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마음-상
30. 마음-상
  • 이진경 교수
  • 승인 2015.08.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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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불교적 사유를 요약하는 명제 중 하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마음’이란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음과 무관하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니 마음먹기 달렸다. 그러니 마음 하나 고쳐먹으면 지금 여기가 바로 일승법계요 극락”이라는 말은, 굳이 절 근처에 가지 않아도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지만
마음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마음은 내 안에 있던 게 아닌
외부 조건들과 만나 생긴 것


‘스타워즈’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믿고, 그게 불교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음이 분명하다. ‘스타워즈’에서 제다이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마스터 요다는 마음을 집중하면 늪에 빠진 전투기마저 들어 올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말 “일체유심조”다. 정신으로 돌을 드는 연습 중이었건만, 그걸 보고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루크에게 “그래서 넌 실패한 거야”라고 말한다. 신심이 있고, 그걸 최대치로 집중할 수 있으면 돌도 비행기도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총알을 피하고 고층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는 ‘매트릭스’의 장면들 역시 모든 게 마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가부좌를 한 채 공중부양을 하는 분들도 있다지만, 직접 본 적이 없거니와 그건 불교수행보다는 서커스에 속한다고 보는 나로선 영화에서 보는 저런 장면을 만화적 공상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신심이 없기에, 해보려고도 하지 않기에 안 되는 것인지도.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걸어볼 생각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신통력’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곤 생각하지 않기에 그런 신심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마음에 관한 것이라면, 사실 왕가위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가령 ‘2046’에서 사랑하던 여인과의 이별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차우는 자신에게 다가온 여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전 연인과 같은 이름에 끌려 품어 안았던 도박사 수리첸의 마음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랑하고자 하지만 사랑하지 못한다. ‘동사서독’에서 구양봉 또한 연인이었으나 형수가 된 여인을 잊지 못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해결사’가 되어 불모의 삶을 방황한다. 모용연은 해결사 구양봉에게 동생과의 약속을 어긴 황약사를 죽여 달라하고 모용언은 그런 오빠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만, 구양봉은 실은 그게 배신당하고도 여전히 사랑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 분열되어 표현된 것임을 알게 된다. 모두들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지만 마음먹은 대로 살긴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어떻게 할 줄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조’하면 흔히 예로 드는, 해골물을 마셨던 원효의 고사도 그렇다. 맘먹기에 따라 해골물도 맛있을 수 있겠지만 해골을 본 이상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되는 게 문제 아닐까? 내 마음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삶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내 마음이나 내 맘대로 하자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분들은 부처의 경지에 올라 ‘대자유’를 얻은 분들일 텐데, 그런 분들은 평생을 선방에 앉아 있는 분 가운데서도 극히 희소하지 않은가. 그걸 보면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지나간 것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지나가버려 없고, 지나가는 것 또한 잡지 않으면 지나가는 것이 마음의 ‘실상’이라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오지 않은 것을 구하려 하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며, 지나간 것을 잊지 못해 고생한다. 차우나 구양봉은 지나간 것을 잊지 못해 그것을 붙잡고, 아니 그것에 붙잡혀 산다. 모용언은 오지 않은 이를 미워하면서도 붙잡고 싶어 하며 혹시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게 중생인 우리의 마음이다. 하여, 그 마음이 만든 방황이 있고 그렇게 고통스레 방황하는 세상이 있고, 그런 세상 속에서 매일매일 결정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삶이 있다. 어쩌면 실상을 깨치지 못한 우리의 실제 삶은 차라리 이 방황하는 마음이 만든 세상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사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들이 왜 ‘일체유심조’를 말했던 것일까? 그렇게 말했을 때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내 마음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다시 되짚어보자. 왜 내 마음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까? 가령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지는 건 일종의 ‘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여기서 먹고 싶다는 마음은 정확하게 말하면 음식과 나의 감각기관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것이겠지만, 굳이 대비하여 말하자면, 절식해야지 굳게 결심하고 있는 내 마음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음식에 속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고’, 침대에 누우면 자고 싶어지고, 좋아하는 여자를 보면 사랑하고 싶어지고….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 부지중에 어느새 하고 싶어지게 되는 것은 모두 이런 식이다. 음식이 있다고 다 먹고 싶어 하진 않는다고 하겠지만 그 마음조차 내 의지보다는 배부른 내 신체에 속한 것일 게다. 며칠 굶겨도 그럴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싫어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맥클루언의 유명한 명제가 뜻하는 게 바로 이것일 게다. TV나 자동차, 혹은 돈이나 옷 등의 미디어(매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립적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교환을 위해 돈이란 매개물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일단 돈이 나타나면 돈을 벌기 위해 생산하고 교환하게 된다.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라는 명령, 그게 돈의 메시지고, 우리는 대개 그것을 따르게 된다. 그건 우리 마음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는 돈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맘먹는다는 것은 저렇게 내게 주어진 조건을 따라 내 마음 밖에서 오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지’란 없다고 스피노자는 확언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쓴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그가 읽은 책이나 그가 겪은 어떤 사건, 혹은 사람이 무언가 쓰도록 촉발했기 때문이고, 그런 자극을 표현한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행위조차 신체의 어떤 상태가 그것을 요구한 것에 따른 것이다. 신장이나 방광이 앞장서서 하는 그런 촉발이 없다면 소변기 앞에 서려는 마음이 생겼을 리 없다. 오줌을 누는 것도 내가 맘먹기 이전에 신체나 혀가 맘먹은 것이고, 그 신체에 흡수된 수분이 ‘맘먹은’ 것이다. 내가 내 뜻대로 행위한다고, 즉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믿는 것은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할 때, 그 마음은 저렇듯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하는, 내게 다가온 것들에 속한 마음들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음식에 속한 마음, 침대에 속한 마음, 바퀴에 속한 마음, 방광에 속한 마음 등등이.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들과 내가 만나서 일어나는 게 마음이니, 마음이란 그런 만남의 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장 안에서 일차적인 것은 내 맘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게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내 마음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나의 마음이란 그런 것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텅 비어 있는 마당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마음이란 그렇게 밖에서 들어온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게 어디 나뿐이랴! 내가 하는 언행에 화를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내 옆에 있는 이들도 그렇다. 내 집에 사는 개미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다. 과자부스러기에 스며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이 개미의 촉수를 부르고, 개미를 쫓아내려는 인간의 마음이 개미의 행적을 숨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내 마음 바깥에서 들어오는 저 마음들의 연쇄, 그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개미의 마음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나나 개미를 특정한 양상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유심조’는 연기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것들에 속한 ‘마음’들이 나를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유심조’는 차라리 내 마음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식의 관념론과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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