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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봉은사 전통문화체험관에 거는 기대

기자명 법보신문
  • 사설
  • 입력 2016.06.07 12:26
  • 댓글 0

강남 봉은사가 전통문화체험관 착공식을 가졌다. 체험관 2개동에 대한 행사였지만 봉은역사문화공원 조성 중창 1단계 불사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강북의 조계사와 함께 강남의 봉은사는 서울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794년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한 견성사(見性寺)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봉은사의 역사는 벌써 1200년을 넘어 섰다.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인 선릉을 위해 1498년 견성사를 중창하며 절 이름을 봉은사로 명명했고, 이후 허응당 보우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 취임하며 선종 수사찰로 거듭났다. 1562년 보우선사가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을 선릉 옆으로 이장하고는 사찰을 현재 위치로 옮김에 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고의 학’으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근대 선지식 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가기 전 주석했던 사찰이 봉은사다.

귀중한 보물급 문화재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봉은사 판전에는 철종 때 영기대사(永奇大師)가 조각한 ‘화엄경소’를 비롯해 ‘금강경’과 ‘한산시’, ‘유마경’ 등 귀중한 목판본 16부 1480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 동국대에 보관되어 있는 국가지정 보물 고려청동누은향로도 봉은사가 소장했었던 유물이다. 추사 김정희와도 인연 깊은 고찰이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이 그의 글씨고, 현재 걸려 있는 편액 ‘판전(板殿)’은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1의 도시 서울을 대표하는 사찰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사찰로 거듭나는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다. 결코 봉은사 사부대중의 원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종전의 한전부지를 포함한 상암월드컵경기장 1개에 서울시청 앞 광장 8개를 합친 규모의 막대한 땅이 강제 수용되면서 사세가 한 번 꺾였다. 여기에 도시공원법 등의 각종 규제가 사세확장을 가로막았다. 지난 40여년 동안 도량내에 전각 하나도 사찰의지에 따라 지을 수 없었으니 대중을 품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 해 1000만여명의 외국인들이 서울을 찾아도 봉은사는 이들을 맞이할 수 없었던 한계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기에 전통문화체험관 두 동이 갖는 의미는 깊다. 비록 턱 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외국인들에게도 봉은사가 간직해 온 특유의 전통문화와 한국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한국불교문화의 탁월성과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전하는 허브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봉은사역사문화공원조성 불사의 중요성도 여기에 있다.

 [1346호 / 2016년 6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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