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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정치화상으로 불리게 된 까닭-상

“국민당원 아니면 포교가 불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성운대사와 인연이 깊은 중국 양주 감진도서관을 찾은 장쩌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2009년 4월 15일 도서관을 둘러보고 있다.

“빈승은 “정사(政事)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를 주장합니다. 정사에 임하는 이치는 포용과 평화, 존중, 평등으로 전 국민을 복되게 하는 것으로, 중화문화에서 ‘왕도(王道)’는 ‘패도(覇道)’ 보다 중요합니다.”

빈승을 아는 분들은 저에게 많은 이름이 있는 것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빈승을 ‘정치화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빈승이 어려서 출가하여 일생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고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화상’이라는 호칭을 아주 싫어합니다. 심지어 저와 정부관직에 있는 사람들 간에는 간혹 방문을 받은 경우 외에는 별다른 왕래도 많지 않은데 어째서 제가 ‘정치화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요?

정치가 본래 나쁜 것은 아니어서 영국의 처칠, 미국의 링컨이나 루즈벨트, 독일의 전임 헬무트 콜 총리 같은 유명한 정치가들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국민의 복지를 모색하면서 세상에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일부 정객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득을 추구하고 나라와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존경받지 못하였습니다.

정치화상, 빈승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를 ‘정치화상’이라고 부르는데 제가 정치인입니까? 아니면 정객입니까? 문관에 속합니까? 아니면 무관입니까? 제가 어떤 정치활동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정치화상’이라는 이 호칭은 아마도 제가 국민당 당원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언제 국민당 ‘당무고문’으로 위촉되었는지 저 자신도 모르고 임명장을 받은 적도 없으며 제가 ‘당무고문’이라고 아무도 제게 전해준 사람이 없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 국민당 ‘자문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그 어떤 사람으로부터 통지도 받지 못했고 임명장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단지 신문에서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의 인사명단 속에 ‘성운’이라는 두 글자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민당 당원이었으니 국민당에서 저에게 무슨 명분을 주던지 저 역시 거절하거나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빈승이 국민당 당원이 된 것을 말하자면 18세 되던 그 해 중일전쟁이 끝나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입니다. 당시 우리 불학원 강사명단에 공민과목을 강의하던 선생님께서 언변이 상당하셨는데 우리들 동기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우리 동기들에게 모두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원이 되면 무슨 권리가 있게 되고 무슨 의무를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우리들 모두에게 한 장씩 당원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출가 본찰 대각사로 돌아가 있던 어느 날, 사형을 대신하여 절에서 백리 떨어진 집에 재(齋)를 지내러 다녀와야 했습니다. 황량한 산길을 걷다보니 국민당이나 공산당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서 국민당 당원증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만약 공산당원에게 들키게 되면 목숨을 보존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원증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신발 틈에 밀어 넣었는데 백리 길을 걸어서 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돌아와서 보니 이 당원증은 이미 밀가루처럼 뭉개져 버렸습니다. 저는 이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출가 수행자인데 “본래 있는 것이 없는데 티끌을 묻힐 필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23세 때 대만으로 건너와 1~2년이 되었을 당시 태허 대사와 장가 린포체가 함께 항일전쟁 승리 이후 ‘중국불교회정리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그 당시, 국민당 ‘창당 원로’로 불리던 이자관(李子寬) 노거사가 우리들을 보고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않고 대만에서 불법(佛法)을 펼치려면 활동에 어려움이 있을테니 여기 계신 스님들 모두 국민당 당원으로 참가하도록 하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만에는 장부인(송미령)의 신앙심이 매우 강한 기독교도였기 때문에 모든 공무원이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진급하기 어려웠고 기독교로 신앙을 바꾸지 않으면 외국으로 출장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우리 출가인들이 포교활동을 하려고 해도 국민당 당원이 아니면 경찰들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기였기에 빈승은 홍법 포교에 매우 열심이었고 “만약 국민당 당원이 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홍법 활동에 곤란이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자관 거사에게 “출가인은 당원이 되더라도 당을 위해서 일을 할 수도 없는데 단지 당원이라는 그 명분은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국민당운영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게 해주고 우리들에게 당비를 내라고 하지 말고 우리가 당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도록 해 주세요. 우리들이 대만에서 불법을 펼치는데 있어서 국민당 정부의 집권 아래 있으니 우리는 정부에서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나중에 10~20년이 지나도록 당과 관련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한 적이 없으며 간혹 지역 포교에서 제가 국민당 당원이라는 것을 경찰이 알게 되면 확실히 적지 않은 편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빈승은 국가에 좋은 정책을 건의하였습니다. 1989년, 국민당 ‘삼중전회(三中全會)’에서 총통 장경국 선생이 빈승을 출석하라고 지명하였고 회의에서 발언을 하라고 하였는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조금 긴장되었습니다. 회의가 타이베이 양명산 중산루에서 열렸는데 국민당 비서장 마수례(馬樹禮) 선생이 먼저 정치업무 보고를 하였고 이어서 국방부장관인 학백촌(郝柏村) 선생이 국방업무보고를 하였습니다. 이때 어떤 선생이 종이 한 장을 저에게 건네주면서 “의장(장경국을 말함)께서 오후에 의견을 발표하시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빈승에게 발표를 하라고 했으니 출가인으로서 저는 거짓으로 발언할 수 없었고 공적을 칭송할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당시 국가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던 저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 가지 의견을 다음과 같이 건의했습니다.

첫째, 대만의 본토출신 인사들이 대륙에 가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정부가 개방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가 대만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는데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고 가족이 있어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일부 노병들은 고향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양안의 전쟁이 있었던 일로 많은 백성들이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사람 노릇을 못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국민당 한 당이 집권하지 말고(당시에는 아직 민진당이 없었음. 역자 주) 국민당이 개방되기를 바랍니다. 국민당원이 아닌 고옥수(高玉樹), 구련휘(邱連輝) 등 반대 인사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합니다. 당원이 아닌 사람들도 유능한 인물들이 많은데 기용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아깝습니다. 만약 그들을 정부에서 받아들인다면 정부의 역량이 더욱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불교가 대학교를 설립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대만에는 천주교에서 설립한 보인(輔仁)대학교와 정의(靜宜)대학교가 있고 기독교에서 설립한 동오(東吳)대학교와 동해(東海)대학교 등이 있습니다. 동남아의 수많은 불교도들은 대만에 불교에서 설립한 대학교가 없다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넷째, 국가에서 체육을 발전시키기를 희망합니다. 국제적으로 소년야구, 청소년야구 등이 국가에 많은 명예를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전쟁을 하는 시기가 아니므로 양안 간에도 체육시합으로 평화발전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민주의의 자유’, 민주, 균부(均富)로 중국을 통일하자고 하는데 이 길에는 전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쟁으로 지출될 많은 비용을 체육발전에 지원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빛낼 수 있습니다.

또 무슨 건의를 했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중앙일보’ 1면에 이 발언들이 실렸습니다. 이 발언의 기록이 국민당의 문서로 보존되었다고 누군가 나중에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날 ‘학백촌’은 빈승에게 “오늘, 마수례를 포함해 우리 양주사람 세 명 모두가 말을 아주 잘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당정 업무에 대해서 잘 모르고 또 관직에 올라 이름을 날리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을 말해 국가와 국민과 불교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미래가 더 좋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불자의 책임입니다.

이후 장경국 선생이 마음을 바꾸어 대륙이산가족 방문개방과 계엄령 해제를 점차 실시하였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출가인 조차도 이러하기를 바라니까 그분도 당연히 결재하셨지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장경국 선생이 부하의 건의를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제가 출가인으로 그 분의 부하나 관료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대륙과의 왕래에 제가 공로가 있다고 감히 생각하지 않으며 저 개인의 능력으로 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국민당에서는 ‘삼민주의 통일중국’의 조직을 만들어 저를 상무위원으로 추대했는데 전임 ‘해기회’(海基會 : 대만의 민간조직인 해협교류기금회. 역자 주) 이사장 고진보(辜振甫) 선생과 원탁회의를 같이 한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빈승이 ‘정치화상’이라고 불리는 일을 신문잡지에서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칭찬보다 비방이 더 많았고 저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신은 출가인인데 어찌 정치에 참여하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줄곧 마음에 걸렸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불교도는 사회에 대한 관심과 국민이 잘 살고 즐겁게 사는 것을 남의 일이라고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항전승리 초기 태허 대사는 당을 조직해 달라는 장개석의 요구를 거절하고 금후에 불교의 정치에 대한 입장으로 “정사(政事)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問政不干治)”라는 주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태허 대사의 고견에 두손 들어 찬성합니다. 우리 출가인이 관직에 올라 경찰국장이 되거나 군수시장이 되는 것은 불편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법위원이나 국민대표, 감찰위원 등 민선 의원이 되는 것은 사양하지 말고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통치하고 국민의 행복에 관한 일이라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정사에 관심을 갖되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라는 이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중에 빈승이 가오슝 수산사(壽山寺)에 있을 때는 이미 1961년이었습니다. 국민당 가오슝시당부 주임위원을 맡고 있는 계리과(季履科) 선생이 저에게 가오슝시 입법위원에 출마해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미 대만의 선거가 국민을 위한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뽑는 자리가 아니고 완전히 욕설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선거에 참여하면 조상 8대까지 찾아내 치욕을 주는 것만 아니라 저의 교주이신 석가모니부처님도 불러내 모욕을 줄테니 그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능력이 부족함을 이유로 정중하게 사양했던 것입니다.

번역=이인옥 전문위원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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