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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시알코트, ‘밀린다팡하’의 무대

밀린다 왕과 불교장로 나가세나의 대론 무대 샤카라

▲ 시알코트 인근 헤드 말라라의 바다와 같은 체납 강. 시알코트의 옛 지명은 샤카라로 고대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수도였다. ‘밀린다팡하’(혹은 ‘밀린다왕문경’, 한역은 ‘나선비구경’)에서 나가세나 장로와 대론한 밀린다(그리스 이름은 메난드로스)는 박트리아의 왕으로, 경에서는 이곳 샤카라의 해변(海邊)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세친은 ‘구사론’의 부록 격인 제9장 ‘유아론 비판(破我品)’에서 “자아가 다만 5온에 근거하여 가설된 개념일 뿐이라면 어째서 불타는 ‘자아는 바로 육신(色) 등’이라 말하지 않은 것인가”라는 독자부의 물음에 대해 ‘밀린다팡하’(한역은 ‘나선비구경’)에서의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나선 비구) 사이의 문답을 인용한다.

오늘날 파키스탄 시알코트가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 샤카라

밀린다팡하, 즉 나선비구경 속
밀린다왕과 나가세나 장로가
‘자아’ 등 문답 나눴던 장소

불교 자취 없고, 20㎞ 변방서
본 대양이 경전 속 해변 추정

“대덕이시여!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문들은 말하기를 좋아할뿐더러 유창하다고 들었습니다. 나의 질문에 바로 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질문하십시오.”
“자아(命者)와 육신은 동일한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조금 전 바로 대답해주기로 약속하였으면서 어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왕들은 말하기를 좋아할뿐더러 유창하다고 들었습니다. 나의 질문에 바로 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질문하십시오.”
“대왕의 궁중 망고나무 열매는 그 맛이 십니까, 답니까?”
“궁중에는 본디 망고나무가 없습니다.”
“조금 전 바로 대답해주기로 약속하였으면서 어찌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까?”
“궁중에는 본디 망고나무가 없는데, 어찌 그 열매가 달다 시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자아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메난드로스(B.C. 163∼105) 초상이 새겨진 동전. 뒷면은 아테네 여신. (영국박물관)

밀린다(Milinda)는 고대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B.C. 163∼105)의 인도 이름이다. 힌두쿠시 산맥과 옥사스 강 사이(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 걸친 지역)에 위치한 박트리아는 페르시아로부터 간다라에 이르는 요충으로 일찍이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그리스의 알렉산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가 이 지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기원전 3세기 무렵 그리스인 태수 디오도토스(B.C. 250∼235)가 이 땅에 박트리아(大夏) 왕국을 건설하였고, 네 번째 왕인 데메트리오스(B.C. 189년 즉위)가 힌두쿠시를 넘어 판잡과 서부인도를 지배하는 사이 에우크라티데스(B.C. 175∼156C.)가 독립하였고 그 또한 카불계곡으로부터 푸쉬카라바티(간다라의 옛 수도), 탁샤쉬라까지 세력을 미쳤다.

이에 데메트리오스의 후계자 메난드로스는 샤카라를 수도로 정하고서 인더스 강 하구 파타라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는 한편 마투라, 구자라트, 카티아와르 반도에 이르는 인도 내륙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는 스스로 ‘정의의 왕’을 표방하였고, 불교도들은 그를 아쇼카 왕에 비유하였다. 그의 수도 샤카라는 ‘그리스 인의 도시’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 인이 지배적이었으며, 그가 주조한 화폐도 널리 유통되어 그가 죽은 후로도 200년간 통용되었다고 한다.

밀린다 왕과 불교장로 나가세나 사이의 대론의 무대가 된 박트리아 왕국의 수도 샤카라는 오늘날 파키스탄의 시알코트이다. 현장은 카슈미르에서 탁카국(迦國)으로 내려와 찬드라바가(Candrabhaga) 즉 체납 강(7회 참조)을 건너 이 나라의 고도인 샤카라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5세기 중엽 서북인도로 내려온 백계 흉노 에프탈리트의 두 번째 왕 미히라굴라(Mihiragula, 大族, 502∼528 재위)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불법을 파괴하다 마가다의 발라디트야(幼日) 왕에게 패퇴한 일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지만, 밀린다 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현장은 계속하여 세친이 이곳 샤카라의 한 가람에서 ‘승의제론(勝義諦論)’을 지었던 사실을 전하는 한편 ‘구사론’을 저술한 후 이곳에 머물고 있던 세친과의 대론을 위해 이곳으로 오던 중현이 세친이 그를 피해 중인도로 떠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진하여 목숨을 마쳤다는 전설도 전한다.(6회) 그곳이 어디쯤일까? 아크누르의 암바란 승원 앞을 도도히 흘러간 체납 강은 샤카라의 고성을 감아 돌아 세친이 머물렀던 가람 앞도 지나갈까? 이곳 샤카라에서 밀린다 왕과 대론하였던 나가세나 장로의 이름은 지금도 잠무&카슈미르 주(州) 키쉬트와르(Kishtwar) 팟다르(Paddar) 지역에 나가세니(Nagaseni)라는 마을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 옛날에도 카슈미르(키쉬트와르)-아크누르-샤카라는 체납 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시알코트의 무굴 성. 지금은 이 회랑 일부만 남아 있었다.

아크누르에서 잠무와 암리차르를 거쳐 아타리-와가 국경을 넘은 것은 일요일 오전이었다. 한산하였다. 양국의 국기 하강식으로 유명한, 인도 쪽에는 마하트마 간디, 파키스탄 쪽에는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사진이 걸린 중앙광장을 지나 파키스탄 측 입국심사장에 들어서자 판자비 차림의 검고 긴 구레나룻의 직원 모습이 짧은 콧수염에 남방셔츠 차림의 인도 이민국 직원과 대조를 이루었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긴장감은 페샤와르와 밍고라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라호르는 몹시 더웠고, 인구 천만의 도시답지 않게 한적하였다. 한적한 이유를 안 것은 불타 고행상으로 유명한 라호르박물관에서였다. ‘이 둘 피트리’, 라마단 종료축제. 파키스탄은 바야흐로 어제 라마단이 끝나고 나흘간의 연휴상태였다. 그래서 박물관도 문을 닫았고, 대신 찾아간 라호르성도 문을 닫았다. 그래서인지 성문 앞의 어느 성자의 무덤이 있는 모스크는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더위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더위가 조금 가신 밤이 되자 축제를 핑계 삼아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광란은 새벽녘 소나기가 쏟아지고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더 이상 라호르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시알코트로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알코트 역시 더웠고 시가 또한 한적하였다. 상점은 거의 대개 철시하였다. 어렵게 찾아간 투어리스트 센터도, 호텔도 문을 닫았다. 불교의 자취는 고사하고 하루 밤 묶을 방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방인 모습인 우리 주변으로 마치 연예인 구경하듯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악수를 청했고, 함께 사진 찍자고 하였다.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 사이의 대론을 연상시켜 줄 법한 고성(故城)을 찾고 싶었지만, 지도에도 나오지 않았고 GPS도 잡히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겨우 영어를 하는 이를 만나 오토릭샤 운전수에게 우리가 ‘시알코트 포트’에 가기 원한다는 사실을 일러줄 수 있었다.

릭샤는 다시 시알코트 버스 스탠드를 돌아 텅 빈 시가를 혼자 달리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성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제 곧 성벽에 기대 성 밑으로 흘러가는 체납 강을 바라보면서 나가세나 장로를 떠올리면 ‘밀린다팡하’의 답사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길은 그냥 언덕배기 공회당 비슷한 건물 앞에서 끝났다. 일단 내렸다. 포트(성)는 어디 있으며, 강은 어디 있는가? 운전수와는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모른다고 했다. 성이 있을만한 곳에는 완전히 폐허가 된, 감옥을 연상시키는 방들이 이어진, 제법 큰 규모의 여관이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라호르 성처럼 위풍스러운 고성 같은 것은 없었고, 횃불을 밝힌 망루에서의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 사이의 대론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어렵게 말을 건넨 검은 베일의 무슬림 여인이 동정하듯 대꾸했다. “시알코트 노 리버(시알코트에는 강이 없다).” 세친이 ‘구사론’을 지은 후 머물렀다던 가람은 생각조차 불가능하였다. 황당하였다.

지친 심신을 이끌고 감옥 같은 여관 맞은편 길을 따라 언덕배기를 내려오려다 역시 거의 폐허 수준의 회랑이 있어 소피라도 볼 겸 뒤 곁을 기웃거렸다. 10여 미터, 반쯤 허물어진 창고 벽 같은 것이 보였다. 이미 많은 이가 소피를 본 듯 악취도 풍겼다. 어떻게 보면 옛날 성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일단의 청년들이 몰려왔다. 예(例)의 악수와 심문, 그리고 사진촬영을 끝낸 다음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무굴 성이란다. 그러고 보니 잡목과 잡초 사이로 보인 벽은 성채 회랑 같았다. 이곳이 무굴시대 성채이면 그 이전에도 역시 성이었을까? 현장은 샤카라가 탁카국의 고성(故城)이라 하였는데, 미히라굴라 이전에도 이곳이 고성이었을까?

다시 물었다.

“강은 어디 있는가?”

대답이 없었다. 문득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의 전생인연과 현생에 서로 만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 ‘밀린다팡하’의 첫 대목이 떠올랐다.

▲ 라호르 성 정문 알람기리 게이트. 라마단 종료 축제인 이 둘 피트리 연휴로 문을 닫아 인적이 끊어졌다.

[이러한 인연의] 두 사람은 죽은 후 국왕이 되고 싶어 했던 이는 해변(海邊)에서 국왕의 태자로 태어나 이름을 ‘밀린다(Milinda)’라 하였고, 아라한의 열반을 원했던 이는 천축(혹은 카슈미르)에서 코끼리(‘那’)와 같은 시간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선(Nagasena)’이라 이름 하였다. …나선은 세상을 교화하다 샤카라에 이르러 설저가사(泄坻迦寺)에 머물렀는데, 전생에 알았던 어떤 이도 미린다라는 이름의 국왕 아들로 해변에 살고 있었다.

내륙의 평원에 해변이 웬 말일까? 내친 김에 계속 물었다.

“웨어 리즈 리버 룩스 라이크 씨(바다 같은 강은 어디 있는가)?”

불통이었다. 다시 물었다.

“웨어 리즈 씨 오어 오우션(바다나 대양은 어디 있는가)?”

놀랍게도 바로 대답이 나왔다.

“디 오우션 이즈 헤드 말라라(대양은 헤드 말라라에 있다)”

헤드 말라라(Head Marala), 그곳을 가봐야 했다. 다시 버스 스탠드로 나왔다. ‘말라라’를 외치다 1950년대에 생산되었음직한 트럭 형 소형버스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시알코트에서 20여㎞. 무슬림 남녀노소 틈에 끼여 한 시간 정도 달리자 마침내 물이 가득 찬 20여m 정도 폭의 강(운하)이 나타났다. 여기가 헤드 말라라라는 운전사 말에 반신반의하며 차에서 내렸다. 축제의 연휴를 즐기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디가 오우션이야? 다시 왕복 180루피에 흥정하여 릭샤에 올라탔다. 젊은 릭샤왈라에게 길을 맡겼다. 십여 분을 달렸을까? 마침내 눈앞에 대양이 나타났다. 양수리는 비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운하를 건너고 다시 강 둑 길을 타고가다 수문이 설치된 다리를 건넜다. 아크누르 암바란 불교승원 앞을 지난 체납 강은 잠무를 거친 타위 강과 만나고 다시 몇 갈래로 나누어지면서 오우션(대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제방이 없었던 그 옛날이라면 그야말로 대양과 같은 바다로 여기지 않았을까?

‘밀린다팡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나가세나 장로가 신통력에 대해 회의하는 왕에 대해 “2천 유순 떨어진 고향(本生)인 아라산다(알렉산드리야의 와전)의 섬(dl-pa)을 생각하는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은 것에 근거하여 밀린다 왕이 태어난 ‘해변’을 아라산다의 섬 즉 아프가니스탄의 판즈쉬리(Panjshir) 강과 카불 강 사이의 지방으로 비정한다. 체납 강과 라비 강 사이의 샤카라 지역 역시 샤카라의 섬(S´a-kala dvl-pa)으로 호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60㎞도 넘는 체납 강과 라비 강 사이의 지역을 어찌 ‘바다’라 하겠으며, 미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가 만난 곳을 어찌 아프가니스탄 내륙이라 하겠는가?

이 둘 피트리 연휴의 말라라 해변은 매우 혼잡하였지만, 마침내 샤카라를 본 것 같았다. 바람도 시원하였다. 이 바람을 필경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장로도 쏘였을 것이다. 바다와 같은 체납 강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구사론’을 저술하고 일시 샤카라에 머물던 세친도 저 석양을 보았을 것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41호 / 2016년 4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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