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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해동불교의 종조는 태고 보우스님이다”

기자명 김택근

▲ 태고보우 국사가 오랫동안 상주하며 법을 설했던 1902년의 북한산 중흥사 전경. 중흥사 제공.

“본 종은 신라 도의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 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

1976년 7월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했다. 백일법문을 하면서 자신의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니고 선가의 본분을 버린 이론과 언설이라 했건만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문자를 동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답답하여 붓을 들었는가. 성철이 보기에 법을 잇고 등불을 전하는 사법전등(嗣法傳燈)에 삿된 것이 스며들어 한국불교의 법계가 뒤죽박죽이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승려와 학자가 주동이 되어 조계종 종조를 갑자기 태고에서 보조로 바꿨다. 납득할만한 근거가 없었다. 성철은 이러한 뒤틀림이 곧 바로잡힐 줄 알았다. 문중에 어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종정이던 만암 스님은 종조 바꿔치기를 크게 꾸짖으며 조계종 종정직을 내던졌다. 1955년 8월이었다. 조사들의 행적에 밝았던 만암은 거의 800년 동안 모셔온 종조가 바뀌자 크게 낙담했다.

“종조를 바꿈은 환부역조(換父易祖)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고 어른의 노여움에도 종단은 끄떡없었다. 종단을 움직이는 세력은 따로 있었다. 결국 만암은 백양사로 돌아갔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도 조계종 내부에서는 별 일 없이 10여년이 지났다. 그러자 선승 성철이 나섰다. 문자에 의존해서라도 법맥을 제대로 알리고 법통을 바르게 잇고자 했다. 그 책이 바로 ‘한국불교의 법맥’이었다.

한국 승려들은 임제와 태고의 법손이며 이는 결코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법맥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종봉영당기(鍾峯影堂記)’와 ‘서산행적초(西山行蹟草)’를 바탕으로 성철은 ‘임제태고종통(臨濟太古宗統)’을 세웠다.

임제……석옥(石屋)-태고(太古)-환암(幻菴)-구곡(龜谷)-벽계(碧溪)-벽송(碧松)-부용(浮蓉)

그리고 부용은 서산(西山: 청허)과 부휴(浮休)라는 걸출한 제자를 두었고 서산은 다시 사명(四溟)과 편양(鞭羊)을 두었다. 따라서 서산과 부휴는 임제를 바로 전한 태고의 법손이라는 것이다. 고승대덕의 비문과 행록(行錄) 등에도 태고종통임을 밝히고 있으니 성철이 전거로 든 것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휴정비(休靜碑), 대흥사 청허비(淸虛碑), 완주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 부휴비(浮休碑), 벽암비(碧巖碑), 선가귀감(禪家龜鑑), 사명집(四溟集), 남원 승연사기(勝蓮寺記), 대은암기(大隱菴記), 경헌비(敬軒碑), 취운비(翠雲碑), 허백비(虛白碑), 춘파비(春坡碑) 조계산 송광사사적비(松廣寺寺蹟碑), 백암비(栢菴碑), 벽송집(碧松集), 풍담비(楓潭碑), 월담비(月潭碑), 월저비(月渚碑), 화월비(華月碑), 허정비(虛靜碑), 연담비(蓮潭碑).

그럼에도 성철이 보기에는 거짓으로 지어낸 주장들이 난무했다. 불교학자 이불화는 ‘임제보조종통(臨濟普照宗統)’을 주장했다. 즉 태고 대신 보조를 종통으로 내세웠다. 성철은 이불화의 주장이 허구임을 여러 각도에서 파헤쳤다. 그중 염향사법(拈香嗣法: 개당 설법을 할 때 법 스승에게 향을 사르고 대중 앞에서 법통을 선언하는 것)을 내세워 보조가 대혜의 법을 이었다는 이불화의 주장이 허설임을 밝혔다. 문헌상으로 보조는 경산 대혜 스님에게 염향사법한 일이 없었다. 또 스스로 대혜의 법제자라 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불화는 보조가 대혜에게 염향사법했으므로 대혜의 법제자라고 우겼다. 후세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에도 보조는 스승 없이 오직 도만을 따랐고 불도징, 구마라습, 배도, 지공 등과 같은 무리라고 새겨져 있다. 즉 ‘단경’으로 스승을 삼고 ‘서장’으로 벗을 삼았다는 학자 목은(牧隱)의 평가대로 보조는 사법사(嗣法師)가 없었다. 이에 성철은 이불화에게 호통을 쳤다.

“이처럼 보조 자신은 물론 그의 법손들이나 뒷날의 역사가들도 보조를 두고 대혜의 법제자라고 일컬은 이는 한 사람도 없는데, 8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이불화씨가 허설을 거짓 조작하여 보조를 대혜의 법사로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그 이론은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자로서의 자살행위를 면치 못할 것이다.”

또 환속한 불교학자 이종익은 ‘법신종신설(法身宗承說)’을 주장했는데 이는 ‘보조가 단경과 대혜어록을 읽다가 조계(曹溪)와 대혜(大慧)의 심법(心法)을 발견하고 그 마음을 전했으니, 보조가 육신조계와 육신대혜를 사승한 것이 아니라, 법신의 심법(心法)을 스승으로 하여 종승(宗承)한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심전심이란 굳이 만나서 전법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마음으로 전해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불조의 혜명을 잇는 인가와 전법은 문중의 생명선인데 이를 부정했다. 이심전심이 꼭 만나서 전하는, 즉 면수구전(面授口傳)할 필요가 있냐며 “한 교조가 한 종조가 되는 것은 독창적이고 혁명적이다”고 주장했다. 이에 성철은 다시 일갈했다.

“이종익씨는 궁여지책으로 법신상속설(法身相續說)을 주장하지만 이는 천고미문의 법을 파괴한 논설이다. 법신은 일체에 변만(遍滿)하여 개개가 평등구족함으로 어느 특정 법신을 사승(師承)한다는 것은 불법상으로 절대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망론은 외도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왜 조계종단의 주류는 보조 띄우기에 열을 올리고 성철은 보조종통설에 주장자를 치켜들었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에서 활짝 핀 선사상이 한반도에서도 화엄종의 기세를 누르고 불교의 중심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지만 조선조 말에 이르러서는 선종 하나로 통일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 한국불교는 돌연 1954년 불교정화를 내세운 이승만의 유시가 발표되고 이후 승려들의 다툼이 일어났다. 불교계는 비구승의 조계종, 대처승의 태고종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태고종은 임제종의 적자인 태고 보우를 종조로 삼았고 태고의 홍가사(紅袈裟)를 선점했다. 조계종은 이에 맞서 보우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인 지눌을 새로운 종조로 내세웠다.

우리나라 선맥은 신라 도의국사에서 비롯되었다가 중간에 그 맥이 끊겼다. 그 후 고려 말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종의 법맥을 전해 받은 태고 보우가 다시 맥을 이었다. 그런 전통은 불교정화운동 전까지는 불교계가 통설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불교정화를 거치며 태고종이 보우를 선점하자 조계종이 지눌을 선택한 것이다. 일종의 차별화였다. 그러나 지눌은 유학승이 아니어서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 계승자가 될 수 없었다. 또 지눌은 깨친 후에도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설을 주창하여 보우의 돈오돈수설과는 달랐다. 이때부터 종조와 사상 논란은 시작되었다. 사실 종조와 돈점논란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처승들과의 대립각을 세우고 치열하게 영역다툼을 벌였기에 공론화 할 수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보조의 종조 추대를 민족문화독립운동이라 치켜세웠다. 종교가 아닌 민족을 끌어들인 것이다. 태고 보우가 중국에서 법을 이어오고 보조는 그 누구의 법도 이어받지 않음을 의식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성철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달마는 서천(西天)에서 동토(東土)로 법을 전하였으니 동토의 초조(初祖)가 되며, 태고는 중국에서 해동으로 등불을 전하였으니 해동의 종조가 된다. 그리고 종명(宗名)은 나말·여초로부터 선종을 조계아손(曹溪兒孫)으로 통칭하였으므로 ‘조계종’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제1조는 한국불교의 종조를 보조라 하고 있다.

“본 종은 신라 도의(道義) 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 보우 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公稱)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

성철은 도의국사는 가지산문이고, 보조는 사굴산문이니 법맥이 다르고 임제종의 종풍을 이어받은 종조는 보조가 아니라 태고 보우 국사여야 한다고 간곡하게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지눌 보조를 받드는 제단은 매우 높고 견고하다. 물론 성철 또한 보조가 한국불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함을 ‘한국불교의 법맥’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현재 한국불교가 태고법계임은 분명하다. 한편 사상적으로는 보조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교외별전이며 이심전심인 불법전승의 생명선을 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철에게는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준 득도사(得度師)는 있지만, 법을 이어준 사법사(嗣法師)가 없다. 성철은 선문의 철칙대로 오도 후 인가를 받으려 했다. 효봉, 만공 등 큰스님을 찾아다님도 나름 인가를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성철은 벼락같은 법거량을 기다렸지만 당시 선지식들은 주장자를 들지 않았다. 고승들과 성철 사이에 깨달음의 경계와 관련해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철은 결국 법 스승을 갖지 못했다. 불도징, 구마라습, 배도, 지공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보조 또한 그렇다.

보조도 성철도 법 스승이 없으니 사법전등의 계보에 오를 수 없다. 하지만 본인이 적손(嫡孫)이 아니더라도 계보는 바로 알려야 하지 않은가. 본인들은 모두 이를 인정하는데 후손들이 이를 비튼다면 그것이 큰일 아니겠는가. 1962년 3월에 제정된 조계종 종헌 제1조는 지금까지 한 자도 수정되지 않았다. 성철은 이렇게 고치라 말한다.

“본 종은 태고 보우국사를 종조로 한다.”

이에 이의가 있는 이들은 벌떼처럼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철의 논지를 반박해야 할 것이다. 성철이 책에서 밝힌 논거들을 차례로 부숴야 할 것이다. 성철이 이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보조의 사상이 뛰어나서, 단지 보조가 좋아서, 오로지 보조를 연구해서 보조종통설을 붙들고 있다면 또 다른 업을 짓는 일이 아니겠는가.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4호 / 2016년 3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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