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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임희웅 전 포교사단장

“미래는 현재의 결과…행복하려면 지금 씨앗 심어야죠”

▲ 임희웅 포교사는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지금뿐이다. 지금 행복의 씨앗을 심어야 내일이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스님들이 공부하는데 교훈으로 삼을 만한 옛 스님들의 글을 모아 엮은 ‘치문경훈(緇門警訓)’에는 불자가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덕목이 나온다. 부처님께 절하는 것[禮佛]을 비롯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念佛], 계를 지키는 것[持戒], 경전을 보는 것[看經], 선을 닦는 것[坐禪], 선을 참구하는 것[參禪], 깨달음을 얻는 것[得悟], 법을 말하는 것[說法]이다. 이는 부처님의 덕을 공경하고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 이치를 밝히고 부처님 마음을 받아 지니면서 그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밑바닥까지 추락 후 만난 불법
인과연기법 통해 고통원인 발견
포교사 품수 후 전법의 길 매진
오늘 최선 다해야 내일이 행복

승속을 떠나 부처님 제자 되기를 서원한 불자라면 당연히 따라야 할 말씀이지만, 부끄럽게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더욱이 속세에서 살아가는 재가불자들이라면 이 여덟 가지 당부를 온전히 실행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야 항상 부처님과 그 가르침으로 향해 있지만 행(行)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신해행증(信解行證)을 구족해 갈 것이다. 그는 항상 당당할 것이며 주위를 맑고 향기롭게 변화시킬 것이다. 또한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사람들은 일심으로 신뢰하고 존경하며 함께 수행하고 정진하고자 할 것이다.

정혜 임희웅(82) 포교사는 부처님과 옛 스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불자로 이름나 있다. 지인들은 그가 출가수행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실제 그의 하루는 철저한 수행자의 일상이다. 부처님께 절하고 감사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참선수행으로 아침 해를 맞이한다. 경전을 보고, 법을 전하고, 자비와 나눔을 실천하는 일들은 들숨과 날숨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어지는 일상사다. 여기에 포교사단과 사단법인 좋은인연, 조계종디지털대학 등 공부와 포교 인연을 맺은 곳까지 살뜰히 챙기니 하루 24시간이 빠듯하다. 항상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유이다.

출가자처럼 머리를 깎은 지도 20년 가까이 됐다. 항상 삭발한 모습이니 법복만 입으면 영락없는 스님이다. 조계종 전 포교원장 혜총 스님은 여기에 ‘감동’이라는 표현을 더했다. “부처님 마음으로 살아가는 분”이기 때문이란다. 스님은 “임 포교사의 자비심과 보현행을 지켜보노라면 감동스러운 마음마저 생긴다”며 “불자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임 포교사는 승속을 떠나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포교사단의 역사를 함께 연 권대자 포교사는 그를 ‘선장’이라고 했다. 포교사단이 법륜을 홍포하는 포교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그의 원력이 지대했기 때문이란다. “5000여 포교사들을 ‘포교사단’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내고 험난한 전법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순항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이가 바로 임희웅 포교사입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법을 전하는 일이라면 항상 앞장서 달려가시는 분입니다.”

‘클레멘스’. 그의 세례명이었다. 이생은 물론 전생까지도 부처님 제자였을 것 같은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1934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혼란했던 해방기,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그의 삶은 언제나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22살 되던 1956년 해병학교 23기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한 것이다. 무섭도록 단단하고 억척스러울 만큼 매사 열심인 그는 이내 상관들의 눈에 들었다. 촉망받는 군인으로 승승장구했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그에게 종교는 성공을 위한 하나의 발판이었다. 전역 후 입사한 금성방직(쌍용양해 전신)에서도 8년 만에 부장으로 진급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탄탄대로를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 같았었죠.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고, 가는 곳 어디라도 환영 받았으니까요. 그럴수록 성공에 대한 욕망은 커져갔습니다. 당시는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확신했죠. 그 욕심이 스스로를 겨눈 칼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껏 마음먹은 대로 됐으니 사업도 금세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1973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로 국가경제가 바닥을 치면서 한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 내 탓이 아니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반전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가세는 기울었고, 이내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그의 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주변을 맴돌던 그 많던 사람들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평생을 쏟아 부어 모아온 것들을 한순간 몽땅 날리고 나니 화가 났다. ‘이렇게 살아 뭐하나’하는 못된 생각마저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렇다고 죽을 용기도 없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또 화가 났다.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슬픔과 절망, 분노의 연속이었다. 당시 쫓기듯 도망쳐 마련한 집은 수도시설도 없는 열악한 곳이었다. ‘마실 물 떠오겠다’는 핑계 삼아 근처 산에 자주 올랐다. 벌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족들에게 쏟아내는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며칠 물통을 들고 산을 오르다보니 인사하는 분들이 생기더군요. 그리고 운명 같은 인연들을 만났습니다. 어느 날 어르신 한 분이 ‘젊은 사람이 무슨 고민을 그렇게 짊어지고 다니느냐’면서 ‘그냥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그 말에 또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내려놓는 방법 좀 알려 달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생각을 멈추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충고가 돌아왔죠. 그러면서 지금 내려놓으려 가는 길인데 함께 동행하지 않겠냐는 거예요. 그렇게 어르신들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이 현충원 내에 있는 화장사였습니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함께 경전을 읽고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불교모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 앉게 됐지만 이상하게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아주 오랜 만남처럼 자연스러웠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듯 무척 편했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렇게 날뛰던 슬픔과 절망과 분노마저도 고요해졌다. 성당을 찾을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기실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물음이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면서 갖게 된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이었다. 한편으론 그 답을 구하고자 가톨릭 신자가 돼 세례까지 받았지만 유일신교 사상에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인과(因果)와 연기(緣起)를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의 머리와 가슴을 마구 흔들어 댔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과법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을 접한 후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되짚어보게 됐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형상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고 진실한 실재가 아니다’는 가르침에서 오랫동안 가져온 물음에 답을 찾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로 인해 발생한 것들을 밖에서 찾으려 했으니 구할 수 없었던 거였죠.”

불교공부를 해보겠다고 원을 세웠다. 불교대학이 흔치 않았던 시기인 1994년, 동산불교대학에 입학했다. 처음엔 벽처럼 느껴졌다. 막막할수록 부딪히고 더욱 파고들었다. ‘아무리 모르는 책도 백번을 읽으면 안다’라는 옛말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경전 한 구절 한 구절이 새롭게 와 닿았다. 구절구절이 마음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금강경’ ‘육조단경’ ‘유마경’ ‘화엄경’ ‘능엄경’ 등을 독파해 나갔다.

스승과 제자의 귀한 인연도 맺었다. 한국의 부루나존자로 불리며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 2013년 입적한 무진장 스님을 뵈었다. 임 포교사가 불교공부에 머물지 않고 전법을 발원하며 포교현장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무진장 스님의 삶을 존경해서다. 1996년 조계종 포교사 자격을 품수한 후 교도소, 군부대, 복지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파했으니 그 모든 과정이 무진장 스님의 포교원력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긴 보현행이다. 그 보현행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인과연기법을 믿으시나요? 전생이 궁금하면 현생을, 내생이 궁금하면 현생을 보라 했습니다. 인과와 연기 아닌 것 없습니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행복해지려면 지금 행복할 수 있는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일이 달라집니다. 네 탓이 아닌 내 탓입니다. 이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하루하루가 여여하고 행복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보아라. 그리하여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다만 하라. 참되고 곧은 관찰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법구경’ 속 부처님 말씀이다. 임희웅 포교사는 ‘포교’를 화두로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에 그는 부처님의 제자인 불자(佛子)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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