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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보리선수 진푸티상사

“중생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게 부처 마음”

▲ 진푸티상사는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지극한 수행으로 삿된 욕망에서 벗어나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리선수 수행을 배우는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무척 기쁘고 반갑습니다. 올 한해 수행을 통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또 좋은 결실을 맺는 한해가 되시기를 발원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 이후에도
많은 깨달은 이 나왔지만
스스로 부처라고 칭하지 않아

진정한 깨달음 얻고 나면
‘부처’라는 호칭은 의미 없어

진정으로 부처 되는 길은
중생 위한 대자대비한 원력

오늘은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묻습니다. 2500년전 부처님 이후 깨달은 분이 수없이 나왔을 텐데, 왜 그분들에 대해서는 부처님이라고 칭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2500년 전 석가모니부처님 이후 깨달은 부처님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출연 이후 수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얻고, 공덕이 원만해서 성불한 보살이 적지 않습니다. 또 수많은 아라한들이 출연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스스로를 부처님이라고 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그냥 불제자, 수행자, 일반 불교신자로 낮춰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의 지혜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묵묵히 자비심으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운 것이 많고, 지식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곤 주변에서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정말 깨달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정말로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안 받고 하는 것에 대해 크게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도 “깨달음이라는 것은 상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 찾아올 수 있는 심리적인 장애를 경계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는 신통력이 생기고 몸속에서 무한한 에너지가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에너지를 느끼게 되면 마치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도 뛰어넘어야 할 장애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달아서 모든 것이 하나로 합일되면 그 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무상의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지에서는 ‘부처’니 ‘보살’이니 하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런 말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를 또 하나의 상에 가두는 일이 됩니다.

깨달음의 경지는 무한히 높습니다. 부처님은 그 높은 진리의 경지를 체득하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를 부처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왜 부처님은 ‘부처님’이라고 부르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석가모니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징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 혹은 지혜로운 사람, 자비로운 사람의 의미를 나타낸 말입니다. 처음 불교가 만들어져서 여러 나라로 전파될 때 부처님은 불교를 창시한 성인의 의미로써 특정인을 지칭하는 명사처럼 불렸던 것입니다. 일종의 이름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부처라고 자칭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여기고,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집착에 빠진 상태입니다. 깨달음이라는 상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깨달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상을 뛰어넘었을 때 비로소 지혜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간혹 깨달음을 수행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모르면서 말이지요. 물론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깨닫겠다’는 큰 발원을 세우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이라는 상은 또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상에 집착하게 된다면 결국 수행을 통해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발심하고, 모든 중생이 함께 행복해지기를 발원하는 그런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부처가 되는 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깨달음을 얻었다면 내가 부처님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250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얻은 분들이 스스로의 상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깨달은 분의 모습은 모두 석가모니부처님과 같은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불상의 모습이 하나인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진정 성불한 사람의 모습은 일반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불상의 모습은 바로 중생상인 것입니다.

일반인과 부처님이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입니다. 바로 ‘대자대비’인 것입니다. 깨닫겠다는 사람의 최종 목표는 결국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고, 그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져내겠다는 그 마음이 스스로의 신앙이 되어야 하고,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음 없이 단순히 ‘수행을 통해 높은 경지에 도달하겠다’ ‘깨닫겠다’고 하는 것은 집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상은 버려야하고, 놓아야 합니다.

몇 년 전 부산에서 한국의 큰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스님은 아주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그 스님은 어느 날 아주 고급스런 법복을 입고, 저에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어떤 경지에 있는 것 같은가? 내가 나한의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가?”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스님은 저에게 대뜸 “천안(天眼)이 열린 사람이라고 하더니 그런 사람이 아니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스님은 또 “다른 사람들은 내가 나한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던데, 왜 당신은 그걸 모르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한은 모르겠고, 그냥 남자로 보입니다”고 답했더니, 그 스님은 불쾌한 듯 가버렸습니다.

‘나한’은 탐욕이 없는, 육도윤회에서 벗어난 경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삿되게 추구하는 것이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합니다. 일반인들이 이루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경지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처님의 경지는 아닙니다. 부처님은 그런 경지를 넘어 반드시 발원하는 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생의 ‘이고득락’을 염원하는 원력입니다. 중생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까지도 과감하게 던질 수 있는 그런 원력 말입니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담’에는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산길을 지나가다 병든 호랑이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호랑이는 새끼를 낳자마자 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젖을 물려주지 못해 새끼들조차 죽음에 임박한 상태였습니다. 어미호랑이는 부처님에게 간절히 청을 합니다.

“당신의 팔 하나만 줄 수 있나요?”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기꺼이 자신의 팔 한쪽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을 먹은 호랑이는 다소 기운을 차렸지만, 배고픔을 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호랑이는 다시 “당신의 몸을 준다면 고맙겠습니다”하고 청했습니다. 어미와 새끼호랑이를 가엾게 여긴 부처님은 결국 자신의 몸까지도 줬습니다. 전생에 이런 공덕으로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흔쾌히 내어줄 수 있는 게 바로 부처님의 경지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오로지 다른 중생들을 위하는 그런 마음. 그것이 부처가 되려는 사람이 꼭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나한과 다른 경지입니다. 나한 역시 삿되게 추구하는 바가 없고, 허황된 욕심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기에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력을 냈습니다. 자신의 고통해결을 넘어 모든 중생의 고통까지 구제하겠다는 그 원력. 그것을 갖춰야 합니다.

저 역시 아직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무한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늘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발원하고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아닌 주변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고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를 만나게 될 것이고,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것입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지난 1월14일 부산 송정 약사선원에서 열린 보리선수 진푸티상사 초청 즉문즉설 법회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1377호 / 2017년 1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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