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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포교를 위한 강설과 그 인연 ①

“지혜롭지 못해도 몸으로 좋은 일 하면 그것이 포교입니다”

▲ 대만 불광산사 경내에 있는 대형 법당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설하고 있는 성운 대사.대만 불광산 제공

“홍법 초기 대만에 절은 있었지만 불교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누구를 말하는 이름인지, 불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민간신앙만 있었습니다. 민중 대다수가 신명의 가피를 바라는 민속신앙이 아주 보편적이었습니다. 저는 불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대만에 불법은 없고 민속신앙만이 번창한 것을 풍자하는 ‘성군선녀가 세속에 내려오다(星君仙女下凡塵)’‘종교동맹대회’라는 제목의 동화를 쓰기도 했습니다.”

반복해서 탐구하고 마음을 쏟고 노력하면서 모든 부처님 말씀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 대중과 불자들이 알아듣고 도움이 되도록 말해주었습니다. 이 또한 빈승이 일생에 걸쳐 가장 부지런히 공부한 부분입니다.

한 출가자로서 불법을 널리 펼치고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마땅한 책임입니다. 만약 머리가 좋다면 지혜가 있음을 나타내니 그 사람은 글을 써서 문화적으로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라면 강연하고 설법하면서 가르침을 전하는 쪽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머리가 나쁘고 언변이 대단하지 않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단지 발심하기만 한다면 그 자비심을 개발하여 자선사업을 할 수 있으며 불교를 위한 고행을 수행으로 삼아 발심해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면에서 모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힘든 일에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널리 인연을 맺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연을 맺으면 부처님과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남과 인연 맺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과는 우리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인연을 맺는 것은 금전을 써야만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불법이 없다면 몸을 움직이는 노력을 통해서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며 만약 그러한 노력도 부족하다면 좋은 마음과 좋은 뜻으로 축복해주고 칭찬해주고 기뻐해주는 이 모든 것이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수행하지 못하거나 득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불법은 평등하고 모든 사람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근(六根)을 같이 닦으면서 삼호(三好)를 실천해 수행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수행 이외에 저는 “육근을 같이 닦자(六根同修)”고 강조하곤 합니다. 눈은 자비로운 눈길을 훈련하여 부처님을 우러러 보아야 하고 경전을 보고 책을 읽고 사람을 보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귀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고 새겨들어야 하고 좋게 들어야 하고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사바세계에서 참된 가르침의 체계는 소리로 듣는 것이 청정하다(此方真教體 清淨在音聞)”고 하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이 불도를 이루기 쉽다”는 뜻으로, 모든 경전의 서두에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如是我聞)”고 시작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귀로 듣는 이근(耳根)의 수행입니다. ‘능엄경 25’ 원통장(圓通章)에서 ‘이근원통(耳根圓通)’이 중요한 수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코는 우리들에게 향기를 맡고 냄새를 맡으며 공기를 숨 쉬게 해주지만 법미(法味)가 어디에 있는지 냄새로 맡을 수 있을까요? 공기가 우리의 생명을 길러줄 수 있듯이 법미가 있는 곳은 당신의 법신(法身)을 길러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법이 어느 곳에 있는지 당신은 후각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까? 그 외에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할 수 있고 몸으로는 좋은 일을 하고 마음으로는 좋은 마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제가 항상 강조하는 ‘삼호(三好)운동’입니다.

눈·귀·코·입·몸·마음 육근을 같이 닦는다고 하는 이치를 빈승이 비록 알고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의 눈이 밝지 못하고 귀도 영특하지 못하고 코도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나머지 신구의(身口意) 수행에 전념하여서 “몸으로는 좋은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힘든 일을 수없이 해 왔습니다. “입으는로 좋은 말을 하자”는 생각으로 범사(凡事)에 항상 말조심을 하려고 스스로 애를 썼습니다. 예를 든다면 ‘빈승이 할 말이 있습니다’를 쓰면서 본래는 “어려움을 헤치고 분쟁을 풀다”라는 단원의 글을 쓰려고 했었지만 사람들과 시시비비가 얽히게 되기 때문에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입으로 불교를 전하고 설법을 하도록 격려하는 마음에서 저는 이 단원에서 저의 홍법 포교의 인연을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치에 맞고 근기에 맞추어서 재미있는 이야기에 불법을 담아야 합니다. 가장 처음 빈승은 저의 육근에 무슨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6세가 되던 해 남경 서하산에서 거행한 학생강연대회를 은사 스님의 한 사형되시는 분께서 주관하셨습니다. 빈승은 그 대회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1등을 했다고 기뻐하지 않았고 다른 더 우수한 인재가 있을텐데 하면서 도리어 “1등 할 자격이 없고 공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은사 스님과의 관계로 그분이 사심이 있는 결정을 하셨다”며 은사 스님의 사형 뻘 되시는 분을 탓했습니다. 자신 스스로를 잘 아는 것이 쉽지 않은데 빈승은 청소년 때부터 스스로의 장단점을 알고 스스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홍법 포교에 나서기 이전에 저는 먼저 글을 써서 불법을 전했습니다. “글을 쓰고 펜을 놀린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제가 스무 살이 될 무렵 잡지 ‘노도(怒濤)’를 편집했었고 서주(徐州)에서 출간하는 반월간지 ‘하광(霞光)’을 책임 편집했고 진강 ‘신강소보(新江蘇報)’에도 많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 스스로 별다른 능력이 없음을 알았기에 역시 글을 써서 불법을 널리 알리려고 했습니다. 세월을 그냥 보낼 수도 있었지만 불교를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대만불교강습회에서 근 2년간 강사를 맡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어라고 떠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단지 국문을 가르쳤을 뿐이었으니 문학적인 좋고 나쁨이나 득실은 따지지 않겠습니다.

처음으로 진정한 경전강설을 하였던 것은 26세가 되어서 입니다. 음력 2월 초하루부터 2월19일까지 의란 뇌음사(雷音寺)에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강설했습니다. 강의를 한 20일 동안 빈승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정하게 되었는데 강설과 더불어서 글쓰기로서 사회에 공양하게 된 것입니다.

“강연 설법을 너무 여러 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연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불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족제비가 닭을 물어가듯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든다”는 말처럼 날이 갈수록 사람이 줄어든다고 걱정했습니다. 인광대사가 민국 초기 상해에서 3일간 경전을 강설하신 적이 있는데 첫날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둘째 날에는 절반도 안 되게 남았으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더욱 적었습니다. 인광대사는 사람들이 불법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궁금했고 자신을 보고 나니 관심이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 당시 나이가 젊었지만 의란지역에서의 경전강설 20일 동안 날마다 200~300명의 청중들이 모였는데 사람들이 늘기만 했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으며 마지막 날에는 108명이 삼귀의계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장 처음으로 강연을 한 인연입니다.

그러나 이번 강연이 순조롭게 거행된 것은 제가 대만에 건너온 초기에 매번 일요일마다 ‘신죽(新竹)’에 있는 성황묘에서 거행하는 홍법포교 훈련과 상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군중은 불법에 대해 신심이 아직 그다지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는 대중들이 마치 밀물이 밀려오듯 한 걸음 한 걸음 저를 향해 모여들었지만 이야기가 끝나고 불법의 이치를 말하기 시작하면 모두들 다시 차츰 흩어졌습니다. 강연 2시간에 사람들은 이렇게 점점 모여들었다가 다시 차츰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런 가운데 저는 하나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는데 경전 설법할 때는 이야깃거리로서 이치를 알려주고 이치로서 이야깃거리를 설명해주면서 이치와 이야기가 어우러지면서 이치에 부합되고 근기에도 맞도록 이야깃거리와 불법을 서로 결합하여야 성공적인 강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나중에 줄곧 경전 속의 이야기나 인간생활에서의 이야깃거리에 신경을 쓰는 연유입니다.

또한 말로만 하는 강연은 다채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이라도 보여주게 되면 더욱 좋겠기에 저는 일본에서 슬라이드 필름을 많이 사와서 환등기로 영상을 비춰 보여주었더니 마치 영화와도 같아서 사람들의 주목을 더욱 끌게 되었습니다. 물론 말로 하는 것보다 노래 소리가 듣기 좋은 것이니 의란지역에 불교가 점점 발전하게 되면서 청년들도 점차 모여들게 됐습니다. 나중에 저는 포교단, 합창단을 조직해 청년들을 이끌고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노래로 포교하였는데 당시로서는 강연을 하는 새로운 포교방식이 되었습니다.

홍법 초기 대만에 절은 있었지만 불교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누구를 말하는 이름인지, 불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오직 민간신앙만 있었습니다. 민중 대다수가 신명의 가피를 바라는 민속신앙이 아주 보편적이었습니다. 저는 불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대만에 불법은 없고 민속신앙만이 번창한 것을 풍자하는 ‘성군선녀가 세속에 내려오다(星君仙女下凡塵)’ ‘종교동맹대회’라는 제목의 동화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민간신앙에 대해 불교도의 심리로서 그들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오랜 도반인 자운(煮雲) 스님이 ‘마조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발표하였을 때 저는 “그리 비판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마조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 곳에 스님들도 없었을 것이고 불법도 없었을 것이니 당연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천주교나 기독교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불교를 위해서 마조신이 대만 이 땅에 불교적 선근과 좋은 인연이 남아있도록 지켜준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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