웅장한 가람의 모습을 되찾고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지자 공산당 병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감시했다. 그날도 불시에 들이닥친 병사들은 대중들을 한 곳에 모았다. 그리고 허운대사를 중앙에 앉힌 후 제자들에게 스승을 비판하라고 강요했다. 제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운대사에게 총을 들이대며 자아비판을 하라고 요구했다. 참 어려운 시절이었다. 허운대사는 1959년에 자리에 누운 후 10월 13일에 입적했다.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환으로 만든 다음 강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도록 하라고 말한 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계정혜를 부지런히 닦고, 탐진치를 소멸하라. 법을 구하기 위해 신명을 바치고, 서로서로를 존중하라. 도량을 보존하고 사원의 청규를 지켜나가는 데는 오직 한 글 자, 바로 계(戒)이다. 정념정심(正念正心)으로 대무외(大無畏)정신을 기르고, 사람을 제도하고 세상을 제도하라.”

「유민도(流民圖)」를 그린 장조화(蔣兆和;1904~1986)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집을 나와 유랑민이 되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 16살에 상해로 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입에 밥 한 숟가락 넣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절절하게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꿈을 잃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해 초상화와 광고용 그림을 그렸다. 25살 되던 해에 교육부 주최 전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고 그 다음 해인 1930년에는 마침내 남경중앙대학 미술과 조교수가 되었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사람은 서비홍(徐悲鴻:1895~1953)이었다. 서비홍은 중국 전통화법에 서양의 사실주의적인 관찰방법을 도입해 중국 근대회화의 기반을 다진 사람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1932년 1월 28일에는 일본군이 상해를 급습했다. 장조화는 상해에 살면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중국인의 참상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다. 중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노구교 사건(1937,7,7) 이후에는 일본이 점령한 북경에 고립되었다. 적군치하에서 살면서 그는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북경에서의 삶은 자연재해와 전쟁의 혼란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치하에서 북경은 더 이상 자유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노예처럼 짓밟힌 사람들은 그들의 분노를 가슴 밑바닥에 묻어야만 했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치욕은 일상적인 삶이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해야만 했고 피정복민이 무엇인가를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나라가 망한 수치심은 화가에게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화가의 마음속에 묻힌 분노는 1942년에 화산처럼 폭발했다. 38세의 작가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용기로 베이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눈앞에서 「유민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붓으로 느낀 것을 표현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겪은 고통과 일본군의 폭격과 강압적인 공격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했던 전례 없는 고난에 대해 온전하게 폭로하고자했다. 「유민도」에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축 늘어진 딸의 시체를 안고 있는 엄마. 죽은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빨고 있는 아이. 양손으로 귀를 막은 노인. 팔을 읽은 친구를 부축하며 가는 친구. 주먹밥을 빼앗으려고 싸우는 아이들. 통곡하는 여인들. 절름발이. 부랑자. 맹인 등등.

「유민도」는 송대의 화가 정협(鄭俠, 1041~1119)의 「유민도」에서 제목을 취했다. 정협은 호가 일불거사(一拂居士)로 신종(神宗) 때 안상감문(安上監門)이 되었는데 유민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고 병충해가 계속되자 길거리에는 굶어죽은 사람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하동(河東) 하북(河北), 섬서(陝西)의 유민들은 모두 집을 떠나 경성(京城)으로 몰려들었다. 정협은 자신이 목격한 유민들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 조정에 올렸다. 장조화는 그의 그림을 「유민도」의 속편이라 불렀다. 그는 노구교 사건을 회상하며 동포들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수 백장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린 체 위장하고 상해와 다른 지역을 여행하며 자료를 모으고 유랑민의 삶을 관찰했다. 일본군에게 발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숙소에 돌아온 후 기억에 의해 「유민도」의 밑그림을 그렸고, 밑그림조차 전부 없애버렸다. 그는 「유민도」를 여러 폭으로 나누어 그렸다. 그는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일상적인 방문객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각 폭의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숨겼다. 그래서 사람들이 본 것은 단지 2미터 높이의 드로잉판에 그려진 한 두 명의 얼굴뿐이었다. 작가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의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없었다. 작가 자신조차도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전체그림의 효과를 볼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1943년 9월에 「유민도」를 완성했다. 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그림은 마침내 전시할 기회를 얻었다. 뜻밖의 사건에 대비해 장조화는 50세트의 사진을 찍었다. 전시회 때 「유민도」는 「군상도(群像圖)」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2주 동안 시민들이 와서 볼 수 있는 전시회였다. 1943년 10월 29일, 「유민도」는 북경 태묘정전(太廟正殿)에서 장엄하고 엄숙하고 정중하게 전시됐다. 「유민도」 앞에는 긴 줄의 황색국화가 놓여졌다. 긴 줄로 늘어선 많은 방문객들은 엄숙하면서도 비애감 넘치는 그림 앞을 조용히 지나갔다.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작자가 인쇄된 「유민도」 사진이 전부 매진되었다. 비록 그 전시회는 일본헌병대가 폐쇄하기까지 겨우 몇 시간밖에 열리지 않았지만 작가의 양심에 따라 민족적 자존감과 인민의 불행을 표현하려는 비장한 서사시로 식민지인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전시회가 금지되자 화가는 급히 작품을 담아 현장을 떠났다. 그가 막 전시장을 떠나려고 할 때 전시장폐쇄를 담당한 중국경찰은 그에게 다가와 눈물을 머금고 경례를 했다. 전시가 끝난 1년 뒤 1944년에 장조화와 그의 아내는 길이 26미터에 높이가 2미터인 「유민도」를 한 장 한 장 분리해서 상해로 옮겼다. 상해의 프랑스 조차지에서 열린 전시회 또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시가 끝날 무렵 그림은 당국에 의해 몰수되어 분실되었다. 그 해에 서비홍은 장조화와 8년 동안 연락이 끊겨 접촉을 하지 못했는데 1941년 적의 통치하에서 출판된 장조화의 화집과 사진을 보고 곧바로 그와 접촉해 그에게 북경예술대 교수로 위촉했다.

1953년에 「유민도」가 상해에서 발견되었다. 절반이 흰곰팡이로 훼손된 상태였다. 그림 중간 중간이 삭제되고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장조화가 1957년에 소련에 가서 현대중국화전에 참석했을 때 「유민도」가 전시되었다. 이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똑같은 고통을 겪은 소련 작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민도」의 중앙장면에 폭격당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데?여러 여성들이 서로 끌어안은 채 놀란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고, 노인은 손으로 귀를 가리고 시체는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부분~ 일본군의 침공 때문에 중국인들이 겪은 역사적 비극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그동안 잘 보관된 「유민도」 초본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잔존했던 절반의 그림은 화재(火災)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문화대혁명 때는 많은 관리와 지식인, 학자와 예술가들이 반혁명인사로 지목되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장조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우스꽝스럽게도 “「유민도」가 반공산주의적 작품으로 공습장면은 공산당 비행기가 인민들을 폭격한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고백해야만 했다. 70세의 늙은 장조화는 거듭해서 그의 “범죄”를 자백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장조화는 비인간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음과 같을 글로써 「유민도」를 분명하게 옹호했다. “그 당시에는 오직 일본군만이 폭탄을 떨어뜨리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했다”

「유민도」는 서양화와 중국 전통회화를 결합한 장조화의 대표작이다. 수묵과 채색을 이용해 중국 초상화의 새 장을 열었으며 이전에는 시도되지 않은 기법을 적용해 현실을 묘사했다. 장조화는 「유민도」를 그린 것만으로도 진실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압축했다. 「유민도」는 예술가의 용기 있는 정신을 기록한 서사시이며 사람들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생생한 교훈이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런 작품을 그릴 수 있었을까. 장조화는 말한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예술과 리얼리즘에 관해 단순하면서 따듯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원한다. 나는 그 일을 동정하는 사람이나 인도주의자, 그 계층 사람들 바깥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나에게 사람들과 유리된 예술, 삶과 유리된 예술은 말할 가치가 없다.”

허운대사와 장조화는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았다. 역사의 격변기에 한 사람은 종교로, 다른 한사람은 예술로 그 시대를 충실히 살았다. 한 사람은 중생을 위해 다른 사람은 인민을 위해 봉사했지만 공산당 치하에서 갖은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법난과 수난을 당하면서도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그들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천했다. 이것이 허운대사와 장조화의 삶에서 현재의 우리가 감동받는 이유다. 우리가 닮아야 할 삶의 방식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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