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
39.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
  • 김용규
  • 승인 2017.08.29 11: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난까지 껴안아야 진실한 삶 마주하게 돼

이러다가는 언젠가 이 땅의 기후를 건기와 우기로 나눠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문기관에서는 한반도에 장마가 이미 끝났다고 밝혔지만 중부지방에는 길고 긴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예년의 흐름과 달리 이토록 길게 비가 내리면 숲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한 쪽에 양달이 생겼다면 다른 쪽에는 응달이 생기는 것이 만사의 이치, 긴 비는 숲의 어떤 생명에게는 기회가 되고 다른 어떤 생명에게는 위협이 됩니다.

빗속에서 떨어지는 과일 보며
길찾는 본질 잃어버림임 알아
스스로 길찾는 건 주인된 삶
붓다의 자취 따르는 첫 걸음


나의 기억으로는 십년 전에도 이렇게 오랜 기간 비가 내렸습니다. 당시 나는 서울의 삶을 멈추고 충북 괴산 여우숲으로 삶의 기반을 본격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 해 나는 100일 가까이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 물과 뒤섞이면 곤죽이 되는 성분인 흙으로 앞으로 살아갈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 날 하늘을 올려다보며 원망 아닌 원망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생계의 하나로 토종벌 농사도 함께 시작했는데 그 역시 긴 비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소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꿀벌들이 일을 하러 나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으니 쏟아지는 빗속에서 벌통 앞으로 다가가 넋두리 비슷한 당부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이 긴 비 이겨내시고 살아만 주시게나. 어떻게든 올해를 건너내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은 꿀벌을 향한 부탁이기도 했지만 실은 나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서울 땅에서 오직 강한 생존을 향해 삶 전체를 조준하고 살던 삼십 대의 어느 순간, 천둥처럼 마주한 인간으로서의 의문, ‘너는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을 품고 나 자신의 삶을 찾아 숲으로 나선 삶의 새로운 여정과 전환의 출발은 그렇게 긴 비와의 씨름이었습니다. 그때 내 삶은 두 발로 걷지 못하고 양 무릎으로 기어가는 것 같은 아픔과 좌절감이 지배하던 때였습니다. 뒷배를 이루는 숲은 저 긴 빗속에서도 푸른데 내 새로운 삶은 출항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목 놓아 울기도 하고 다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너무도 낯선 시공이 두려워 또 울기도 하던 시간이 그때는 참 많았습니다. 지금 다시 그때 나를 지탱했던 힘이 무엇이었는가를 나는 떠올려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낙과(落果)’, 낙과에 대한 성찰이 준 지혜였습니다. 모과나무에 달린 연두색 모과 몇 개가 긴 비에 검게 썩어가더니 어느 날부터 바닥으로 쑥 빠지듯 떨어지는 풍경을 보았습니다. 바람까지 더해진 세찬 비에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익어갈 날들을 기다리던 아까운 감이 투둑투둑 맥없이 떨어져 나뒹구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갈나무며 굴참나무에 옹기종기 달려 가을날을 기다리고 있던 도토리들이 채 익지도 못한 상태로 바닥에 즐비하게 떨어져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벼락처럼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잃는 것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의 본질인 것이구나.’ 단순히 말하면 신갈나무가 신갈나무로 살아내는 온전한 과정이 신갈나무의 도(道)이고 감나무가 감꽃을 피우며 감 열매를 추구하여 맺어가는 것이 감나무의 도일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나의 도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길을 찾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나의 그것일 것입니다. 생각건대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주인의 삶을 지켜내고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제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야 말로 바로 신의 뜻대로 산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며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을 발견하여 붓다의 자취를 따르는 첫 걸음이라 나는 믿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은 제 삶의 주인공으로 살기 위한 모든 이에게 긴요하고 절박한 여행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신작로처럼 곧고 순탄한 길이 아니기 쉽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은 구불구불한 오솔길이며 때로 다리 없는 협곡을 건너야 하는 길이기 쉽습니다. 명심할 것은 주인이 된다는 것은 구불구불한 길이나, 협곡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무들이 긴 비와 낙과를 회피하지 않고 제 길을 가듯, 기꺼이 스스로에게 닥치는 고난의 순간순간을 껴안아 그것마저 제 삶의 깊이가 되게 해야 비로소 마주할 가능성이 있는 사태일 것입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1405호 / 2017년 8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