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음 틈타 괴한들 침입해
각목을 휘둘러 탑신 파괴
보륜·옥개석 무너지고 깨져
9년 뒤 석등 또다시 침탈
그날 새벽, 백장암을 방문했던 실상사 스님이 포행을 하던 중 이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온갖 부침을 겪으면서도 1000년 세월 동안 온전한 모습을 지켜왔던 백장암 삼층석탑이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탑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기단부 정도밖에 없었다. 탐욕으로 얼룩진 파괴의 흔적들은 새벽 내 내린 눈에 덮여있었다. 스님은 백장암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주지스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사관들이 백장암에 모여들었다. 당시 백장암에는 수행하기 위해 들른 이들을 포함해 9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에게서 당일 새벽 1시20분경 삼층석탑 방향에서 덜컹이는 소리를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는 소리를 듣고 예불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해 방을 나가려다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자리에 누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범행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각목을 휘둘러 석탑을 부셨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전문도굴꾼이 아닌 불량배들의 소행인 것으로 판단했다.
범인들이 국보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까지 얻으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장암은 1972년 2층 옥개석을 보수하기 위해 탑을 해체했다. 이 과정에서 사리를 넣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 속 사리는 어느 순간 보물로 둔갑했을 것이고, 욕망에 눈이 먼 몇몇이 각목을 준비해 백장암에 잠입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삼층석탑이 국보도, 불자들의 예경 대상도 아닌 그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파괴해야 하는 돌덩어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6개월 뒤, 백장암 삼층석탑이 파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출입금지 경고판을 세운 것 외에 산산조각 난 탑신이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변한 것은 수북하게 덮여있던 눈이 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이에 대해 담당자는 파손부위에 사용할 스위스제 접착제를 구하지 못해 착공이 늦어지고 있다는 해명을 했다. 한동안 복원작업이 시행되지 않은 백장암 삼층석탑은 장마철 장대비가 균열부위에 스며들어 풍화작용이 우려되는 등 2차 피해가 진행되고 있었다. 탐욕과 무관심이 남긴 국보의 수난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80년 사건 당시 범인들은 삼층석탑 곁에 있던 보물 40호 백장암 석등도 완전히 무너뜨렸는데, 1989년 10월5일 또 다시 절도범이 침입해 보주를 훔쳐 달아났다. 석등은 이번에도 파괴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2014년, 문화재청은 전국 지자체와 함께 주요 문화재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백장암 삼층석탑은 보수 정비가 필요한 D등급을 받았다. 탑신부 상륜부 파손된 부위가 심하게 부식돼 보존 방안 수립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선조들의 얼과 혼, 신심이 빚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날 새벽, 백장암 삼층석탑에 각목을 휘두른 건 범인들이었다. 이후 무관심의 각목을 손에 쥐었던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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