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론 ③

회통·호국불교의 편협한 이론, ‘총화단결’ 외쳤던 독재정권서 부활

▲ 최남선(1890~1957)은 일제강점기 문인, 언론인, 사학자로 독실한 불자였다. 그는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지류로 치부하던 일제사학자들에 맞서 독자적인 북방 루트설을 제기함으로써 한국불교를 동서문화교류라는 폭넓은 시각에서 재조명했다.

필자는 일본 불교사학의 삼국불교전통사관 같은 편협한 국수주의적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지사관, 그리고 그 근거가 된 삼국불교전통사관에 입각한 역사인식이 한국불교사의 이해와 평가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 내자는 것이다. 또한 일본 불교인의 불교사 인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불교를 고립시켜 민족주의적 시각과 호교적 입장에서 한국불교 우수성의 논거로서 회통불교론과 호국불교론만을 되뇌이는 편협하고 공허한 논의에서도 벗어나자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최남선의 한국불교사 연구의 의의와 가치는 통불교론 자체보다 동서문화교류라는 폭넓은 시각으로 아시아 불교사의 전체적인 맥락과 전개과정에서 한국불교사의 이해를 추구한 넓은 안목과 그 구체적인 접근방법에 있다고 본다. 필자의 지견으로는 아직까지 한국학자 가운데서 최남선과 같이 폭넓은 안목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동아시아의 불교문화권, 나아가 전체 아시아 불교사의 맥락에서 한국불교의 위치와 성격을 거시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려는 노력과 그 성과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일본의 국수적사관 답습 대신
거시적인 안목서 접근 필요해

최남선 동서문화교류 차원서
한국불교사 거시적으로 접근

일본의 중국불교 일부 주장
북방루트 주장으로 정면 부인

일본의 호국·황국불교론은
경쟁적 식민지 진출 이어져

민중불교 개념이 대두되면서
호국불교론 강력한 도전 받아

최남선이 말하는 불교의 세계는 대단히 방대하다. 그는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하여 서역을 거치고 한 줄기가 남하하여 중국불교가 되고, 또 한 줄기가 계속 동쪽으로 진출하여 한국에 도달했다고 하여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 왔다는 통설을 거부하고 중국 루트가 아닌 새로운 북방 루트를 주장하였다. 이는 인도→중국→일본의 불교전래 루트를 설정한 일본불교의 삼국불교전통사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의의를 가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불교를 한국의 영향 아래 위치시킴으로써 일본의 불교사관을 완전히 뒤집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최남선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불함문화론’에서 주장한 불함(不咸) 계통의 문명 루트와 매우 유사하다.

최남선은 1922년에 발표한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동명(東明)’3, 1922)와 1925년에 탈고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조선급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1, 1927) 등 두 편의 논문에서 인류 역사에 나타난 3대 문명계통으로 인도유럽 계통, 중국 계통, 불함 계통을 들고, 그 가운데 불함 계통의 문명권이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 중국 동북부·몽골·시베리아, 그리고 멀리 카스피해까지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일본과 유구(오키나와)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최남선에 의하면 한국의 고대문명은 불함 계통의 문명으로서 중국문명과 구분되며, 일본문명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불교도 중국의 그것과 다르며, 일본불교의 연원이 된다고 하였다. 최남선이 일본 불교사학의 삼국불교전통사관을 빌려와서 역으로 그 불교사관을 비판한 것이지만, 실제 최남선의 불교사관의 내용은 일본사학에 대한 비판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방대한 내용과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원래 한국의 역사와 불교는 폭넓은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전개되어 온 것이며, 결코 폐쇄적으로 고립되고 편협한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 대승불교권인 동아시아, 나아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근본불교와 상좌부불교의 지역까지 포함하는 전체 아시아 불교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불교의 역사적 위치와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과 특성을 검토할 경우에도 다른 지역이나 민족의 불교와 비교하는 방법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한국불교사에 대하여 대외적으로 설득력이 큰 진전된 이해체계를 수립할 수 있고, 나아가 언젠가는 한국인 학자들에 의한 “아시아불교사”가 출간될 때가 오기를 기대한다.

일본 불교학계는 “아시아불교사”를 총서 형태로 이미 두 차례나 간행하여 우리를 훨씬 앞서고 있다. 1차는 1976년 전후 1세대 불교학자인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등 3인의 편집으로 ‘아시아불교사(アジア佛敎史)’ 20권을 간행하였는데, 체제는 인도편 6권, 중국편 5권, 일본편 9권으로 편성하고, 기타 지역과 국가의 불교는 모두 이들 세 나라에 각기 부속시켰다. 한국불교는 ‘중국편 Ⅳ’에서 동아시아 여러 지역(한자문화권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포함시켜 중국불교에 예속시켰다. 삼국불교전통사관에 의거해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틀에 포함시켜 다룬 것은 전전의 불교사관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서 이 책뿐만이 아니고 1970년대까지 일본 불교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런데 2010년 전후 3세대의 학자들에 의해 새로 편집 간행된 ‘신아시아불교사(新アジア佛敎史)’ 15권은 인도불교 3권, 중국불교 3권, 일본불교 5권으로 편성하고, 기타 지역의 불교는 각기 그 사이에 독립시켜 배당함으로써 체제 면에서 상당히 변모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또한 삼국불교전통사관을 비판하고, 아시아불교사는 다양한 특색을 가진 여러 나라의 상호교류와 상호영향의 역사였다는 점을 강조한 점이 주목된다.

한편 호국불교라는 개념이 일본불교에서 빌려온 것이었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근대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가주의적 불교를 지향한 일본불교가 ‘진호국가(鎭護國家)’ ‘흥선호국(興禪護國)’ ‘왕법위본(王法爲本)’ ‘입정안국(立正安國)’ 등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국가주의 고양과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온 것은 당연하였다. 일본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서 식민지 개척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한 것은 가마쿠라 신불교의 종파들인 정토진종·정토종·일연종·조동종·임제종 등이었다. 그리고 이들 종파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한반도에 진출한 종파는 정토진종의 오타니파(大谷派)였는데, 호국(護國)·호법(護法)·방사(防邪)의 삼위일체설을 주창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불교인들의 저술 가운데는 겟쇼(月性)의 ‘불법호국론(佛法護國論)’, 토리오 토구안(鳥尾得庵)의 ‘호법호국론(護法護國論)’ 등을 비롯하여 호국과 호법의 일치를 주장하는 책들이 잇달아 나옴으로써 호국불교론은 일본 불교계의 시대적인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 근대불교학의 호국불교론은 한국의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일본 근대불교사학의 개창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가 내한하여 1917년 4월27일 “일본불교의 특색”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그 강연 내용은 한국 불교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강연의 요지는 일본불교의 국가·황실과의 긴밀한 관계, 종교의 통일과 불교의 위상, 가마쿠라시기 일본적 불교의 완성 등의 문제였는데, 국가(國家)·황국(皇國)을 호위한다는 ‘호국(護國)’의 불교를 강조한 내용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이때 이능화·권상로·한용운을 비롯한 불교계의 젊은 지도자들이 참가하였으며, 그 강연 내용은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 5호에 번역되어 게재됨으로써 널리 읽히게 되었다.

대한제국시기 일본불교 각 종파는 경쟁적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와서 대한제국 황실의 존패(尊牌)를 설치하고 황제의 생일을 경축하는 법회를 개최하는 등 황도불교를 표방하면서 한국의 황실에 접근하였다. 그런데 한국을 병합한 뒤에는 경배의 대상을 일본 천황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하여 한국불교를 일본의 황도불교로 바뀌게 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에 순응케 하였다. 특히 1937년 이후 전시체제 아래서 호국불교에 대한 논의는 한국불교계에서도 전면에 대두되어 권상로 같은 대표적인 학승은 ‘임전(臨戰)의 조선불교(朝鮮佛敎)’(만상회(卍商會), 1943)를 발표하여 전쟁과 불교의 상관관계와 호국불교의 전통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조명기도 ‘조선불교(朝鮮佛敎)와 전체주의(全體主義)’(‘신불교(新佛敎)’12, 1940)에서 통불교론을 전체주의에 연결시켜 해석하였다. 그런데 일제말기의 전시체제에서 권상로와 조명기 등이 호국불교와 통불교라는 미명으로 친일과 전쟁협력에 나선 것은 이들 몇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한국 불교계와 조계종 교단의 구조적이고 체질적인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해방 뒤인 1960~70년대의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고양과 함께 호국불교론은 통불교론과 함께 다시 주목을 받게 되어 불교학계의 통설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일제말기 전시총동원체제를 발동하면서 전체주의적인 구호를 내세웠던 것과 비슷하게 독재정권의 총화단결이라는 기치 아래 불교의 통불교론과 함께 호국불교론이 재생된 것이다. 이때 불교학계에서는 통불교론과 호국불교를 주제로 한 공동연구와 학술회의, 그리고 서적의 출간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한국불교의 역사에서 호국의 사례들이 정리되어 체계화되었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에서는 1971년부터 1987년까지 5회에 걸쳐 ‘호국불교’와 ‘회통불교’를 주제로 한 공동연구 사업을 추진하여 그 연구결과를 기관지인 ‘불교학보(佛敎學報)’에 각각 특집호로 게재하였다. 각 권의 공동연구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호국대성護國大聖) 사명대사연구(四溟大師硏究)’(‘불교학보’ 8, 1971.9)
‘불교(佛敎)의 국가관(國家觀) 및 정치사상연구(政治思想硏究)’(‘불교학보’ 10, 1973.8)
‘불교사상(佛敎思想)이 고려(高麗)의 국난타개(國難打開)에 미친 영향’(‘불교학보’ 14, 1977.8)
‘한국불교(韓國佛敎)의 화사상연구(和思想硏究)’(‘불교학보’ 15, 1978.8)
‘불교(佛敎)의 주체적(主體的) 수용(受容)과 그 전개(展開)’(‘불교학보’ 24, 1987.12)

또한 1987년 11월 1~2일 국토통일원이 주최한 원효불교학술회의에서는 국내외 학자들의 논문 34편이 발표되었다(‘원효연구논총(元曉硏究論叢)’ 참조). 그밖에 호국불교론을 주제로 한 단행본으로는 김동화의 ‘신라불교(新羅佛敎)의 특성(特性)’(1959)과 ‘불교(佛敎)의 호국사상(護國思想)’(1976), 조명기의 ‘신라불교(新羅佛敎)의 이념(理念)과 역사(歷史)’(1962)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민중불교의 개념이 새로 대두되면서 호국불교론은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학문적 차원에서도 호국불교론은 회통불교론과 함께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호국과 호법의 의미, 국왕과 불교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추구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불교계와 불교학계에 미친 영향은 아직 미미한 실정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