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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불타기념관 건립까지의 여정

“문화사막인 대만 남부에 무료 문화예술전시가 잘못인가요”

▲ 웅장하고도 장엄한 대만 불광산과 불타기념관 전경. 대만 불광산 제공

“수 많은 문화예술품들은 물론 신도들이 기증한 것도 있지만 대다수가 불광산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불광산의 욕심일까요? 아니면 희사일까요?”

우리 사회에는 돈 많은 ‘가난한 사람’도 많고 검박하게 사는 ‘부자’도 많이 있습니다. 중국인은 도덕적 인격 추구가 사람의 도리라고 강조하면서 일반적으로 돈이 많고 적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도덕을 군자의 근본으로 합니다.

부처님의 큰 제자 가섭존자는 산속동굴이나 나무아래에 거주하면서 하루 한 끼만 먹었어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고 법희와 선열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공자님의 학생 안회(顔回)는 ‘좁은 골목에 살면서 대나무그릇에 밥을 담아먹고 표주박으로 물을 마셨는데 남들은 그 어려움을 힘들어했지만 안회는 여전히 즐겁게 살았다(거루항居陋巷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飲 인불감기우人不堪其憂 회야불개기악回也不改其樂)’고 하고 근간의 천주교 테레사 수녀 역시 어렵게 사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돈이 있든 없든 개인적인 생활태도이고 생활에 대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수많은 성현들과 저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 역시 ‘쌓아두기를 좋아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모으기도 좋아하지 않아서 무엇이든지 남들과 나누려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스무 살에 강소성(江蘇省, 중국 동부에 위치한 성)에 있는 초산(焦山)불학원을 떠날 당시, 저는 근 10년의 출가생활에서 쓰고 있던 낡아빠진 물건 몇 가지가 비록 몇 푼 가치는 안 되지만 그 당시의 저에게는 출가 이후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불학원을 떠나면서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을 동기들에게 주겠습니다. 누구든 좋아하는 것을 가져가세요’라고 단지 두 마디 말만 남겼는데 이부자리, 베개, 모기장, 서적 등이었습니다. 저는 몸에 입은 두루마기뿐이고 차비도 없었지만 진강(鎭江)으로 가서 은사이신 지개 스님을 만나기로 했었고 스승께서는 종찰 대각사로 저를 데려가서 역대 조사 스님들께 예를 올리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나눔을 계기로 저는 인생에서 또 다른 세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의흥(宜興)에서 2년 동안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수입이 꽤 많았고 남경에 있는 절에서 약 1년간 절을 돌보고 주지를 살면서 약간의 저축과 의복과 생활용품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중국대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장삼 등 출가자가 쓰는 물건은 화장사(華藏寺) 대중 누구든 가져가고 냄비 그릇 등 생활용품은 피난 나와 있는 형이나 동생이 쓰도록 주세요’라며 저는 단지 두 마디 말만 남겼습니다. 빈손으로 떠나려던 저는 은사 스님께서 주신 은화 12원을 의지하여 앞날을 알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태평륜 선박침몰사고가 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 역시 배를 타고 대만에 도착했습니다.

의란염불회를 이끌고 있을 때 청년들과 학생들이 저를 따라서 근처 마을로 포교를 다녔는데 기차표가 비싸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왕복차비를 마련해야 했고 청년과 학생들 몇 명의 학비와 잡비, 생활비도 도와주었습니다. 저를 위한 금전적인 걱정은 하지 않았어도 학생들 걱정은 항시 끊길 날이 없었습니다. 이런 걱정거리도 인생에 있어서는 또 다른 ‘하나의 즐거움’이 됩니다.

처음 불광산을 창건할 때, 많은 고아들이 모여들었는데 50년이 지나면서 700~800명 정도가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일으켰습니다. 총림학원에서 한때는 7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였는데 그들이 먹는 것, 옷가지와 이부자리, 의료, 잡비 등을 제공해 주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50년전 소녀 몇 명이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스타킹을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고 화장품을 발라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외국에 나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다 주어서 소녀들의 소망을 만족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세관직원들이 가방 검사를 하면서 ‘스님이 이런 물건들을 사 들고다니네요’라면서 비웃었는데 사람이 남들로부터 이해 받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불광산이 곳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곳곳에서 불광회를 만들고 곳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이동도서관과 이동병원 등 공공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히 저의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지도자로서 ‘갖지 않고’ ‘공(空)을 즐거움으로 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 신도들도 저의 이런 성격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기꺼이 보시하고 동참하면서 불광산이 성취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전 세계에서 불교사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현재 불광산의 모든 것이 신도들 잘못이라는 것입니까? 아니면 빈승의 잘못이라는 것입니까? 이 사회에 종교 건축물이 너무 많습니까? 우리 공양처에는 신도든 관광객이든 우리들과 같이 공양을 하면 보시금을 넣는 곳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사찰의 풍토가 나쁘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도 탓을 하는 것입니까?

불타기념관을 짓는데 드는 그 막대한 비용을 어찌 한 사찰에서 부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공장을 경영하지도 회사를 운영하지도 않으니 당연히 신심을 내는 호법신도들에 의지해서 땅을 사고 건축했습니다. 1000군데 사찰과 100만명의 인사들이 함께 이루어 낸 불타기념관은 현재 대만 남부에서 가장 호평 받는 관광 참배의 명승지가 되었는데 입장료도 없고 주차비도 받지 않습니다. 날마다 300여명의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매일 수만 명의 관람객을 위해서 안내하고 설명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발심하는 호법 신도들이 잘못됐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수많은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다 나쁘다는 것입니까? 혹은 빈승의 잘못이라는 것입니까?

불타기념관의 본관, 불광루, 불광대불은 일찌기 사용승인을 정식으로 받았지만 사회 소수 사람들이 줄곧 기념관 출입구와 패루(牌樓)가 건축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불타기념관의 장식물로서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현재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단지 경사지 개간에 따른 행정절차에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몰려드는 신도와 참배객들을 막아야 할까요? 아니면 개방해야 할까요? 감사하게도 까오슝시청의 주관부서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우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서둘러 허가증을 내주었습니다. 우리도 특권을 누리려 하지 않으나 단지 시간상으로 조금 늦었던 것입니다. 명예나 이권을 추구하지 않는데 우리에게 그렇게 큰 죄가 있다는 것입니까?

불타기념관이 개방되니 날마다 관광버스가 100대 이상 자동차는 1000대 이상이 몰려오게 되어서 주차문제는 우리 민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빈승은 이렇게 많은 차량들이 나라에 세금을 내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그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주차공간을 마련해주어야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꿎은 불광산에서는 할 수 없이 임시로 인근 주민들에게 토지를 빌려 주차장으로 만들어 무료 주차하도록 했습니다. 평으로 계산하면 한 평을 빌리는데 일 년에 4만원이 넘게 듭니다. 양심이 있는 신도나 관람객이라면 불타기념관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 사람들이 도서전시회는 대도시에서 거행한다고 다들 알고 있고 일부 출판계 인사들은 남부는 ‘문화사막’이라고 여겨 오려고 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남부의 지식수준을 끌어올리고 까오슝시 진국(陳菊)시장의 지역도서관 설립 정책과도 보조를 맞추고자 외딴 곳에 위치한 불타기념관에서 국제도서전시회를 여러 번 거행하였는데 많은 호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도서전시회에 참가한 모든 출판사에 감사를 표하고자 우리는 대만 돈 400만원씩을 더해 드렸습니다. 빈승은 무슨 칭찬이나 표창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화에 대한 열정을 다소나마 전달하여 지식의 전파가 증가해 나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외에도 대만예술가의 각종 작품전시회와 명화원(明華園)의 가자희(歌仔戲 : 현재 대만 민간에서 가장 유행하는 전통희극의 하나이자 대표성을 갖춘 전통공연예술. 역자 주), 유가창(劉家昌) 자선공연 및 중국대륙 문화부에서 매년 제공하는 진귀한 보물전시, 산동과 하남, 상해의 서커스공연, 사천 변검(變臉), 절강 무극단(婺劇團), 천주(泉州) 전통인형극(布袋戲) 등을 누구나 무료로 관람하도록 하였는데 항상 대만원을 이루었습니다. 비용을 전혀 받지 않는 상황에서 불광산이 어떻게 해야 좋겠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불타기념관 안에는 지궁(地宮)이 48곳이 있는데 한 지궁마다 1000~2000 건의 문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100년마다 한 지궁씩 열게 됩니다. 300년, 500년, 4000년, 5000년 이후에는 오늘날의 문물들을 미래 자손들이 보게 되고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물건들은 물론 신도들이 기증한 것도 있지만 대다수가 불광산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불광산의 욕심일까요? 아니면 희사일까요? 현재 불광산에서는 5년간 소장해온 문물들을 영상기록으로 남겼는데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다면 방영하여 모두가 관람하거나 참고로 하고 이해하게 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일에 약간의 성과가 있게 되자 “불타기념관에 들어서면 바로 기념품 판매대와 호텔에서 운영하는 채식식당과 세븐일레븐 등 편의점과 스타벅스 등 가게들이 있어서 상업적인 분위기가 너무 심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만약 관람객이나 신도들이 먹고 마시거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없는 곳에서 피곤하고 목마르고 배가 고프거나 선물을 좀 사고 싶을 때 등 경우에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빈승은 기념관 옆에 있는 공간에 배낭여행객들이 하루 반나절을 조용히 앉았다가 갈 수 있는 참선용 동굴을 몇 군데 만들어서 인생의 여정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자락 빗물과 토양유실방지를 위해 지지부진 시작을 못하고 있는데 이는 청년들의 손실입니까? 아니면 불광산의 잘못입니까? 우리들의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해결방법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재 불타기념관에는 원숭이 무리가 살고 있고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철새와 청둥오리가 쌍각루(雙閣樓)에서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불광산에 살고 있는 새의 종류가 100가지가 넘게 관찰되고 있다고 하는데 나비는 춤을 추고 벌들은 꽃 사이를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매년의 불꽃놀이 축제를 수십만 명이 함께 즐기고 있으며 매해 연초의 등불축제는 많은 가정에 따스함과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 불광산에서 지출하는 비용이 어디 40억원 뿐이겠습니까? 불광산 살림을 총괄하는 혜전(慧傳) 스님과 불타기념관 관장 여상(如常) 스님 및 몇명의 부관장은 매번 이야기를 나누면서 근심어린 얼굴로 지출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대만사회에 색채를 더하고 사회와 민심을 더욱 아름답게 하려는 마음일 뿐입니다.

가난은 자랑이 아닙니다. 저는 쌓아두지 않고 개인적인 축재도 하지 않습니다. 저의 일생은 마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기도 하고 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한마디 말로 ‘빈궁하다’고 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32호 / 2016년 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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