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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내일 아침이면 익숙한 공간서 떠나려는 자의 하룻밤 독백[끝]

기자명 이미령

하니프 쿠레이시 장편소설 ‘친밀감’ / 이옥진 옮김 / 민음사

하니프 쿠레이시 장편소설 ‘친밀감’
이옥진 옮김
민음사
“슬픈 밤이다. 나는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하니프 쿠레이시의 소설 ‘친밀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열정 사라진 상대와
한 공간서 사는 무감각 상태

아이들 크는 재미로 사는 것이
인생이란 상식에 실망한 주인
감정에 솔직하려고 떠날 결심
동감 어려워 읽는 내내 거북

익숙한 관계  깨버리는 독백이
진리 찾아 떠난 수행자와 겹쳐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한 집안의 가장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인 40대 제이. 그에게는 두 아들의 엄마인, 6년을 함께 살아온 파트너 수전이 있습니다. 정식 부부관계가 아닌 만큼 이들은 자유로운 연애를 했습니다. 한 집에서 두 아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각자 다른 이성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가정에 충실했고 어린 두 아들을 사랑으로 길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이는 이런 평온에서 탈피하려고 합니다. 습관처럼 수전과 살아왔을 뿐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책 제목 ‘친밀감’의 원제는 ‘Intima cy’입니다. 사랑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되지만, 그보다 더 밀접한 어떤 감정입니다. 역자는 이 단어를 친밀감이라고 애써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육체적 친밀함의 뜻을 내포하며, ‘성교’나 ‘정사’를 완곡하게 가리키기도 한다”라는 설명을 ‘옮긴이의 말’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소설 속에서 “타인의 몸에 손을 얹거나 입술을 얹는다는 건, 그 자체로 깊은 개입”이요, 이런 행위야말로 “하나의 인생을 통째로 열어보는” 것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참 중요한 감정인 사랑에는 육체 행위가 따라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살다보면 어느 사이 상대방의 성적 매력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애초에 불타는 듯한 열정은 사그라진 지 오래고, 밋밋하고 무감각해진 상태로 한 공간에 그냥 함께 살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렇게 되어버린 상태를 오히려 정상이라 여깁니다. 사랑 없이, 상대방에 대한 열정과 관심도 없고, 호기심도 없고, 설렘도 없고, 수줍음도 없고, 이끌림도 없어진 상태가 보통 부부관계며, 그냥저냥 아이들 크는 재미로 지내다 한 세상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제이는 자신과 수전의 관계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에 실망합니다. 그리고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그저 한평생을 버텨오다 지독한 자괴감에 빠져버린 자신의 부모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제이는 이런 삶을 부수려고 합니다. 물론 그가 망설이지 않는 건 아닙니다.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사랑스런 두 아들이 친아빠의 온기를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집을 떠나려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제이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내일 아침, 해가 밝고 수전이 자전거를 타고 직장으로 출근하면 자신은 작은 손가방을 들고 이 익숙한 가정을 떠나게 됩니다.

제이는 밤새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수전과 살아온 6년을 돌아보고, 이혼에 성공했거나, 이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아이들을 기르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땀을 뺐던 일과, 어느 사이 육아에 익숙해져서 아이들과 한 덩어리가 된 자신을 떠올립니다. 하니프 쿠레이시의 소설 ‘친밀감’은 이처럼 한 사내의 하룻밤의 독백입니다.

쾌락의 절정을 안겨주는, 그야말로 친밀감의 최고 상태를 맛보게 해주는 연인 니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소설 전반에 펼쳐질 때면, 사실 거부감이 일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랑이건 만남이 지속이 되고, 일상화되면 그 반짝이는 연애감정이 변색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게 빤한데 다른 연인을 찾아 두 아이를 함께 낳은 여인을 버린다는 주인공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입니다. 제이가 수전과 6년 동안 함께 산 것은 그냥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이는 그걸 이제 와서 거부하려는 것입니다. 수전과의 만남이 이렇게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함께 제이는 늦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겠노라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곤히 잠든 수전과 두 아들 주변을 밤새 서성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결심을 다잡고 또 다잡는 중입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당연한 것에서의 벗어남.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미 익숙해지고 정상궤도에 오른 일상을 파기해버리고 튕겨져 나간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게 두려워 살던 대로 삽니다. 자신 하나만 생각을 고쳐먹으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흘러갈 텐데, 무슨 대단한 신세계라도 발견하겠다는 양 뛰쳐나가면 주변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초의 원인제공자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수전은 잠을 자다가 불길한 꿈을 꿨다며 깨어납니다.

“떠나지 않을 거지?”

이렇게 묻기까지 합니다. 떠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주며 그는 수전을 침대로 인도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떠나려 합니다. 이미 이런 일은 숱하게 반복했고, 또다시 되풀이하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소설은 ‘친밀감을 안겨주는 진짜 사랑’을 찾아서 익숙한 관계를 깨버리려는 한 사내의 솔직한 독백을 다루고 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제이의 모습에서 진리를 찾아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비쳐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랜 수행의 시간을 거쳐 반듯하고 엄숙한 위의를 내보이는 수행자겠지만, 이분들도 나름대로 제이의 하룻밤 독백 같은 시간이 있었겠지요.

주저앉으면 그만인 것을….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냥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뭐 그리 잘났다고 독불장군처럼 튕겨져 다른 삶을 살려는 것인가….

중생구제한다면서 정작 제 가족은 나 몰라라 팽개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솔직한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냐, 그 선택 뒤에 따라올 숱한 후회와 질책도 감수할 것이냐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제이는 밤새 홀로 웅얼거린 뒤 다음 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섭니다.

“지쳤지만 단호하게 바깥으로 걸음을 뗀다. 몇 주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다. 꽃이 피어 있다. 런던은 한창때다. 많은 일을 겪었지만, 내게도 뭔가가 피어난다. 떠나기에 환상적인 날이다.”

떠난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말입니다. 하지만 평생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실제로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 ‘이미령의 보리살타 서재’가 2년을 채우고, 이제 마지막 원고를 신문사에 보낼 때가 되었습니다.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때가 생각납니다. 문학작품 속의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춰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문학작품 속의 인물들은 죄다 허구입니다. 작가가 자기 맘대로 창조해낸 인물들인데 거기서 뭘 논한다는 게 ‘뻘짓’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따금 작품 속 주인공과 싸우려드는 독자를 볼 때도 있습니다. 주인공의 처사가 독자인 자기 맘에 맞지 않고, 이건 윤리적으로 도대체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런 독서행위를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책을 읽으면 독서를 통해 마음이 흔들리거나 가슴이 열리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내 몸과 마음의 주인공으로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늘 이 속에 꽉 채우며 살고 있던 ‘나’를 잠시 내보내고 책 속의 주인공을 맞아들이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던 생각이나 행위를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에는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빙의(憑依)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나 아닌 다른 존재로 살면서 책 속 여러 인물들과 만나고 여러 사건들을 당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심지어는 지독하게 비도덕적, 비윤리적인 행위까지도 감행해보는 것이지요, 책을 읽는 동안에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은 뒤 휴~ 하는 한숨과 함께 내 속에 들어와 있던 작품 속 주인공을 내보냅니다.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와서 책 속의 일들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 내게는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곰곰 짚어보고 따져보는 일, 이것이 책읽기의 본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연재가 끝나고도 저의 책읽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시력이 허락할 때까지 이어지겠지요. 아르헨티나의 작가이자 시인인 보르헤스는 책을 너무 읽어 시력을 잃었고, 그러고도 사람들을 고용해서 자신을 위해 옆에서 책을 읽게 했다고 하지요. 그 기막힌 행운의 알바생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이 시대 최고의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입니다.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관계도 맺어줍니다.

책은 이따금 지독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땅을 짚고 일어서는 지팡이가 되어 줍니다. 그리고 책은 독자들이 다음 책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에서 다음 책으로, 그 책에서 또 다른 책으로, 노둣돌을 건너듯 그렇게 한 걸음씩 옮겨가다보면 어느 덧 저편 언덕에 도달하게 되겠지요.

책이 없는 곳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어느 때는 이런 발칙한 생각까지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극락에 책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 극락 가는 것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그 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책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넌 뒤 건네준 뗏목을 기꺼이 버리듯이 말입니다. 보리살타의 서재는 버려진 뗏목과 타고 갈 뗏목이 꽉 차 있는 나루터입니다. 그 나루터에서 2년 동안 행복했습니다. 당신도 그러셨기를 바랍니다. 인상적인 그림으로 2년을 함께 지내주신 강병호 그림쟁이님에게도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1323호 / 2015년 12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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