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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새로운 불교운동을 위한 첫걸음-하

“합창단 결성해 절에서 노래가 끊이지 않게 했습니다”

▲ 1953년 대한 의란에서의 홍법 활동. 대만 불광산 제공

“우리 삼륜차 대열은 큰 스피커를 싣고 “우리들의 불교가 찾아왔어요! 어르신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불교가 왔어요! 우리들의 불교가 왔어요!”라고 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빈승이 군인으로서 대만에 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승려구호대에 참가하기 위해 대만에 온 것입니다. 저는 군인이 아니라 일생동안 총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총알 한방 쏴 본적도 없습니다. 나중에 공산당이 신(新) 중국을 세웠고 대만에 있던 저는 나라가 있어도 돌아갈 수 없고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어서 그냥 대만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우리는 기륭항에 도착했는데 타이난에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실어나를 차가 저녁에야 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 타이베이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타이베이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이 손을 들어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기에 저는 타이베이가 대략 몇백 미터 정도 거리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럼 빨리 갔다가 빨리 오라고 말했는데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한번 가더니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만에서 훈련을 받는다’는 말은 손입인 장군과 친분이 깊었던 빈승의 은사 지개(志開) 스님께서 손 장군께 부탁을 한 것입니다. 당시 손 장군은 대만에서 군관훈련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타이난에서 면담할 때까지 우리들에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타이난에 도착해 1~2주를 기다려도 전화로 관심을 좀 주었을 뿐 나중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우리 일행 30여명 가운데 대략 10여명이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승려구호대가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빈승은 모두에게 각자 알아서 흩어지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빈승은 타이중 보각사 감원을 하고 있는 불학원 선배 대동 스님으로부터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불학원’을 세우고 싶으니 대만에 와서 수업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당시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불학원을 만들 여력이 불교에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는 이 선배의 말이 너무 허풍이라고 생각해 답장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앞길이 막막하니 찾아가서 의논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각사에 도착하고 나서 선배가 간첩혐의를 받고 2주 전에 홍콩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친구라고 찾아가도 만나지 못하니 빈승에게는 대만에서 더 이상의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빈승은 중국에 이름이 알려진 대만사찰 여러 곳을 방문하였지만 그들 모두 우리들의 방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거절을 당하고 난 후, 원광사(圓光寺) 묘과(妙果) 스님과 제가 인연이 있기도 하였고 어쩌면 당신 상좌들 중에 지도(智道) 스님이 미리 말씀을 잘 드리기도 했던 듯 묘과 노(老) 스님께서 저희들을 만나주셨는데 살짝 저에게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친근하게 반겨주시는 사람이 있어서 저는 원광사에 방부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대만 중부 타이중에 ‘각군(覺群)’이라는 주간지가 있었는데 태허 대사께서 상하이에서 창간하시고 대동 스님이 대만으로 옮겨왔지만 편집할 사람이 없었기에 저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제가 가서 편집을 한번 하였는데 안전원들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경고를 해주고 나서 저는 더 이상 타이중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교혁신운동을 위하고 산속 불교가 사회 안으로 걸어 나오도록 고취시키고자 때마침 타이베이에 있는 ‘자유청년’ 주간지에 끊임없이 글을 써서 기고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만 치안부서에서는 “간첩혐의가 있다”며 자항 스님 등을 포함한 100여명의 출가자를 체포해 모두 구금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구명 노력으로 풀려난 후 우리들은 사찰에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절 안에 머물면서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1년이 넘은 후인 1951년, 빈승은 신죽지역 청초호로 가서 교무주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설립자 대성(大醒) 스님은 중풍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고 주지 무상(無上) 스님은 두타행 수행자였기에 교육에 대해서는 묻지도 듣지도 않으시고 전권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부대중으로 구성된 60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심오(心悟), 심연(心然) 두 스님께 한 분은 불학강의를, 다른 한 분은 불교사 강의를 맡았고 저는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기타 외전 과목은 당시 석유회사 연구소 이항월(李恆鉞 :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불교를 소개함’의 작가)와 정도유(程道腴) 등 과학자들이 수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불교혁신을 하려면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지만 여전히 체육을 장려했습니다. 저를 지원해주는 왕정법련 거사가 타이베이에서 탁구대와 탁구공, 배구공 등 운동기구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배구공을 들고 학생들에게 운동하는 법을 가르치니 모든 학생들이 한명 한명 다 뒤로 물러나며 공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저는 정말 탄식이 나왔습니다. 그전에 어린 학생이었을 때는 운동을 주장하다가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는데 이제 학교 책임자가 되어 체육활동을 장려하여도 학생들이 공에 손을 대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혁신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강습회를 타이베이로 옮겨간 것을 계기로 저도 그곳을 떠났습니다.

비록 경찰의 감시를 받았지만 청초호에서부터 빈승은 길거리 강연에 나서면서 불교 전파에 집중하였습니다. 1953년 봄, 불교 계파의 배척을 받던 저는 의란지역 재가불자들의 요청을 받고 의란으로 강연을 갔습니다.

당시 매주 토요일에 염불회를 거행하였고 저는 모두를 위해 ‘보문품’을 강설하였습니다. 본래는 며칠간의 임시 과정일 뿐, 일정이 끝나면 떠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의 인연이란 예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연이 끝나고 남녀노소 모두가 재차 남아달라며, 거의 무릎을 꿇고 빌듯이 제가 떠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작은 뇌음사 30~40평의 법당 안에는 크고 작은 불상과 신명상이 100여 존이 넘게 봉안되어 있어서 100명 정도의 신도가 염불을 하려면 다들 법당 밖 복도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정법을 펼치려면 좌선과 염불을 근본으로 해야지 이렇게 복잡한 신앙을 하는 것을 저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뇌음사 안에 있는 모든 신명상과 많은 부속물들을 모두 치우고 법당을 사람들이 참배하는 순수한 공간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토속신앙과 불교는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역의 다른 계파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들이 저의 이런 행위를 대역무도하다고 여기면서 하마터면 뇌음사 관리인에 의해 쫓겨나 의란을 떠나게 될 뻔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정법을 펼치고자 하는데 누군가 내쫓으려 한다면 저는 더욱 확고한 의지로 떠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의란 이결화(李決和)와 임송년(林松年) 등 저를 옹호하는 청장년불자들도 많았기에 저는 의란에서 계속해서 청년교화운동과 불교가 사회와 함께하는 홍법 포교를 펼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빈승은 합창단을 만들어 사찰에서 음악이 끊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나중에 토요염불회를 의란염불회로 바꾸었고 아무런 명분도 요구하지 않고 빈승은 그들을 위해 강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절에서 살고 있던 군인 가족 세 가구가 이사를 하도록 하여 장엄하고 청정한 도량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의란이 면단위 크기의 작은 지역이지만 주민들이 매우 순박하여 빈승도 기꺼이 의란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저는 불교혁신운동을 시작할 수 있겠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가장 먼저 빈승은 문리(文理) 보습반을 열었고 이어서 문예반을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의란중고등학교, 의란농업학교, 난양여자중고등학교, 육군통신병학교의 선생님들도 모두 우리들 활동에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선생님들의 지원이 있게 되면서 순식간에 많은 지식인들의 동참으로 염불회의 면모가 갑자기 바뀌었습니다. 비록 비좁은 절 안이나 동네 마당을 빌리기도 했지만 제가 조직한 합창단과 아동반, 학생회, 홍법대(弘法隊)의 활동으로 마치 학교처럼, 절 안이나 동네 마당에선 날마다 노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많은 청년학생들로 하여금 지역포교에 참여하게 하여 기륭의 서방(瑞芳), 후동(侯硐), 청동갱(菁桐坑), 정쌍계(頂雙溪), 복륭(福隆)에서부터 두성(頭城) 남쪽으로 나동(羅東), 소오(蘇澳) 등 의란 현의 모든 기차역을 따라 포교하였고 결국에는 모든 지역이 우리들의 도량이 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수많은 토속신앙과 도교사당에서도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공간을 빌려주면서 협조해 주었습니다. 특히 사극화(謝克華) 역장이나 심지어 운송반장 장문병(張文炳) 등 각 기차역의 근무자들도 불자가 되었습니다. 그 어느 시기였던가요, 여러 곳으로 포교활동을 가야 하는데 기차표를 살 돈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들의 활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주고 사회를 이롭게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지 그들은 다른 출입구로 청년포교대원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주어 거액의 차비를 절약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20여년을 사는 동안 이러한 것들이 기반이 되어 주었고 이 많은 사회인사들 그리고, 저를 도와서 작곡하고 음악을 가르치던 양용부(楊勇溥), 많은 신도들이 염불회의 활동방법 등을 대만 각지로 널리 전파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등(馬騰)’, ‘왕보유(王普有)’는 대만 남부 강산(岡山) 지역에 가서 ‘주라한(周羅漢)’의 도움을 받고 염불회를 만들었는데 현재 불광산 강산포교당은 ‘주라한’의 저택이었습니다. 기타 지역의 호미(虎尾) 염불회, 용암(龍岩) 염불회, 타이베이 염불회, 두성(頭城) 염불회 등도 이러한 인연으로 줄지어 출범한 것입니다.

각 지역의 염불회 간부들 모두가 의란에 와서 정법불교의 기본훈련을 받으면서 대만불교가 천천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비록 경찰들의 일부 간섭을 받았고 빈승에 대한 지역 인사들의 우려도 있었지만 우리 삼륜차 대열은 큰 스피커를 싣고 “우리들의 불교가 찾아왔어요! 어르신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불교가 왔어요! 우리들의 불교가 왔어요!”라고 알렸습니다. 그 당시는 장개석의 부인이 이끄는 기독교가 세력을 떨치던 시절이라 우리는 간신히 부지해 나갈 수 있었지만 이렇듯 큰소리로 불교를 외쳤고 불교 역시 점차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대만의 수계산림, 대학교 동아리, 라디오에서 불교의 목소리 등 프로그램과 △이병남(李炳南) 거사가 타이중에 세운 불교연사(蓮社) △자운 스님의 봉산(鳳山)지역에서의 홍법교화 △광자(廣慈) 스님의 팽호(澎湖)에서의 포교 △타이베이 중국본토 출신 일부 스님들의 강연설법 등에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금동(林錦東)’, ‘임대갱(林大賡)’, 본토출신의 ‘주선덕(周宣德)’, ‘주경주(朱鏡宙)’, ‘조항척(趙恆惕)’, 입법위원 ‘동정지(董正之)’와 정치적인 지위와 덕망을 가진 ‘장가(章嘉)’ 대사의 후원으로 대만의 불교활동이 일시에 번창하고 발전하였으니 대단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일대사 인연으로 세간에 출현하셨듯이 일대사 인연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이 대만에서부터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58호 / 2016년 9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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