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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기자명 이미령

‘사랑’이란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고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청미래
“사랑이 뭐예요?”

누군가가 이렇게 당신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스물 다섯 청년 철학자가 쓴
사랑에 대한 치밀한 관찰일기
비행기서 아무 정보없이 만나
한시간만에 사랑하게 된 그녀

사랑의 진행과정 속에서 이뤄진
“왜 사랑하는가”에 대한 고민

타인으로부터 무장해제 당하며
끊임없이 당면하는 자아 발견
결국 사랑의 정의는 사랑일 뿐

‘이뭣꼬’만큼이나 우리를 당혹시킬 이 질문에 우리 시대의 작가 김훈은 그의 글 ‘바다의 기별’(‘라면을 끓이며’에 수록)에서 이렇게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작가는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라고까지 일갈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사랑이란 마칠 수 없는 영원한 숙제와 같은 것이니 사랑에 빠지려면 단단히 각오하라고 훈계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과연, 이런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치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을 일요일 늦은 밤에야 생각해낸 초등학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급해지지만 몸은 졸리고 과감히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다음 날 창피당할 일을 생각하면 구토가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60억 아니 70억 명의 인간들 중에서 어찌하여 딱 저 사람이 내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와서 나를 이렇게 뒤흔들어놓았느냐는 이 혼란.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이미 다른 인간을 마음에 품는 순간 자신이 해체되는 혼돈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이 무력감. 그리고 이런 감정들을 세심하게 냉철하게 짚어볼 사이도 없이 시뻘겋게 타오르는 열정의 가마솥에 자글자글 삶겨지는 이 달뜸.

이걸 설명하자니, 가수 송창식이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라며 뜬금없는 타인의 침입에 당황하다가 ‘단 한 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을 고백하면서 가장 마지막에 그게 바로 “사랑이야!”라고 외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사랑이란 말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재귀적 미로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1969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우리 나이로 스물다섯 살 쯤에 세상에 내놓은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소개하려니 어쩐지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 주절주절 허튼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 참 기가 막힙니다. 원제목은 ‘Essays in Love’ 또는 ‘On Love’입니다. 사랑에 대한 글, 사랑에 대하여, 사랑론… 이렇게 옮겨도 좋았을 것을 한국에서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제목을 달아버린 겁니다. 이 한국어판 제목에는,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작가의 생각이 아주 그럴 듯하게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독자들은 이 책 제목을 한 번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책값을 내러 계산대로 향했을 것입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알랭 드 보통은 스물 세 살의 화자로서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브리티시 항공기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동갑내기 여인 클로이를 만나게 됩니다. 그저 우연히 옆자리 승객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겨우 한 시간 남짓한 비행시간과 짐을 챙겨 세관을 통과하는 그 짧은 시간에 화자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나는 이미 클로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 무엇인가에 빠지고 이끌리고 싶은 욕구가 항상 우리 마음속에 담겨 있는데 그게 어떤 대상을 만나면서 확 불이 붙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게다가 이 경우, ‘나’는 클로이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상대가 정확하게 누군지도 모르면서 빠지게 되는 어떤 감정이라고 보통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 최초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 대해서 그 어떤 정확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이끌리는 것-이것이 사랑의 시작이겠으나,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곁을 스쳐 지나간 숱한 다른 사람과 전부 운명적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는 클로이가 내 필생의 사랑임을 직감합니다. 이게 참 묘한 일이지요.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어떤 논리적인 근거를 댈 수도 없이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화자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가능한 모든 감정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사랑을 느꼈는지, 그리고 그 감정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녀에게 갑자기 느끼게 되었는지, 그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감정이 왜 하필 그·그녀에게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말할 수도 없는 가운데 우리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사랑은 무지에서 시작해서 우리를 더 깊은 무지로 끌어갑니다. 그리고 내 밖의 어떤 존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 서사(narration)를 자아냅니다.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뭔가 운명적이고 필연적이고 신비적인 인과관계를 지어내면서 그·그녀와의 사랑은 시작됩니다.

스물다섯 살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이제 왜 우리는 그·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압도하고 어떻게 물들이며 어떻게 변화시켜 가는지를 치밀하게 살펴보기로 합니다. 마르크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라클레이토스, 디오니소스, 프로이트, 플로베르의 마담 보봐리 등등, 온갖 신화와 사상가의 주장을 배경으로 가슴 떨리는 첫 번째 통화, 상대방의 적당히 이유 있는 거절과 재약속. 그리고 본격적인 첫 번째 데이트, 다음 번 데이트 약속, 레스토랑에서의 메뉴 고르기, 상대방의 식성에 자신의 취향까지 짜 맞추는 못난 행위, 첫 번째 키스와 동침…의 순서로 사랑은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성과 침대까지 갔다면 상당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단단히 여며져 있던 옷의 단추가 풀리며 상대방의 육체와 거리낌 없이 만나는 일을 치르고 나면 두 사람의 관계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말다툼과 어긋남이 벌어지게 됩니다.

처음 사랑에 눈이 멀었을 때는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하며 고마워하고 심지어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생겼단 말일까?”하며 감격합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삐걱거림으로 자신이 어느 사이 그·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감정은 묘하게 나아갑니다.

이런 과정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저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할까?’를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게 되겠지요. 이 질문 속에는 ‘나는 정말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도 담겨 있을 테지만 대체로 전자의 질문에 더 몰입하는 것이 연인들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통은 말합니다.

“연인들은 갈망과 짜증이라는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사랑은 단순히 방향일 뿐이며, 바라는 것을 붙잡고 나면 그 이상 바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은 충족이 되면 스스로 타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은 꺼진다.”

‘나’와 클로이의 사랑은 무게나 빛깔이나 방향이 같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나’는 클로이가 아니고, 클로이는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픈 대상을 사랑할 뿐이지, 정작 그 상대방 자체를 온전하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청춘남녀의 사랑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삐걱거립니다. 클로이가 애인의 직장동료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식어가는 열정을 다시 지피려고 발버둥을 치는 가운데 이미 호로록 날아가버린 파랑새를 향해 계속 손을 뻗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마음이 떠나버린 연인에게서 우리가 바라는 건 과연 뭘까요? 지독한 자기애? 보통은 이걸 가리켜서 ‘예수 콤플렉스’라고까지 설명합니다.

예수가 그처럼 착하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이건만 ‘동시에’ 배반당한 인물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예수를 그토록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그·그녀를 사랑했건만 그·그녀는 이렇게 맹목적인 나를 배신하고 떠나버렸다는 그 비애감, 이런 감정은 자신을 너무나도 특별하게 만들어갑니다. 이런 순수한 사랑의 화신인(예수와도 같은) 나를 배신했다? 그런 그·그녀는 결국 인격적으로 몰가치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결론이 내려집니다.

사랑에 배신당해 자살하려고 하지만 수면제인줄 알고 다량으로 삼킨 약이 발포비타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밤새 노란 거품만 토해낸 ‘나’. 결국 되살아나고 쓰라린 자기모멸감에 시달립니다.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사랑을 하지 않을 테야! 유행가 가사처럼 이런 결심도 하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그럴까요? 사랑이 야속한 것은 그런 떨리는 순간이 부지불식간에 또다시 찾아오고, 우리는 마치 처음 당하는 사람처럼 이런 부조리한 감정의 파도타기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속절없이 무장해제당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마주치는 자아, 이게 바로 사랑이라고 스물다섯 살 청년 철학자가 말합니다. 동의하시나요?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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