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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

“욕심이 분노 일으키고, 분노가 어리석은 행동 이끌어”

▲ 영진 스님은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된다”며 “매순간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출가에서 열반까지’라는 주제로 지난 1주일간 집중수행을 하고 회향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집중수행에 동참한 여러분이 고맙고, 부럽기도 합니다. 사실 부처님이 출가해서 열반하기까지 실제로는 45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1주일 만에 끝내는 것입니다.

출가, 진리 길로 들어서는 것
새로 마음 다잡는 것도 출가
열반은 탐진치 끊어진 자리

편리함 좇으면 잃는 게 많아
집착 버리는 게 행복의 시작
매순간 만족하는 삶 살아야

출가란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마치 ‘불이 난 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출가는 불난 집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결혼해서 집을 나가는 것도 출가라고 하지만 불교에서의 출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출가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부처님께 발원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일까요? 오늘이 열반재일인데, 흔히 이날을 부처님이 돌아가신 날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돌아가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열반이란 부처님께서 완전한 무상정각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 당시 어느 날, 한 외도가 부처님께 찾아와 물었답니다.

“대사문이시여, 당신은 깨달아 니르바나(열반)의 경지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니르바나는 어떤 경지입니까? 또 니르바나를 얻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그것은 열반과 관계가 없는 질문”이라며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계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부처님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 외도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 자리를 나서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은 옆에서 지켜본 사리불 존자는 “바라문이여, 우리 스승께서는 그 물음에 답을 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대신 답을 했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열반의 경지를 묻는 외도의 질문에 “열반은 활활 타오르는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꺼진 상태”라고 답했습니다. 탐진치 삼독이 끊어진 완전한 그 상태가 열반이라는 것이지요. 그러자 그 외도는 “그럼 열반을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사리불 존자는 “바라문이여, 여기 있는 이 나무가 타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무가 다 타고 나면 재만 남고, 불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당신은 불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과 똑같습니다”고 답했습니다. 열반의 경지는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지를 가보지도 않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결코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체득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을 정리한 것이 ‘유교경’입니다. 부처님은 평생 수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등명 법등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선지식을 의지해서 가는 길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궁극에는 본인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위해서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유교경’에서 소욕지족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작은 것에서도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괴로움이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인해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으로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가면서 욕심을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끊었다고 해도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매순간 노력해야 합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없지만,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다시 공간이 되는 것처럼 순간순간 만족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이 순간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 것이 열반재일을 맞는 불자들의 마음자세일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한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뚜렷한 기준은 없습니다.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하루 세끼 이상 먹을 수는 없습니다. 많이 가지면 살기에 조금 편리할 뿐입니다. 그러나 편리함을 좇게 되면 잃는 것도 많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깨달음이니 진리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위없는 깨달음은 정한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어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마치 물과 같습니다. 물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세모난 그릇에도 들어갈 수 있고, 네모나 둥근 모양의 그릇에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리, 깨달음이라는 형태에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하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물같이 써야 합니다. 고이게 가두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금강경’에서 “응당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것이 깨달은 자의 일상생활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마음을 비우고 수행을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수행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것이라도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목숨을 각오하고 집중할 때 진정한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리산 백장암 선원에서 동안거 수행을 할 때였습니다. 그 선원은 너무 작아서 9명 정도의 스님들만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제게 맡겨진 소임은 선원 위에 있는 초가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화두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아궁이 안에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쥐였습니다. 추위를 피해 굴뚝에 숨어 있던 쥐가 참다못해 뛰쳐나온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이 법당에서 불이 났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은 한가롭게 ‘저 불이 왜 났을까’를 따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쥐처럼 튀어나가야겠죠. 생사를 걸고 불 속을 뚫고 뛰어나가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공부가 안 되는 줄 아십니까? 쥐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목숨을 버릴 각오로 수행을 해봤냐는 겁니다. 그 쥐를 보면서 저는 ‘이 순간 깨어있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습니다.

선은 현재, 이 자리를 바로 보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행생활을 많이 해도 가정에서 부처님 말씀이 살아 숨 쉬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늘 그 자리에서 깨어있도록 성성적적해야 합니다. 적적이라는 것은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일상에서 탐진치 삼독을 버리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탐내는 마음은 화를 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화를 내면 다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고 고요하게 하면서 그 자리에서 깨어있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여러분들도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흔히 열반을 얻게 되면 4가지 덕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말하는 데 '상'은 영원히 변치 않고 항상하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에서 항상하고 영원한 것은 없지만 열반을 성취하고 나면 법희선열이 항상하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낙’으로 고통이 없는 편안한 덕을 말합니다. 잠깐 머무르는 즐거움이 아니고, 완전한 즐거움입니다. 세 번째는 ‘아’입니다. 불교에서는 본래 무아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은 연기적 관계에 있고, 공이기 때문에 영원하고 고정된 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을 얻게 되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완전하게 버린 아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진아를 말하는 것이지요. 마지막 ‘정’은 번뇌에 물들지 않고 지극히 청정한 덕을 말합니다. 지금 밖의 날씨는 흐리지만, 태양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성도 본래 청정한 것인데, 일상의 업력에 의해 어둡게 휩싸여 있을 뿐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면 자성 청정심을 회복하게 됩니다.

오늘은 출가에서 열반까지라는 주제로 수행을 했고, 회향하는 시간입니다. 회향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1주일간 닦은 공력을 모든 중생들에게 돌려주는 그런 시간인 것입니다. 열반을 성취한 부처님께서 마지막에 남기신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는 그 주옥같은 말씀을 깊이 새기고 순간순간 정진하는 불자가 되시길 발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리=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이 내용은 3월12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열반재일 회향법회에서 백담사 무금선원 유나 영진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384호 / 2017년 3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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