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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원만심의 열반

“동짓날 팥죽 먹고 자시에 눈 감겠다”

▲ 그림=근호

경기도 안성시와 도계를 이루고 있는 충북 음성군 삼성면에 백운산이 있다. 백운산의 본래 이름은 서운산이었다. 고려 중엽 안성 칠장사의 한 도승이 동쪽 산자락에 오색영롱한 구름이 뻗치는 것을 보고 서운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청주목사 정구가 이 산 밑에 운곡선원을 창건하면서 산 이름이 백운산으로 바뀌었다.

고심사 창건주 고원만심 보살
엄정하고도 다정한 성품 지녀
날짜·시간 예고하고 죽음맞아
재가자 죽음도 의젓할 수 있어

백운산 골짜기 미륵골에 고심사(高心寺)가 있다. 고심사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활연대오(豁然大悟)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을 만큼 장쾌하다. 맑은 호수가 햇빛을 반짝이며 심청정국토청정(心淸淨國土淸淨)을 설하고, 좌우로 뚫린 고속도로는 사람살이의 길(道)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설하는 듯하다. 겹겹으로 이어져 강원도 방향으로 펼쳐진 산들은 불제자의 슬기로운 신행·구행·의행이 중중첩첩한 경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심사의 창건주는 고원만심(高圓滿心) 보살이다. 원만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나 삼태기를 돌려 쌓은 듯한 산골짜기 한 곳을 가리키며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수십 군데를 찾아 헤맨 끝에 미륵골에서 꿈에 본 것과 똑같은 장소를 찾아내어 불사를 시작하였다. 불기 2498(1954)년 봄, 시주들의 정성어린 공덕이 모이고 쌓여 개창 법회가 열렸다.

원만심의 본명은 고선자이다. 1901년 평남 진남포에서 태어나 경성간호학교를 나와 현 서울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의대에서 수간호사로 일하다가 같은 병원 전문의였던 권영억과 혼인하였다.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 학교에 갔다가 원서 접수가 이미 끝났다며 거절당했지만 사흘 동안 교문 앞에서 고집하여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고 한다.

사찰 둘을 창건하고 하나를 중창한 원만심의 성정은 엄정하면서도 다정했다. 아들이 군대에 갈 때는 방안에서 인사를 받았을 뿐 대문까지 배웅하지는 않았고, 가장으로서 아들이 식사를 할 때면 자신의 식사 여부와는 상관없이 아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옆자리를 지켰다.

며느리에 대한 사랑은 친딸 이상으로 깊었다. 집안 일을 며느리와 의논해 결정했고, 화를 낸 뒤에는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봉건적 상하 관계가 엄연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윗사람이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었고, 며느리 또한 아랫사람이기 이전에 또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과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끝까지 마쳐내는 강단이 있었다. 어린 아들과 함께 논에 물꼬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새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집에 가져가자며 떼를 썼다. 집에 온 다음 원만심은 “새 새끼 엄마가 얼마나 슬퍼하겠냐? 새끼는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겠냐?”라고 말한 다음 아들을 이끌고 십리 길을 되돌아가 새 새끼를 어미에게 돌려주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원만심의 열반이다. 옳게는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 해야 아라한 성자의 죽음을 의미하지만 우리 전통에서는 열반이라는 말을 반열반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긴 해도 평범한 죽음을 열반이라 하지는 않는다. 원만심의 생의 마무리는 열반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큼 특별했다.

그녀는 나이 여든여섯으로 생을 마감하기 열흘 전에 이번 동짓날 팥죽을 먹고나서 자신은 가겠노라고 말했다. 시간까지 정해두었다. ‘옹근 삼일장’을 치를 수 있도록 자시(子時)에 가겠노라고 예고했던 것이다.

그녀는 며느리에게 상례에 쓰일 백 장 짜리 김 열 톳과 북어 백 마리를 준비시켰다. 얼음 창고에서 김치 한 독을 꺼내 상온에서 익힐 것을 지시했고,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 자신이 죽으면 사망 진단서를 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임종을 이틀 앞두고는 푸른 배냇똥을 누어 몸을 깨끗이 비워냈다.

드디어 동짓날이 왔다. 임종을 몇 시간 앞두고 그녀는 며느리의 친구들을 오게 하여 자신이 가고 난 다음 며느리를 도와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녀의 거동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연하고 침착했다. 그녀의 지휘를 받으며 상례에 쓸 김을 재던 사람들은 “저 노인, 가시는 거 맞아? 백수까지 사실 거 같은데.”라고 말하며 웃었다.

바깥 사람들을 다 돌려보낸 다음 원만심은 아들·며느리·손자·손녀와 함께 방에 누웠다. 잠시 후 그녀가 일어나 앉고 싶어했다. 그러나 기운이 부쳐 꼿꼿이 앉아 있기에는 무리였다. “평생 참선을 해오신 분들이나 앉아서 가시는 거예요.” 아들 오현의 말에 그녀는 수긍하는 듯 조용히 다시 누웠다.

원만심의 이마에는 가로 방향으로 주름이 석 줄 잡혀 있었고, 얼굴에도 주름이 있었다. 며느리 법계성이 보고 있는 동안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원만심의 얼굴에 있는 모든 주름이 조용히 펴졌다. 코가 잠깐 들려 올려졌다 내려왔고, 낯빛이 노란 기운을 띈 흰 빛으로 바뀌었다.

몇 차례 딸꾹질을 한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눈을 감은 표정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침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깨끗이 임종한 시각은 자시, 새벽 12시 15분이었다.

죽음은 삶의 일대사(一大事)이다. 부처님은 그 괴로움을 통절하게 느껴 출가하셨고, 역대의 큰스승들 또한 그것을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를 설했다. 불교는 번뇌를 다스리는 종교이거니와 수행자가 번뇌를 얼마나 다스렸는지는 죽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로써 분별된다.

죽음은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두려운 ‘하늘 사자’이다. 또 그것은 여섯 자 한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그 하늘 사자가 그 무거움으로써 수행자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그대는 그 짐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삶은, 그리고 불교는 우리에게 묻는다.

원만심은 재가 신자이다. 재가 신자라는 말은 중립적으로도 쓰이지만 출가 수행자에 비해 불교적 성취가 부족하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대개의 경우 그 말은 맞다. 그러나 ‘모든’ 재가 신자에게 그 말이 맞지는 않는다. ‘범주의 일반화의 오류’는 이 경우에도 삼가야 할 지성인의 덕목이다.

원만심의 열반은 재가 신자의 죽음이 얼마나 깨끗하고 의젓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분별은 필요하다. 그러나 출가와 재가가 분별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강물이 바다에 들어오면 강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다라는 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 영역에서 분별되는 것은 제망찰해(帝網刹海)를 건너는 힘이 얼마나 장엄한가의 여부뿐이다.

김정빈 소설가·목포과학대교수 jeongbin22@hanmail.net
 

[1386호 / 2017년 4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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