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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없으나 무한히 작용한다

기자명 법상 스님
  • 세심청심
  • 입력 2016.11.15 13:56
  • 수정 2016.11.15 13:57
  • 댓글 1

달마 스님의 무심론에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제자와 화상의 대화가 나온다. 제자가 묻는다. “마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한다. “마음은 없다” 다시 묻는다. “스님께서 마음이 없다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죄와 복도 없어야 할 텐데, 무슨 까닭에 중생들은 육도윤회를 하면서 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것입니까?” 답한다. “중생은 허망하게 해매면서 마음 없는 가운데 헛되이 마음을 만들어내고, 여러 업을 지으며 헛되이 집착함으로써 있다고 여긴다. 그 까닭에 육도윤회하며 삶과 죽음이 이어진다. 비유하면 사람이 어둠 속에서 나무 등걸을 보고 귀신으로 여기고,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여겨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마음·본래면목 등은
실체없는 방편이기에
언어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일 뿐

중생들은 그 마음 없음 속에서 그저 무심하게 존재하면 되는데, 억지로 헛된 망상을 일으켜 헛되이 뱀이 있다거나 귀신이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헛되게 그 과보의 세계인 육도에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세심한 답변에도 제자는 또 묻는다. “보리와 열반을 얻을 수 없다면, 과거 모든 부처님이 보리를 얻은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답한다. “다만 세속제의 문자로써 말하는 것일 뿐, 진제에서는 진실로 얻을 것이 없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보리는 몸으로도 얻을 수 없고,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했고, ‘금강경’에서는 ‘얻을 수 있는 작은 법도 없다’고 했다. 모든 부처님은 다만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었다.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얻었을 뿐이다. 다시 제자는 묻는다. “마음이 없다면 나무나 돌에도 마음은 없으니 같은 것 아닙니까?” 답한다. “마음 없는 이 마음은 나무나 돌과는 같지 않다. 마치 하늘북과 같아서 마음은 없으나 저절로 여러 묘한 법을 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여의주와 같아서 마음은 없으나 여러 변화된 모습을 잘 드러낸다. 비록 마음은 없으나 법의 실상을 잘 깨닫고 지혜를 갖추어 자재하게 반응하고 작용한다.”

이 깨달음의 세계는 아무 것도 없는, 무심을 깨닫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공허해 할 필요는 없다. 바로 그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무한한 공능이 있고, 무한한 지혜로 무한한 작용을 이루어 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없음 위에 드러나는 것이니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다. 해도 한 바가 없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진정 자유로운 것이지,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깨달음이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느라 진정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고 여기는 본래면목, 불성, 마음은 실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로만 존재하는 허구요 방편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언제나 화두의 낙처가 어디냐를 중요시 여긴다. 그런데 바로 그 낙처, 귀결점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손으로 붙잡아 만질 수 없고, 있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즉 마음, 본래면목, 불성은 육근의 대상도 육식이라는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 법상 스님
목탁소리 지도법사

 

그러니 당연히 육근과 육식으로 이해하려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것은 무위법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불성, 본래면목, 마음은 우리가 붙잡거나, 얻거나, 만지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다. 선어록을 읽거나, 불성, 혹은 본래면목, 마음이라는 용어를 만날 때 우리는 곧장 생각으로 헤아려서 불성이나 본래면목이라는 어떤 실체적인 것을 붙잡거나, 찾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붙잡아지거나 찾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성, 본래면목, 마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 깨달음에 대한 그 어떤 상도 가지지 말라. 선불교가 참나, 마음, 본래면목을 말한다고 해서 초기불교의 무아와 어긋난다는 생각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선불교의 마음은 곧 마음 없음이며, 참나는 곧 무아다.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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