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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눌과 성철

기자명 김택근

▲ 팔공산 동화사에 봉안되어 있는 보조국사 진영.

“지눌의 시대나 성철이 살았던 시대는 똑같이 민족의 암흑기였다. 나라는 외세에 휘둘리고, 백성은 고통 받고, 승단은 부패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백성을 보듬지 않았다. 권력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이에 지눌은 정혜결사를, 성철은 봉암사결사를 주도했다. 정혜결사나 봉암사결사나 내용은 똑 같다.”

성철은 보조의 점수사상을 공격했다. 돈오점수설로 선불교 전통이 정법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보조는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보조 지눌이 고려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지눌을 대신해서 반박을 해야 옳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승려들이 지눌 입장에서 성철을 공격했다. 하지만 지눌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눌과 성철이 동시대에 있었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두 사람은 어떤 논쟁을 벌였을까. 불교학자 도대현은 지눌과 성철의 돈점사상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첫째, 두 선사가 육조 혜능을 스승으로 삼은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육조단경’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르다. 육조 혜능이 주장한 ‘돈오돈수 역무점차(頓悟頓修 亦無漸次)’의 입장에서 볼 때, 성철은 이를 점수가 필요 없는 돈오돈수로 파악하였으나, 보조는 혜능의 남종선을 규봉 종밀의 돈오점수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여 돈오점수를 유일한 수증론으로 보았다.

둘째, 두 선사 모두 간화선을 주장한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성철은 간화선을 통해 화두를 타파하여 돈오하게 되면 바로 돈수가 되어 수행이 끝나는 것으로 보았으나, 보조는 돈오를 해오로 이해하고 점수 수행의 시작으로 보았다.

셋째, 두 선사가 처한 시대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사상을 주장한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성철은 깨침이 확실한 기준으로 구경각과 견성성불, 즉 돈오돈수를 주장한 데 비해, 보조는 망념이 있는 해오를 돈오라 하고 돈오점수를 주장하였다.” (도대현 ‘성철 선사상’)

두 사람의 돈점사상이 ‘시대 상황에 맞추어 자신의 사상을 주장한 것’임은 여러 정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눌이 고려 말 선(禪)과 교(敎)의 다툼에서 이를 통섭하려 돈오점수설을 주장했다는 설은 나름 설득력이 있고, 성철 또한 함부로 견성했다며 종지를 어지럽힌 무리를 향해 돈오돈수설을 내세우고 죽비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눌과 성철은 비록 750년이 넘게 차이나는 시공간에 존재했지만 닮은 점이 많았다. 우선 두 사람은 고려 무신시대와 현대사의 무인시대 한 복판에 있었다.

9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은 고려 왕 의종 때 시작되었다. 왕은 절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문신의 권세는 왕권이 주눅들 정도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연회장에 들이닥쳐 문신과 환관들을 차례로 척살했다. 문관(文冠)을 쓴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칼을 든 자들은 부패한 왕실의 배후로 사찰을 지목했다. 승려들은 반발했고, 그때마다 시체가 산을 이뤘다. 남은 승려들은 새 권력에 엎드렸다. 사찰들은 새로운 왕실과 귀족들의 의례를 치르며 부를 축적했다.

칼을 지닌 자들은 서로를 벴다.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시체가 널브러진 곳에 까마귀떼가 하늘을 덮었다. 사찰에서는 음식이 넘쳐났다. 몸과 마음에 살이 오른 승려들은 뒤뚱거렸다. 사찰에 술 냄새가 진동했고 시정보다 시끄러웠다. 권력은 승려를, 승려는 백성을 부렸다.

어느 날 승려 하나가 사찰을 향해 일갈했다. 지눌이었다. 왕실과 귀족들이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승려들이었다. 지눌은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로, 명리에서 정혜로, 기복에서 수행으로 옮겨가자고 외쳤다. 지눌은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만들어 동지를 구했다.

“남은 세월이 한줌 햇살인데 탐욕, 분노, 질투, 교만, 방일로 세월을 허비하고 부질없는 말로 세상을 흔들 셈인가. 덕도 없으면서 신도들 보시를 받고, 공양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 허물을 두고 어찌 슬퍼만 할 것인가. 선(禪)과 교(敎), 유가와 도가를 막론하고 뜻이 높은 사람은 일어나라.”

지눌의 결사문은 거대한 죽비였다. 세상과 타협한 승려들은 질린 얼굴로 모여서 수군거렸다.

“지눌이 불법으로 우리를 찌르는구나.”

지눌은 개경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도 권력을 무수히 찔렀다. 고려불교는 그렇게 변방에서 일어섰다. 

성철이 살았던 근·현대사 또한 척박했다. 나라를 빼앗기고, 해방 공간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끝내 국토가 동강났다. 6·25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군인들이 권력을 찬탈했다. 육군소장 박정희 쿠데타 이후 신군부의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까지 31년(1961~1992) 동안을 무인정권이라 칭할만하다.

이러한 격동의 역사에 불교계도 숱한 곡절이 있었다. 사찰에서 술 냄새와 비린내가 진동했다. 항일 승려와 친일 승려가 있었고, 정화운동이 전개되면서 비구승과 대처승이 싸웠다. 그리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전국의 사찰에 난입하는 법난이 발생했다.

지눌의 시대나 성철이 살았던 시대는 똑같이 민족의 암흑기였다. 나라는 외세에 휘둘리고, 백성은 고통 받고, 승단은 부패했다. 그럼에도 불교는 백성을 보듬지 않았다. 권력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이에 지눌은 정혜결사를, 성철은 봉암사결사를 주도했다. 정혜결사나 봉암사결사나 내용은 똑 같다.

“땅에서 쓰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
“부처님 법대로 살자.”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보조와 성철은 근본에 충실했다. 똑같이 변방에 머물며 서울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철 또한 불법으로 나태한 한국불교를 찔렀다. 그것은 처절한 자기 혁신이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호소이기도 했다. 성철은 지눌처럼 결사문을 내걸지 않았지만 평소 외침으로 미뤄 보면 성철의 봉암사 결사문은 이랬을 것이다. 

“한국불교는 간판만 불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여기저기서 목탁장사만 하고 있으니 그 죄를 어찌할 것인가. 먹고 살 길이 없으면 강도짓을 할지언정 천추만고에 거룩한 부처님을 팔아서야 되겠는가. 가짜 선지식들은 간판을 내려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가장 잘사는 것이 승려여야 한다. 이에 부처님법대로 잘 살아보려 한다. 뜻있는 자들은 희양산 봉암사로 오라.”

성철은 직설적이고 지눌은 자못 은근하다. 그것은 지눌의 ‘수심결’과 성철의 ‘선문정로’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삼계(三界)의 열뇌(熱惱)여 화택(火宅)과 같도다. 어찌 여기에 머물러 있어 가없는 괴로움을 달게 받을 것이랴. 윤회를 벗고자 하면 부처를 찾음보다 나음은 없나니 부처를 찾고자 하면 이 마음이 곧 부처라,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리요, 나의 몸을 떠나지 않음이요, 색신(色身)은 다 거짓이라 남이 있고 멸(滅)함이 있으나 진심은 공함과 같아 끊어짐과 변함이 다 없나니 이런 전차로 이르사대 백해(百骸)는 흩어져서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나 일물(一物)은 길이 영(靈)하여 하늘과 땅을 덮는다 하시니라. 슬프다, 이젯사람의 길을 잃고 헤맴이여. 저의 마음이 참으로 부처인 줄 모르며 저의 성(性)이 참 법인 줄 몰라 법을 구하되 멀리 여러 성인(聖人)을 찾고 부처를 구하되 저의 마음은 보지 않는도다.

만일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性) 밖에 법이 있다 하여 여기에 굳이 집착하여 부첫길을 찾고자 하면 비록 진겁(塵劫)을 지나도록 몸을 태우며 팔을 그을리고 뼈를 두드리며 살을 깎고 피를 뽑아 경(經)을 베끼며 길이 앉아 눕지 아니하고 하루 한 끼를 묘시(卯時)에 먹으며 크나큰 대장교(大藏敎)을 다 읽으며 이렇듯 가지가지의 고행을 닦은들 어찌 얻음이 있으리요. 마침내 모래로써 밥을 지음과 같이 다만 수고로움만 더하리로다. 오로지 저의 마음을 알며 항사(恒沙)의 법문과 한없이 묘한 뜻을 찾지 않아도 얻으리라.’ (지눌 ‘수심결’ 첫머리: 조지훈 역)

‘영취산정에서 세존이 염화((拈花)함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이요, 소림암굴(小林岩窟)에서 이조(二祖)가 삼배(三拜)함은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음이니, 고금 선지식들의 현언묘구(玄言妙句)는 모두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다.

열갈(熱喝)과 통방(痛棒)도 납승의 본분이 아니거늘 어찌 다시 눈뜨고 꿈꾸는 객담(客談)이 있으리오마는, 진흙과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성명(性命)을 불고(不顧)함은 고인의 낙초자비(落草慈悲)이다.

정법상전(正法相傳)이 세구연심(歲久年深)하여 종종(種種) 이설(異說)이 횡행하여 조정(祖庭)을 황폐케 함으로 노졸(老拙)이 감히 낙초자비를 운위(云謂)할 수는 없으나, 만세정법(萬歲正法)을 위하여 미모(眉毛)를 아끼지 않고 정안조사들의 수시법문(垂示法門)을 채집하여 선문(禪門)의 정로(正路)를 지시(指示)코자 한다.’ (성철 ‘선문정로’ 서언)

‘수심결’은 섬세하지만 ‘선문정로’는 담백하다. 지눌의 글에는 감성이 진하게 묻어있지만 성철의 글에는 살점이 별로 없다. 지눌이나 성철은 이렇듯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또한 닮았다. 불교학자 박성배는 닮은 점 세 가지를 이렇게 꼽았다.   

“첫째 우리는 두 분이 모두 다 주장자 법문만을 장기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두 분은 모두 시대와 사회를 그 나름대로 걱정하신 분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두 분이 다 당신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사상적으로 문제를 밝혀보려는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보조 스님도 성철 스님도 모두 붓을 들었다 하면 항상 말이 되게끔 말씀하셨다. 모두 학문적인 감각이 있으셨던 것이다. 말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학문의 보편적인 원칙을 지킬 줄 알았다. 모두 학문적인 자질이 탁월하신 분들이었다. 이런 공통점들 때문에 지금 두 분의 사상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학자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경’ 2013년 7월호)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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