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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불광산과 ‘관(館)’의 묘한 인연-하

“조상의 유물들은 문화와 불법 홍포하는 마중물입니다”

▲ 불광산 불광대불과 팔탑(側拍佛光大佛與八塔)의 장엄한 모습. 대만 불광산 제공

“‘땅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재물이 있게 되고 재물이 있으면 대중을 위해 써야 한다’고 빈승은 말한 적 있습니다. 불광산은 50년 이래로 끊임없이 인파를 불러 모았고 점차적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불광산 교단을 상징하는 ‘승보(僧寶)’를 이루게 되었으며 ‘불보(佛寶)’를 대표하는 불타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불광산 개산 초기로 기억하는데요, 사찰건립비용 마련을 돕고자 자선경매를 할 수 있도록 친한 도반 광원(廣元) 스님이 왕운오, 마수화(馬壽華) 등 선생을 모셔서 당대 유명화가들로부터 300장의 작품을 기증 받았습니다. 빈승은 그렇게 많은 그림을 보고 팔기에 너무도 아까워서 도량은 천천히 짓더라도 글씨와 그림을 잘 보관해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나중에 불광대학교를 짓기 위해서 자선경매를 거행하기는 했었지만 불광산 불사 자선경매를 위해서 기증해 주신 장대천(張大千), 부심여(溥心畬), 황군벽(黃君璧), 제백석(齊白石) 등 많은 대가들의 작품은 지금도 불광산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전 세계에 있는 불광산의 모든 도량에 사람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작은 미술관을 갖추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빈승은 모든 사찰의 주지와 관리 담당자에게 도량을 갖추었으니 신도들이 끊임없이 찾아올 텐데 접대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만약 미술관이나 도서관이 있으면 말상대가 되어주지 못하더라도 시와 책자, 그림이나 글씨가 신도와 시간을 함께 해줄 것이니 너희는 그 시간을 절약해서 사중의 일을 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현재 타이베이 도량이 위치한 송산기차역(松山火車站) 바로 옆의 금싸라기 땅에 특별히 한 층을 비워서 미술관을 만들어 매월마다 유명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이래로, 진귀하고 보기 드문 예술작품을 얼마나 전시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의란(宜蘭) 난양별원(蘭陽別院), 가오슝 남병별원(南屛別院), 창화(彰化) 복산사(福山寺), 대남(台南) 남대별원(南台別院) 등에도 모두 미술관이 설립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해외에 있는 LA서래사(西來寺), 휴스턴 중미사(中美寺), 호주 남천사(南天寺), 뉴질랜드 불광산, 말레이시아 동선사(東禪寺), 홍콩 불광도량, 파리 법화선사(法華禪寺) 등 모두 다 중화문화와 불교와 상관이 있는 시와 책자, 글씨, 그림을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부 합해서 불광산도 미술관이 스무 군데가 넘게 있습니다.

빈승은 불교를 널리 알리는데 있어서 알아듣기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다고 할 수 없으며 불교문화예술을 위해서 역대의 수많은 선현들이 기여한 정신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화역사가 오늘에 전해지면서 우리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미국 시카고미술관 등에 가서 중화문화와 불교의 유물이 그곳에 많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국보가 남의 나라에 보존되어 있는 사실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중화유물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훼손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면서 이것도 불행 중 천만다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빈승은 비록 예술을 잘 모르지만, 문화예술을 아주 좋아해 중국 대륙의 돈황, 운강, 용문, 대족(大足), 보정(寶頂) 등 석굴을 참관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1945년 빈승이 19세이던 그 해는 항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로, 초산(焦山)불학원 학생이었던 저는 단오절을 맞아 불교유물전시를 하겠다고 불학원에 간청하였습니다. 당시 원장이셨던 설번(雪煩) 스님의 허락을 받고 저와 몇몇 동기들이 나뉘어서 소동파가 쓰던 옥 허리띠(玉帶)와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를 금산사에서 빌려오고 죽림사(竹林寺)와 초안사(超岸寺) 등 여러 사찰에서 소장하고 있던 많은 문물을 초산에 있는 화엄각에서 전시하였습니다. 

빈승은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없을까 걱정이 돼서 ‘진나라와 한나라의 벽돌과 기와가 나타났어요!’ ‘초산으로 곤룡포와 옥 허리띠를 구경하러 오세요’ ‘용의 알이 초산에 나타났어요!’라는 표어를 써서 진강(鎭江)에 붙였습니다. 이러한 표어가 당시 진강지역 민중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지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전시회 기간인 일주일 내내 수십 척의 배들이 구경하려는 사람들을 진강과 초산 사이를 바쁘게 다니며 실어 나르고 초산은 보기 드물게 몰려든 사람들로 둘려 쌓인 형국이 되었습니다. 조용했던 초산이 날마다 사람들로 정신이 없고 시끄러워지자 저는 대중들을 번거롭게 했다는 사중의 꾸중을 들을까 겁이 나서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전쟁이 승리로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이 또한 좋은 일이라는 생각에서 좋아했지 못마땅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신문 보도로 인해서 초산이 유명해지자 태허(太虛) 스님께서 중경에서 초산으로 오셔서 ‘중국불교회 실무자 훈련반’을 열었습니다. 저도 다행히 동참하게 되어 태허 스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었고 이 또한 제가 새로운 불교의 앞날에 대해서 더욱 신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양식만 있어서는 부족한 것이기에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 외에도 빈승은 신도와 인연있는 인사들을 위해 먹을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기능을 갖춘 ‘사(舍)’부수의 ‘회관(會舘)’을 세웠습니다.

예를 들어 의란에 ‘초계회관(礁溪會舘)’을 세우고 불광대학교에 국내외 제자들이 함께 저의 모친을 위한 ‘할머니기념관(老奶奶紀念舘) 광운관(光雲舘)’을 지어 기증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불광산에서도 불광대학교 설립추진위원 100만명을 위해서 ‘학교불사 100만명 기념관(百萬人興學紀念舘)’을 건립하였습니다.

기념관 앞에 서서 태평양과 구산도(龜山島)와 난양평원을 마주 바라보면서 저는 ‘새벽에 태평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저녁에 난양평원의 진주를 센다’라고 글을 지었는데 이는 실제 모습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의란 임미산(林美山)에 위치한 학교불사 100만명 기념관은 아래를 내려 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자리 잡아서 새벽에는 태평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고 저녁에는 난양평원의 수많은 집들의 불빛을 볼 수 있으니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광대학교의 아름다움은 이러한 형상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불광대학교의 경치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고 1000년의 어두운 방을 마음의 빛으로 환하게 밝히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다 문화와 교육으로 발전하고 빛나게 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빈승은 불광대학교 정문에 ‘불광이 성현의 길을 밝게 비춰주고, 대학이 장원급제의 문을 넓게 열어 준다’라고 썼는데 이 글은 바로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에 대한 기대이자 격려입니다.

불광산 개산 이후로 신도들이 몰려들었는데 특히 매주 토·일요일마다 타이베이의 신도들이 10여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남부로 내려오면 불광산에서 자고가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빈승은 신도들을 위해 조산회관(朝山會舘), 마죽원(麻竹園), 운거루(雲居樓) 등을 짓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 삼아서 쓴 ‘조산회관’, 이 네 글자는 아주 작은 간판으로 아직도 조산회관의 입구에 걸려있는데 40년이 된 것입니다.

불광산에 조산회관이 지어졌으니 참관할 수 있는 ‘정토동굴’과 불교문물을 진열한 ‘진열관’ 등 여러 건물이 하나하나 지어져서 세계 각처의 신도들이 불광산에 와서 기도도 하고 참관하러 오는 것을 더없이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불광산과 불타기념관에 사람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시설인 관(館)이 10여 군데가 넘습니다.

‘땅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는 곳에 재물이 있게 되고 재물이 있으면 대중을 위해 써야 한다’고 빈승은 말한 적 있습니다. 불광산은 50년 이래로 끊임없이 인파를 불러 모았고 점차적으로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불광산 교단을 상징하는 ‘승보(僧寶)’를 이루게 되었으며 ‘불보(佛寶)’를 대표하는 불타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빈승은 ‘불타기념관 풍운록(風雲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 불타기념관에는 풍운도 없고 시시비비도 없으며 오로지 매일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배하러 와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충전하고 기운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지나온 나날을 돌아보면 빈승은 이 ‘관(館)’이라는 글자 위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어느 정도 짊어졌습니다. 앞으로 ‘법보(法寶)’를 상징하는 장경루가 완성되고 ‘불광대도(佛光大道)’가 20여개의 누(樓)와 각(閣), 관(館), 대(台)를 하나로 이어주게 되니 걸림 없이 통행하게 되어서 전체 불광산에 진정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가 갖추어지게 되니 그렇다면, 모든 지난날의 사소한 수고도 따질 거리가 없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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