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9. 작자미상, ‘산월아미타도’

기자명 조정육

수행은 스스로 변하고자 함이니, 타인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작가미상, ‘산월(山越)아미타도’, 13세기 전반 카마쿠라(鎌倉)시대, 비단에 색, 138×118cm, 교토 젠린지(禪林寺) 소장.

“질문 있습니까?”

일본 천태종조 사이초 스님
기존 불교세력의 반발에도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 타파

구카이 스님과 교류했으나
신념의 차이로 끝내 결별

어제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아름다운 불교미술’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마쳤다. 별 문제없이 끝마쳤다.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특강이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고대불교조각대전’에 다녀오라는 숙제까지 내줄 정도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질문 있느냐는 질문은 특별히 질문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디서 강의하더라도 마지막에 으레 하는 인사말이었다. 질문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질문이 있으면 내 강의를 잘 들었다는 증거라 기분 좋고, 질문이 없으면 더 이상 목 아플 일 없어 기분 좋다. 큰 사고 없이 강의를 마쳤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청중석에서 손을 들었다. 중년 여성이었다. 마이크를 주자 그녀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강의 내용에서 조금 벗어난 상담 같은 질문이었다.

“저는 불자입니다. 절에 다닌 지는 오래 되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절에 가지 않고 집에서 혼자 기도하고 수행합니다. 절에 다녀보니 스님들이 돈 많은 사람만 좋아하고 돈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하더군요. 기분도 나쁘고 또 내가 그런 대접 받으려고 고생하면서 절에 왔나 싶어 그때부터 절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초파일 때도 아예 안갑니다. 혼자 수행하면 됐지 꼭 절에 가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일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538년에 백제 성왕이 경전을 보내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일본불교는 한반도에서 건너 간 승려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아스카(飛鳥,538~645), 하쿠오(白鳳,645~710), 덴뾰(天平,710~794)시대를 거치는 동안 일본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여러 천황들은 불교를 열렬히 믿었고 사원과 승려를 우대했다. 자연히 타락한 승려가 속출했고 권력을 쥔 승려들의 정치적 간섭도 심했다. 캄무(桓武)천황은 부패한 불교 도시 나라(奈良)를 버리고 신도시인 헤이안(平安,794~1185)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그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도시에 여러 불교사원을 조성했고, 중국과의 문화교류증진을 위해 견당(遣唐)유학생을 파견했다. 그 혜택의 수혜자가 사이초(最澄,767~822)와 구카이(空海,774~835)였다. 두 사람에 의해 일본불교는 한반도불교를 흉낸 것에서 벗어나 일본불교로 거듭났다.

사이초는 당나라에서 천태사상을 배우고 돌아와 히에이산(比叡山)에 엔랴쿠지(延曆寺)를 세워 천태종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일체중생은 부처 앞에서 동등하다’는 사상을 펼쳐 기득권을 가진 기존 불교세력에게 심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사이초 자신의 불굴의 신념으로 모든 어려움을 타파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배우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지 못한 밀교(密敎)에 대해 배우기 위해 7살 어린 구카이를 스승처럼 여기며 법을 구했다. 또한 교단의 주체성 회복과 자주성 확립을 위해 대승계단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노력으로 사후 7일 후에 계단독립이 칙허되었다. 사이초의 천태종은 그의 뜻을 계승한 엔닌(圓仁), 엔친(圓珍)에 의해 현저하게 밀교화되었지만 진언종과 함께 헤이안시대 말기까지 불교계의 양축을 이루었다.

구카이는 당나라에서 밀교인 진언종(眞言宗)을 배웠다. 장안에서 중국 진언종의 창시자 혜과(惠果)를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귀국 후 고야산(高野山)에 곤고부지(金剛峯寺)를 세워 진언종의 거점으로 삼았고, 천황으로부터 교토(京都)의 도지(東寺)를 하사받았다. 구카이가 전한 진언종은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면서 손으로는 수인을 맺고 마음은 삼매에 두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 현재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세속 사람들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비밀스러운 밀교의식을 행하는 기복신앙적인 요소도 겸했다. 그 결과 구카이의 진언종은 민중 사이에서 빠르게 전파되기 시작했고 그가 사망할 무렵 진언종은 가장 강력한 종파로 부상했다.

내가 죽을 때 아미타불이 나를 맞이하러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비스러운 부처님이 여러 보살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내려 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허우적거리는 내 손을 잡아준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부처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컴컴한 어둠속을 뚫고 간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저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염원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듯하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가 수없이 많이 그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교토 젠린지(禪林寺)에 소장된 ‘산월(山越)아미타도’는 보살을 거느린 아미타불이 산 너머에서 서서히 떠오르면서 상반신을 드러낸 그림이다. 아미타불은 마치 보름달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듯 두 산봉우리 너머에서 금빛 찬란한 모습을 나투신다. 절묘한 광배묘사다. 임종을 앞둔 왕생자(往生者)를 안심시키기 위함일까. 아미타불은 상품상생인(上品上生印)을 결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아미타불 앞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 배경으로 그린 산수화에서 꿈틀거리는 동세(動勢)가 느껴진다. 고대산수화에서는 농도가 다른 색을 중첩되게 그려 원근감을 표현했다. 두 보살 밑으로는 사천왕과 두 동자가 배치되어 있다. 부처에서 보살을 거쳐 동자에게 이르는 동안 인물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 그리는 고대 회화의 특징이다.

아미타불 앞에 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보처(補處)보살이다. 보처보살은 협시(脇侍)보살이라고도 부른다. 주불(主佛)의 뜻을 돕거나 전하는 역할을 하는데 주불에 따라 보살도 바뀐다. 석가모니불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보처보살이고, 약사불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보처보살이다. 아미타불의 보처보살은 어떤 역할을 할까.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과 지혜문이 있는데 자비문은 관세음보살이, 지혜문은 대세지보살이 드러낸다. 대세지보살은 그 지혜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삼도(三途:지옥, 아귀, 축생)를 여의고, 위없는 힘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大勢至)라 한다. 또 발을 디디면 삼천세계와 마군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대세지보살의 도상(圖像)은 정수리에 보배 병을 얹고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서서 합장으로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이한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를 근본서원으로 하는 보살로 아미타불의 왼쪽에 선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의 근기에 맞는 33가지 몸으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머리에 쓴 보관에는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고, 손에는 불사(不死)를 뜻하는 정병(淨甁)을 든다. 연꽃을 들 때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표시한다. 활짝 핀 연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이고, 오므린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산월아미타도’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왕생자가 극락정토에서 앉을 금색 연꽃대좌를 들고 있다. 이 그림은 엄격하게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인물배치가 어두운 녹색과 갈색, 흰색과 황금빛을 바탕으로 장엄하고 신비스럽다. 아마 임종을 앞둔 신도의 침상 옆에 걸렸을 것이다.

‘아미타내영도’는 아미타불이 정면을 향한 구도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오는 구도가 있다. 특히 후자는 중국과 고려불화의 ‘아미타내영도’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가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라 주목된다. 전자는 나라(奈良)국립박물관의 ‘아미타내영도’(14세기)가 압권이고 후자는 도쿄(東京)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아미타성중(聖衆)내영도’(14세기)가 대표적이다. ‘아미타내영도’는 아미타불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린 삼존불형식이 기본이다. ‘아미타성중내영도’는 아미타불이 여러 명의 성중을 거느린 형식이라 훨씬 복잡하고 다채롭다. 수많은 권속에 둘러싸인 아미타불의 백호에서 찬란한 빛이 뻗어 나와 단정히 합장하고 앉은 왕생자에게 가 닿는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은 축제처럼 환희스럽다.

일본에서 아미타불은 7~8세기경부터 지배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11세기에는 귀족사회를 휩쓴 중심신앙이 되었다. 귀족들이 지향한 아미타신앙은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려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세에서 누린 호화로운 삶을 다음 생에까지 연장시키려는 의도에서 출현했다. 이런 배경에서 여러 종류의 ‘아미타내영도’가 발달했다. 후지와라(藤原)시대라고도 부르는 헤이안시대 후기(894~1185)에는 가장 격조 높고 우아한 불화가 제작되었다. 와카야마(和歌山) 코야산(高野山)에 소장된 ‘아미타내영도’가 대표적이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주위에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奏樂飛天)들이 구름을 타고 날아오는 작품이다. 화려한 색채와 부드러운 율동미는 일본불화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마쿠라(鎌倉: 1185~1336)시대에 제작된 젠린지의 ‘산월아미타도’는 후지와라시대의 ‘아미타내영도’에서 느낄 수 있는 극락세계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아미타불 앞에 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역할이 빛나 보이는 작품이다. 교토국립박물관에도 같은 이름의 ‘산월아미타도’가 소장되어 있다. 형식은 젠린지의 작품과 비슷한데 아미타불의 상체가 공중에 더 많이 드러난 점이 특징이다. 또한 보처보살들이 모두 산 뒤에서 아미타불을 보좌하고 있어 젠린지의 보살들만큼 그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젠린지의 ‘산월아미타도’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은 사이초와 구카이 때문이다.

두 사람은 부처의 뜻을 중생에게 전한 보처보살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에 의해 천태사상과 밀교사상이 일본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각각 신념으로 삼은 교리가 다른 만큼 중생교화를 위한 포교방식도 달랐다. 처음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도움을 주었으나 신념의 차이로 끝내 결별했다. 제자 문제가 발단이 되었으나 그들의 종파와 성향이 다른 데서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끝까지 서로 협력하며 아름다운 결말을 맺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로 다투지 않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처럼. 그런 아쉬움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 한들 그들이 이룬 눈부신 업적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이 뿌린 씨앗이 싹이 트고 뿌리를 뻗어 이후의 일본불교가 거목으로 자랐기 때문이다.

강의실에서 나는 질문이라기에는 애매한 상담을 받고 한순간 난감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대답해야 할 범위를 벗어난 질문이었다. 그러나 기왕 질문을 받았으니 안할 수도 없었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2차대전 때였습니다. 한 의사가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매일 부상자를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심한 회의에 빠졌습니다. 치료해서 회복되기가 무섭게 다시 전투에 투입되는 병사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그들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기 위해 치료하는 것 같았습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를 적군이라 해서 외면할 때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자신은 의사인데 환자를 치료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치료한다면 어느 선까지 해야 할까. 몇 날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의사는 문득 결론을 얻었습니다. 자신은 의사니까 의사의 본분에 충실하겠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자신은 오로지 치료만 할 뿐 그 나머지는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스님 중에는 훌륭한 분도 있고 실망스러운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님을 보고 불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처님 법에 따라 살기 위해 불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스님이 누구든 어떤 행동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수행은 자신이 변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타인을 심판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본분에 충실하면 그만입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