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작자미상, ‘금강산도10폭병풍’
30. 작자미상, ‘금강산도10폭병풍’
  • 조정육
  • 승인 2015.08.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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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과 존경은 권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 작자미상, ‘금강산도10폭병풍’ 중 7폭, 19세기, 종이에 연한 색, 76×36.5cm, 서울역사박물관.

현재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는 조계종(曹溪宗)이다. 조계종의 종조(宗祖)는 도의(道義, ?~825)선사다. 도의선사는 이 땅에 남종선(南宗禪)을 처음으로 전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시작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산조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이 처음부터 불교라는 종교를 세우지 않았듯 도의선사 또한 처음부터 조계종의 종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 글에서는 도의선사를 통해 어떻게 그가 조계종의 종조가 되었는지 살펴보겠다.

당나라서 37년 수행한 도의
귀국한 뒤 설악산에 들어가
선승 몰려들어 설악산문 형성
법맥을 이은 가지산문 탄생

이렇게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도의 선사에 관련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조당집’ 권17에 실린 ‘도의전’을 통해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외에 장흥 보림사(寶林寺)에 있는 보조선사 체징비(體澄碑)나 쌍계사의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봉암사의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풍기 비로암의 진공대사비(眞空大師碑) 등에서 도의선사의 일면을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도의선사는 속성이 왕(王)씨로 북한군(北韓郡, 서울) 사람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대인 750년경이었다. 어머니가 꿈속에 승려와 동침하는 꿈을 꾸고 39개월 만에 태어났다. 20세를 전후하여 출가했는데 법호를 명적(明寂)이라 했다. 30세 전후인 선덕왕(善德王) 때(784) 당나라에 들어가 40여년을 수행했다. 처음 입당(入唐)했을 때 오대산 문수도량을 참배하였는데 기도하는 도중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감응을 받았다. 입당 시에는 선종이 아니라 화엄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행 과정에서 육조혜능(慧能)대사가 ‘육조단경’을 설법한 대범사(大梵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조계산 보림사(寶林寺)에 있는 혜능의 조사당을 참배한 후 남종선으로 바꾸었다. 그 후 홍주의 개원사로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를 만나 자신의 의문점을 해결했다. 서당지장선사로부터 ‘법을 전할 만한 사람’이라는 찬탄과 함께 ‘도의(道義)’라는 법명을 얻었다. 다시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를 찾아가 ‘마조(馬祖)의 법맥이 모두 동국으로 돌아간다’는 찬탄을 들었다. 서당지장과 백장회해는 혜능대사~남악회양~마조도일로 이어지는 남종선의 쌍수제자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서 810년경에 쌍계사의 진감혜소(眞鑑慧昭, 774~850)와 만나 10여년을 함께 절차탁마했다. 그 후 당나라에서 37년간 수행한 후 821년경에 신라에 귀국했다.

신라에 귀국했지만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입성하지 못하고 설악산으로 갔다. 교종의 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강조하는 그의 설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구니의 말’(魔語)이라고 하며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이런 반응을 본 도의선사는 아직 선법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최치원(崔致遠, 857~?)의 표현처럼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협소한 곳에 감추어’ 동해의 동쪽인 경주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북산(北山,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보조선사 체징비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경교(經敎)와 관법(觀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을 숭상하여 그의 무위임운(無爲任運:평상의 삶에 마음을 맡겨 인위적으로 조작하지 않음)의 종지에 모이지 아니하고 황당무계한 것으로 여겨 존숭하고 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고 전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그가 귀국한 다음 해인 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발발해 혼란스러움을 피해 설악산을 택했다고도 전한다. 결국 그는 불교계의 반대와 정치적인 사정으로 경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를 경제적으로 후원해줄 왕실과 진골 귀족 등의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수행에 전념했다. 그의 소문을 듣고 선승들이 몰려 들었다. 도의선사는 진전사에서 염거(廉居,?~844)화상에게 법을 전했다. 달마조사가 양 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했지만 소림사에서 9년 면벽 끝에 혜가(慧可)를 얻은 것과 같았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선림원지)에 머물며 보조체징(普照體澄,803∼880)에게 법을 전했다. 진전사와 억성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설악산문(雪嶽山門)이 형성되었다.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도의선사가 귀국했던 헌덕왕(憲德王)대의 기존 불교계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보위를 물려받은 흥덕왕(興德王)은 불교정책을 선종 중심으로 전환했다. 흥덕왕은 실상산문(實相山門, 828년)을 개창한 홍척(洪陟)선사와 쌍계사의 혜소선사에게 귀의했다. 흥덕왕은 도의선사와 혜소선사를 중국의 현장과 법현에 빗대어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 표현하며 존경했다. 이즈음 불교계의 변화는 단순한 변화 정도가 아니라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다. 당시 당에서 귀국한 선승들은 북으로는 북산(北山)에서 남으로는 남악(南岳:지리산)에 이르기까지 소위 구산선문을 개창하면서 선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불교의 중심지였던 경주 중심의 불교가 변방중심으로 확산된 것이다.

설악산문에만 한정되어 있던 도의선사의 가르침은 어떻게 해서 가지산문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을까. 설악산에서 도의선사의 법을 배운 체징은 837년에 당나라에 건너갔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도의선사의 가르침 이상의 것이 없음을 알고 귀국했다. 체징은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고향 근처인 웅진(현 공주) 장곡사에 머물렀으나 불교계에서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무진주(현 전주)의 황학사에 머물러 있을 때 헌안왕(憲安王)의 요청으로 장흥 보림사에서 주석하게 되었다. 당시 선종산문 중 전라도 지역에는 홍척선사가 개창한 실상산문과 혜철(惠哲)선사가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개창한 동리산문(桐裏山門, 839) 등 영향력이 있는 산문들이 생겨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왕실의 지원으로 산문을 개창했으나 체징의 이름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이에 체징은 자신과 가지산문을 현양하기 위해 도의선사를 1조로 삼고 염거화상을 2조로 삼아 가지산문을 열었다. 설악산문의 적통이 가지산문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체징은 가지산문이 있는 보림사가 동국 선문의 총본산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노력으로 왕실에서는 체징이 열반에 들자 보림사라는 사호를 내려주었다. 육조 혜능대사가 주석한 중국 선종의 총본산이 보림사이듯 도의선사의 법맥을 이은 가지산문의 보림사가 동국 선문의 총본산이 되었다. 설악산문은 가지산문의 개창과 함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명주에서 범일(梵日)선사에 의해 강릉의 굴산사(?山寺)에서 사굴산문(??山門, 847)이 열린 것도 한 원인이었다. 당나라에서 귀국 직후 ‘마구니의 말’을 한다고 비난받던 도의선사의 가르침이 동국 선문의 기준이 된 것이다.

‘금강산도10폭병풍’은 금강산의 주요 경물을 10폭의 병풍에 그린 산수화다. 각 병풍에는 총석정, 표훈사, 정양사, 구룡연, 만폭동, 진주담 등 금강산의 명소가 빼곡히 그려졌다. 금강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명소마다 붉은색으로 이름을 적어 넣었다. 19세기에 그려진 이 병풍을 보면 거의 2세기 전에 금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정선(鄭敾:1676~1759)과 만날 수 있다. 날카로운 바위산과 부드러운 토산(土山)을 비교해서 그린 사람이 정선이다. 바위표면을 수직준(垂直?)으로 내리 그어 거칠고 뾰족한 바위 질감을 표현한 것은 정선의 특기다. 둥근 토산에 붓을 뉘어 미점준(米點?)으로 점을 찍듯 부드럽게 표현한 것도 정선의 장기였다. 그뿐인가. 각 봉우리와 암자, 사찰과 연못 등에 이름을 적어 넣는 형식도 정선의 방식이다. 금강산 전체 모습을 한 장에 그린 전도(全圖)와 특정 지역만을 확대해서 그린 명소도(名所圖)를 구분해서 그린 사람도 정선이다. 여행자는 금강전도를 들여다보며 금강산으로 향하는 기행여정에 따라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가 시작한 진경산수화의 전통은 수많은 후배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금강산도10폭병풍’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정선화풍을 따르되 정선 그림보다 격이 떨어진다. 훨씬 도안화되어 있고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토산의 미점은 도장을 찍은 듯 천편일률적이고 변화가 없다. 암봉 사이로 흐르는 구름은 또 어떠한가. 구름이 아니라 조개껍질 같다.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시대에 따라 퇴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히 민화작품이라서라고 변명하기에도 옹색하다. 이 작품이 제작된 19세기에 민화가 아닌 일반산수화에서도 정선의 작품에 버금갈만한 진경산수화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의 정신이 사라진 진경산수화는 진짜 경치를 그렸다고 할 수 없다.

구산선문은 어떻게 해서 조계종의 뿌리가 되었을까. 구산선문은 신라 때부터 시작되어 고려 태조 때 완성된 불교 선종(禪宗)의 아홉 산문을 가리킨다. 한국 선종의 종풍(宗風)을 일으킨 구산선문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의선사의 법을 이어받은 가지산문과 홍척선사의 실상산문이 가장 빠르다. 그 후 혜철선사의 동리산문(桐裏山門, 839)이 개창했고, 무염(無染)선사에 의해 보령의 성주사(聖住寺)에서 성주산문(聖住山門, 847)이, 범일선사의 사굴산문이, 도윤(道允)선사의 법맥을 계승하여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獅子山門, 882)이, 현욱(玄昱)선사의 법맥을 계승하여 창원의 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문(鳳林山門, 890)이, 이엄(利嚴)선사에 의해 고려 초에 해주의 광조사(廣照寺)에서 수미산문(須彌山門, 932)이, 도헌(道憲)선사의 법맥을 계승하여 문경의 봉암사(鳳岩寺)에서 희양산문(曦陽山門, 935)이 열려 구산선문이 정립되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불교계 종파는 교종(敎宗)의 5교와 선종의 9산문을 합해 ‘5교 9산(五敎九山)’으로 불렸다. 구산선문은 모두 선적종(禪寂宗)에 속했다. 그런데 의천(義天)이 교종과 선종을 통합해 선(禪) 중심의 천태종(天台宗)으로 개칭하자 구산선문은 선적종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했다. 이로써 선종에 천태종과 조계종의 두 종파가 생겨 종래 교종의 5교와 선종의 두 종파를 합해 ‘5교 양종’으로 부르게 되었다. 교종의 5교 중에서는 화엄종의 교세가 가장 컸고 선종의 2종에서는 천태종의 교세가 컸다. 천태종은 비록 교종과 선종을 통합했다고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교종 중심이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불교계는 교종이 지배했다. 선종의 근본인 조계종이 불교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에 의해서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눌편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정리하자면 신라 때 도의선사를 시작으로 한 구산선문이 고려시대 때 조계종으로 통합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도의선사를 종조로 하는 현재의 조계종은 신라시대에 비해 어떻게 변했는가. 더 발전했을까. 아니면 순수성을 잃고 변질됐을까. 조계종은 남종선을 근본으로 하는 종파인데 과연 지금의 조계종은 남종선을 얼마만큼 깊이 있게 실천하고 있을까. 서두에서 현재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가 조계종이라고 했다. 불교계의 큰집이다. 큰집은 집이 커서 큰집이 아니다. 위엄이 있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때 큰집이라 한다. 위엄과 존경은 권위나 허세에서 나오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질 때 우러난다. 조계종은 지금 큰집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혹시 정선의 금강산도를 종조로 하면서도 정선의 필법에서 한참 멀어진 ‘금강산도10폭병풍’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조계종단에 몸을 담고 있는 불자로서 이런저런 반성을 많이 하게 되는 시간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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