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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빈승의 수난기-상

“참는 것은 힘이 될 뿐만 아니라 지혜를 발현합니다”

▲ 성운대사가 1953년 결성한 불교청년합창단.대만 불광산 제공

“국군과 공산당 간의 싸움에 끼인 고통은 생명이 마치 간들간들한 거미줄 같았습니다. 절 바깥에서 개가 짖는 소리라도 나면 놀란 마음에 가슴이 덜컹했고 어떤 때는 한밤중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주위에 어떤 토적이나 나쁜 사람이 숨어있는가를 살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숙되시는 분께서 대각사에서 토적에게 다리를 잘렸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

빈승의 90년 가까운 세월에서 생사의 갈림길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적이 여러 번 있었고 언급할 거리가 되지 않는 것도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빈승이 겪은 수많은 수난의 과정을 여기에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렸을 적 집안이 가난했지만 고생이라고 말할 수 없었고 군벌과 토적들의 횡포가 있었지만 어린 저는 무서운 것을 몰랐습니다. 항일전쟁으로 총탄과 포탄이 날아다녔지만 저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고 위험하다는 것 자체도 몰랐습니다.

출가한 이후 야단맞고 얻어맞는 억압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7~18세가 되면서 7년의 시간을 남경 서하산에서 보낸 저는 은사스님으로부터 갑자기 제적을 당하게 되면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앞날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서야 처음으로 어려운 시간이 정말로 닥치게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12세에 출가할 때 은사이신 지개(志開) 스님께서는 서하산의 감원 및 율학원의 훈육주임이셨고 17세가 되던 그 해에는 이미 원장이셨습니다. 원장이신 은사스님께서 왜 저를 제적시키려 했을까요? 저는 어려서부터 양자강 근처에서 자랐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운하가 있어서 자주 물놀이를 하면서 컸기 때문에 수영을 아주 잘했습니다. 출가한 이후 서하산에는 물웅덩이조차 없었기에 마치 개구리나 거북이가 갑자기 메마른 땅에서 살게 되어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이 정말로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이는 괴로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저는 그래도 살아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움직이기 좋아하는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워 넓지 않은 율학원에서 탁구 치는 것을 좋아했기에 야단도 맞았지만 선생님들도 나중에는 그냥 넘기셨습니다. 17~18세의 청년에게 탁구는 충분한 즐거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때 동기 중에 사범학교를 졸업한 학인이 한 명 있었는데 농구를 잘 했습니다. 그 동기로부터 농구의 좋은 점을 전해 들으면서 당시 학생자치회 회장이던 빈승은 농구장을 만들어 학인들이 농구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농구장은 서하산 산문 밖 넓은 공터에 만들었지만 농구대와 농구공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서하산사의 산에 있던 산림을 누군가 와서 도벌하였기에 사중에서는 간혹 우리들을 보내 순찰하여 나무를 도벌하려는 시골사람들을 쫓아내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도벌한 나무를 옮겨와 농구대를 만들고 나머지를 팔아 농구바구니와 농구공으로 바꿔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농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하산사는 외떨어진 산에 위치해 있어 평소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산문 밖에서 내달리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루 불행히도 은사스님께서 그곳을 지나다가 산문 밖에서 소리를 지르고 내달리며 농구를 하는 저를 보시고는 실로 출가자의 체통을 잃은 모습에 화가 나 대중을 불러 모은 뒤 주동자인 저를 제적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7년 넘게 살면서 익숙했던 서하산에서 한 순간에 제적을 당한 저는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에 앞날이 막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앞날이 캄캄하고 의지할 곳도 없다고 느껴지니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나중에 다행히도 당시에 가장 이름이 드높았던 초산(焦山)불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년 후 20세가 되던 겨울에 문득 불학원의 교육제도에 불만을 느끼게 되어서 저는 “은사스님의 출가도량으로 돌아가서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초산에서 서하산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어느 날 저녁 공양 이후로 기억하는데 저는 원장실로 가서 초산불학원을 그만 떠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원장으로 얼마 전에 부임한 동초(東初) 스님은 제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학기 시작이나 학기 말도 아닌데 어째서 초산을 떠나려고 하는 거냐? 우리가 너한테 무엇을 좋지 않게 했느냐?”며 꾸짖었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스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동초 스님의 항렬은 아주 높았는데 스님은 심지어 “너의 은사스님이라도 내 말을 들어야 해. 너는 어찌 감히 말을 듣지 않는 거지? 훈육주임 현화(現華) 스님을 불러와!”라고 말했습니다.

훈육주임 현화 스님이 소식을 듣고 급히 오자 “이 학생을 가둬. 떠나지 못하게 해”라고 원장스님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예전에 서하산에서는 제가 떠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원장스님은 저를 제적해 버렸고 지금 초산에서는 제가 떠나려고 하지만 원장스님은 저를 가두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가두게 된다는 것은 ‘무문관’처럼 1년이나 3년을 가두는 것인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단지 제가 죄를 지어 형을 판결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은사스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진강(鎭江)에서 몇시 기차를 탈거니까 그 시간에 맞추어 오면 은사스님이 저를 데리고 종찰 의흥 대각사로 가서 “역대 조사님들께 예를 올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믿는 데가 있었던 저는 훈육부에 항의를 했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차비조차 없이 그 다음날 새벽 날이 밝기 전에 강가로 가서 저를 건네줄 배를 불렀습니다.

뱃사공은 마음이 좋은 사람이어서 날이 밝기 전이었지만 저를 태우고 강을 건넜습니다. 맞은편 나루터에 도착하기 전에 초산 이쪽의 나루터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뱃사공을 부르는 것을 들은 뱃사공은 갑자기 저에게 “절에서 달아나려는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초산 쪽 사람이 저를 다시 데려오라고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이렇게 되면 정말 고생길이 열리겠구나”하고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배가 다시 초산 쪽 나루터로 돌아가니 선생님 한 분이 강을 건너려고 뱃사공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재가자인 이 선생님이 배에 오르자 저는 당당하다는 듯이 “나를 어떻게 보고 절에서 도망 가냐고 함부로 말하는 겁니까?”라며 뱃사공에게 따졌고 뱃사공은 연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배가 진강에 도착한 후 저는 은사스님과 만났습니다. 남고 떠나는 문제로 인해 저는 또 한 번 고난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은사스님의 출가도량인 대각사에 도착해 보니 농사를 짓는 도량이라서 참배객도 없고 신도도 없이 오로지 몇 명의 일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잇고 있었습니다. 본래 농사를 짓는 집에서 태어난 저는 농사를 업으로 삼고 지내면서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지내던 중 의흥의 교육국에서 저를 한 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기에 저도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학교문턱도 넘지 못했고 학교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학교 교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저에게 좋은 일이고 쉽지 않은 기회라서 거절할 수 없었기에 “가르치면서 배우자”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종찰 대각사에서 안주하게 되었고 사회로부터 출가인이 사회의 기생충이고 남의 이익을 뺏는 존재라는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절에 농장을 하나 만들고 학교도 한군데 세우려는 이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행운의 뒤를 따라 고난의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일년 반이 지난 후 백탑산(白塔山)이 외떨어진 시골구석에 있었지만 일본이 패망한 직후라서 낮에는 국군이 수시로 찾아와 순찰을 하였는데 그들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 절에 있던 모든 칫솔이나 수건들이 없어졌습니다. 당시 국군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녁에는 공산당 유격부대가 몰려와 낮에 국민당의 군대가 이곳에서 무슨 활동을 했느냐고 우리를 다그쳤습니다. 국군과 공산당 간의 싸움에 끼인 고통은 생명이 마치 간들간들한 거미줄 같았습니다. 절 바깥에서 개가 짖는 소리라도 나면 놀란 마음에 가슴이 덜컹했고 어떤 때는 한밤중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 주위에 어떤 토적이나 나쁜 사람이 숨어있는가를 살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숙되시는 분께서 대각사에서 토적에게 다리를 잘렸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어느 날 한밤중에 열 몇 개의 총구가 저의 침대를 향하고 있는 가운데 저는 누군가 불러 잠을 깼습니다. 국민당인지 공산당인지 아니면 현지 토적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는 그들에게 두 손을 묶인 채로 논둑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한두 시간을 걸어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안에 갇힌 저는 그 곳에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둥에 묶여있거나 손발이 뒤로 묶여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으로 끌려들어간 저를 본래는 밧줄로 대들보에 매달아 놓으려고 했지만 저를 묶고 있던 사람의 귀에 누군가 몇 마디 하자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방안은 바깥과 완전히 격리되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좌우의 누가 감시인인지 알 수 없어서 모두들 말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랐고 누가 자기와 무슨 원한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날마다 2~3명씩 불려나가면 살이 터지게 매를 맞던지 문짝으로 들려서 돌아오거나 총살되어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2주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불려 나온 저도 밧줄로 꽁꽁 묶였습니다. 꽃이 피는 따스한 봄날로 기억하는데 햇살이 밝던 오후 햇살에 저는 어지러움을 느꼈고 마치 형장으로 끌려가서 바로 사형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단지 이제 겨우 21세인데 여기서 총을 맞고 죽는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은사스님도 모르시고 가족도 모르는데 ‘금강경’에서 말하는 “모든 보이는 것이 마치 꿈과 같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와도 같다”라는 말처럼 인생은 정말 물거품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그 무리들은 저를 다른 집으로 데려갔는데 그 안에는 고문용 기구들이 가득한 것이 아마도 사람들을 고문하고 벌을 주는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약 30~40세 정도 되는 사람이 저에게 “당신이 지식인인지 우리도 아니까 당신을 힘들게 하지는 않겠소. 이 고문 형틀을 보고 사실대로 자백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자백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 사람을 찾아오자 일어나서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저를 원래 가두어 두었던 방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들은 보증인도 없는데 더 이상 묻지도 않고 저를 풀어주었습니다. 문 밖에 사형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마도 10여일 동안 줄곧 사형은 저를 구해내려 애를 쓴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진짜 신분이 무엇인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그 후로 저는 학교에서 교장도 맡지 못하겠고 종찰에도 머물지 못했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1호 / 2016년 7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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