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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돈오돈수

기자명 김택근

▲ 선방서 참선하다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한 소식했다” 하지만 대부분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성철 스님은 견성했으니 인가해 달라고 찾아오는 납자들마다에게 돈오돈수를 설파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깨친 이후 성철은 돈오돈수를 설파했다. 찾아오는 납자들마다에게 이를 강조했다. 당시 전국 선방에서는 견성 못한 승려가 드물 정도로 ‘성불견성’이 넘쳐났다.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한 소식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점검해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

교(敎)는 말로 말을 전하는 이언전언(以言傳言)이지만 선(禪)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선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달함이 근본이다. 흔히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선교일치를 무심하게 얘기한다. 하지만 성철은 이를 무심하게 넘기지 않았다. 예리하게 바라봤다.

선은 깨침[證]이요, 교는 이해[解]이니 그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이다. 조선불교의 최고봉이며 중흥조인 청허 스님도 선은 천자(天子), 교는 백 천 신하[百僚]에 비유하여 선과 교는 비유 자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살지만 그 밥맛을 팔만대장경 이상으로 기록하고 설명해 놓는다 해도 실제 밥맛은 거기 들어가 있지 않다. 하지만 밥 한 숟가락을 딱 떠먹으면 찰나 간에 그 밥맛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는 밥맛을 얘기하는 것이고 선은 밥 한 숟가락을 떠먹는 것이다. 그러니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진정한 깨달음도 선종에서는 단박 찰라[頓]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견성성불(見性成佛)법을 주장한다. 반면에 교문(敎門)에서는 층계를 올라가듯이 점차 공부하여 성불한다고 가르친다. 선종에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直指人心]’ 돈교문(頓敎門)만을 주장하고 점차문(漸次門)은 삿된 것으로 취급했다. 선종의 근본은 단박 깨침[頓悟]에 있기에 점차문은 육조 혜능대사의 조계정맥이 아니었다. 육조 스님은 ‘단경’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돈점논쟁은 7세기 중국불교에서 자못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렇다면 돈(頓)과 점(漸)은 왜 생겼는가. 육조 혜능은 본래 법에는 돈과 점이 없다고 했다. 단지 사람마다 근기가 달라 수승한 사람과 둔한 사람이 있기에 돈과 점이 생겼다는 것이다. 근기가 수승한 사람은 돈문(頓門)으로 들어가 도를 빨리 성취하고, 근기가 하열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점문(漸門)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점문은 방편가설이지 실법이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점문을 실법으로 알고 참다운 선이라 주장하면 삿된 종[邪宗]이라 했다.     

그리고 1000년이 훨씬 넘은 한국 불교계에서 다시 돈점논쟁이 불붙었다.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은 어떻게 이뤄지고 그 경계는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음과 깨달았지만 점차 더 닦아 성불에 이름. 돈오돈수 속에는 성철이 우람하고 돈오점수 속에는 지눌이 우뚝하다. 사실 돈오돈수라는 용어는 성철이 처음 사용했다.

“돈오돈수란 말은 성철 스님이 몸소 현토·편역한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법보단경’에는 한 번 등장한다. 이것이 비록 성철 스님이 지어낸 내용이 아님에도, 즉 중도 및 돈오돈수사상이 새로운 사상은 아니지만 이 사상들은 한국불교의 개혁자로서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알맞게 소개한 것을 미루어 보면 성철 스님의 창의성이나 개척정신을 알 수 있다.” (서명원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
서명원은 창의성이나 개척정신을 얘기하지만 사실은 성철이 돈오점수가 전통 선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방편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돈오점수가 선문의 정맥인 양 인식되고 성찰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반대 개념으로 돈오돈수를 부득이 일으켜 세운 것이라는 얘기다.

깨친 이후 성철은 돈오돈수를 설파했다. 찾아오는 납자들마다에게 이를 강조했다. 당시 전국 선방에서는 견성 못한 승려가 드물 정도로 ‘성불견성’이 넘쳐났다.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한 소식했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점검해보면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견성했으니 인가해 달라고 찾아오는 자들도 태반은 견성은커녕 몽중일여도 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견성은 대무심지(大無心地)인 오매일여를 넘어선 구경각이라 일러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스님, 스님의 견성은 하늘의 별처럼 까마득히 높습니다.”

성철이 보기에 통탄할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임제종맥을 이어받았다는 조계종은 깨달음의 경계를 잘못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지눌 보조 스님의 ‘수심결’ 영향이 컸다.  

깨친다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함을 말한다. 그것은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렇기에 ‘단박에 닦는다[頓修]’라고 한다.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음이다. 전체를 다 마쳤음이니 등각(等覺)을 넘어선 묘각(妙覺), 즉 구경각이다. 이는 경전과 경론, 그리고 선종 정안조사들의 말씀이 전하는 바다. 성철은 ‘능가경’ ‘대열반경’ ‘대승신기론’ ‘유가론’ ‘육조단경’ ‘종경록’ ‘원오록’ 등을 인용하여 돈오돈수의 참의미를 밝혔다.

돈오점수의 ‘돈오’는 곧 ‘해오(解悟)’이다. 해오란 얼음이 본래 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듯 중생이 본래 부처란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그러나 번뇌망상은 아직 그대로이다. 얼음이 본래 물이라 해도 얼음인 채로는 융통자재할 수 없다. 중생이 본래 부처란 것을 알았다 하여도 번뇌망상이 남아있는 해오는 생사에 자유자재한 증오(證悟)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6추를 비롯한 3세의 미망까지 완전히 끊어 일체를 해탈해야만 비로소 증오라 하기 때문이다. 

교가에서는 흔히 얼음이 본래 물인 줄 아는 해오를 두고 ‘돈오’라고들 한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얼음이 완전히 녹아 자유자재한 물이 되었을 때인 증오를 돈오라고 했다. 교가에서는 해오를 돈오라 하여 “깨달은 후에 3현 10성의 지위를 거치며 닦아나간다” 하고, 선가에서는 증오를 돈오라 하여 “10승 등각마저 넘어선 구경각이 깨달음이니 다시 배우고 닦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돈오’라는 용어는 같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런데 보조국사 지눌은 달마대사의 선풍을 이었다고 하면서도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수심결(修心訣)’에서 이렇게 이른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하여 깨친다.’(종상제성 막부선오후수 인수내증 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성인들은 누구나 먼저 깨치고 뒤에 닦아 구경각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깨친 뒤에도 오랫동안 망념이 일어나거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라는 것이다. 돈오점수사상은 보조 스님의 ‘수심결’ ‘결사문’에 근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입적하기 직전에 쓴 ‘절요(節要)’에서는 사상적 전환이 있었다. 돈오점수는 교종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은 아니라고 밝혔다.

보조는 ‘절요’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했던 하택과 규봉을 ‘지해를 주장하는 무리[知解宗徒]’라며 조계정맥(曹溪正脈)이 아니라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지해인 해오를 선양하고 있다. 그러나 사후에 발견된 ‘간화결의론’에서는 비로소 교외별전인 선종을 받들었다. 그러면서도 사후에 함께 발견된 ‘원돈성불론’에서는 여전히 해오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교종에서는 보조가 교와 함께 선을 주창했다고 찬양하고 있지만 성철의 평가는 냉정했다. 보조가 일생동안 선과 교를 혼동했고, 말년에도 끝내 지해의 병을 떨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보조에게 영향을 끼친 규봉은 어떤 스님인가. 그는 하택 스님의 법을 받아 선종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화엄종으로 들어간, 이른바 사선입교(捨禪入敎)의 승려였다. 규봉은 교가의 입장에서 선을 취급하다보니 선과 교를 혼동하여 돈오점수가 달마선이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성철은 수행고백을 기록한 규봉의 ‘도서(都序)’를 인용하여 그의 깨달음이 단지 해오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좋아하는 생각은 막기 어렵고 스스로 생각하고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닦아 생각 쉬기를 모두 10년을 했다. 그랬더니 창틈에 햇빛이 비치면 티끌먼지가 요란하듯, 맑은 물속에 그림자가 뚜렷이 비치듯, 미세한 습정이 기멸하면 고요한 지혜에 비춰지고 차별된 법의(法義)가 늘어서면 빈 마음에 드러났다.’

규봉은 정과 혜를 닦아 고요한 지혜가 조금 있긴 있으나 그 가운데 망상이 먼지 일어나듯 하니 마치 아침 해가 뜰 때 창문 틈으로 빛이 들어오면 거기에 먼지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듯 했다. 또 맑은 못에 그림자 모양이 환하게 밝으나 모든 차별법과 망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으니 그런 경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규봉은 이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 돈오돈수의 구경각에 이르지 못했다고 미루어 알 수 있다.

선문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마조 스님은 견성하고 돈오하면 병도 약도 다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규봉은 달랐다. 깨달았어도 교와 관, 정과 혜를 익혀야 한다고 했다. 마조는 구경각을 성취해 병이니 약이니 일체 필요 없는 분이었고, 규봉은 깨달았다고는 하나 자기가 병이 여전하니 약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철은 규봉의 눈이 어두워 마조를 바로 볼 수 없었을 것이라 여겼다. 규봉은 마조의 깨달음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짐작했음이니 그것이야말로 망상이라는 얘기였다. 

성철이 보기에 한국의 선방에서는 보조의 ‘수심결’을 보고 돈오점수를 따르고 있었다. 한 둘이 아니고 그런 승려가 선방마다 넘쳐났다. 흔히 참선하다가 기특한 소견이 생기면 “견성했다” “한 소식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 저 홀로 망상에 휩싸여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그릇된 견해와 망상은 자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지(宗旨)를 흐리고 정맥을 끊는 심각한 폐해였다. 

성철은 강원에서 해오를 선문이라고 주장한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를 가르치지 말아야 하며, 경허 스님이 편찬한 ‘선문촬요’에서도 ‘간화결의론’ 이외의 보조 저술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선문은 온갖 이론과 수행이 범벅이 되어 그 선지가 분명치 않으니 선의 근원인 육조를 정점으로 삼아 정리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따라서 육조의 정맥을 계승한 ‘돈오요문(頓悟要門)’ ‘전심법요(傳心法要)’ ‘완릉록(宛陵錄)’ ‘임제록(臨濟錄)’ ‘증도가(證道歌)’ 등의 가르침을 받들어 선문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일렀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5호 / 2016년 3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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