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송이가 발밑에 툭 떨어지는 소리에 아-가을이 가고 있구나 하는걸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겨울을 맞이하는 채비를 이 세상은 또다시 하고 있겠지요. 일상 생활속에 분주히 움직이는 우리들 중년 여인네들도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틈새에 있으면 소녀적 감상에 젖어 노란 은행잎을 만져보고 싶고 산속깊은 곳의 먼지 쌓이지 않은 빨간색 그대로의 단풍잎도 하나따서 뺨에 대어보고 싶어진답니다. 그래서 가끔 시간을 내어 산에도 가고 또 산속의 절에 가서 참배도 하여마음의 평온을 얻어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은 초심자라 불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에서 느끼는 마음의 포근함이 아마도 법당에서 부처님 명호를 생각하며 조용히 앉아 있을 때, 살갗을 두드리는 맑은 공기와 향이 타면서
묵향속에 삶을 키우며"물은 대자비로 흐르는 지혜의 물이요, 먹은 능엄선정의 굳은 먹입니다. 선정의 먹으로 지혜수를 갈아서 실상 법신의 문자를 옮겨 씁니다." 오래전 어느 책에서 베껴 적은 구절인데 마음에 들어 내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먹을 갈아 습작을 할 때면 쳐다보게 되는데 침묵같은 정과 유유한 물흐름 같은 동이 하나의 진이 되는 기쁨이 그 속에 있다. 결혼초 비사교적이고 완고한 이기주의적 성격이 강했던 내겐 종가집 맏며느리의 역할이 벅차기만 했다. 더욱이 대책없이 사람만 좋고 절제가 없는 남편의 자유분방(?)함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많은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보따리를 싸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들던 시기에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무렵에 불교대
조용히 앉아 내면의 세계에 몰입한다. 남자같은 왈가닥 성격이 차분히 가라앉고 삼매에 들어간다. 한 곳에 잠시 있지 못했던 내가 참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큰 가피를 입었기에 가능했다. 장사를 하며 아들을 키웠기에 성격이 남자같아졌다. 먹고 살일에 쫓기니 절에 가면 "제게 복주십시요. 가정이 화목하게 해주십시요"등 삼배만 올리고 절을 뒤로 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불법을 알게 되니 나보다는 다른이들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 법왕사 법회에 다니면서부터 잘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내게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절은 내 자신의 복과 가정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곳이 아님을 알게됐다. 나보다는 남을 위하여 또 욕심을 버리고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구공덕원 청년회(회장 박용권)는 지난 19일 공덕원 법당에서 `제7회 청년불자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대불청 중앙회장 이상번씨와 대구지구장 김상길씨 등 2백여명의 청년회원이 함께 한 이날 행사는 부산 공덕원 효선스님의 `열린마을'을 주제로한 강연과 2부 레크리에이션의 순서로 진행됐다. 대구공덕원 청년회원들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각 지역 청년회와 굳건한 유대관계를 통해 대구지역 불교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을 다짐했다.
충청도 계룡산 기슭 두메산골… 60여호되는 마을의 절반 이상이 아침나절에연기가 오르지 않을 정도로 지을 양식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나의 어린시절이 있었다. 특히 해마다 봄이면 보릿고개로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나의 어머님은 절에 큰행사가 있는 날이면 뒤뜰 장독대 항아리 속에 곱게 묻어둔 귀하디 귀한 흰쌀을 하얀 광목 자루에 담으셨다. 그리고는 그것을 머리에 이고 동학사까지 이십여리나 떨어진 계룡산 험한길을 다니시던 기억이 난다. 매일 새벽이면 아버지의 천수경 소리에 단잠을깼던 일들은 나의 마음 한구석에 작게나마 불심의 싹이 트기에 충분한 것이아닌가 생각된다. 그후 결혼 후에는 아내가 어머니의 대를 이어 열심히 절에 다녔으나 나는 일년에 몇 번 큰 행사가 있는 날에만
"보살님! 발원문좀 낭독 해주시지요"라는 부탁을 거두어 가기라도 할까 선뜻 대답해 놓고 한편으로는 "그것 쯤이야…" 하는 자신에 차 있었다. 여름에 완공된 법당 앞의 공덕비 제막식 때였다. 학창시절에 웅변이나 축사 답사를 자주 해온 터라 그 후로도 내 글 읽는 억양은 힘이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는 까마득히 지난 일이다. 그다지 길지 않을 발원문을 떠올리며 마이크의 매끄러운 음향을 감미롭게 타리라는 잔잔한 흥분도 일었다. 그러나 여러 대덕스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몸이 굳는것 같이 긴장이 되고 억양은 격앙되어 떨리는듯 흐느끼듯 아예 허기진 음성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몇줄의 낭독이 결코 많지 않은 관중에 위축 된 촌스러움 이라니 기껏해야 작은 실력의 치부를 드러내놓고
군승의 날 27주년 기념법회가 군불교진흥회 주최로 지난달 3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봉행됐다. 이 법회에는 성타(조계정 포교원장), 도암(대승종 종정), 법타(조계종 총무부장), 도원(천태종 총무부장), 원혜(조계종 포교부장)스님과 임봉준(전국방부 군종실장), 강남석(군승단장), 박상길(군불교진흥회 회장), 최영희(성불회 회장)씨등 5백여명이 참석했다.
퇴근길 올려다보는 하늘은 어느 스님의 장삼자락 마냥 짙은 잿빛이고, 저 끝어딘가에 닿아 있을 마음 한 자락을 찾아보지만… 무(無). 오늘도 이렇듯 부처님의 자비 안에서 행복하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보내고 내생활의 쉼터인 집으로 향하고 있다. 문득 바람소리에 처음 절에 들여놓던 발자국소리가 나를 이끌고 그 뒤를 이어 지나온 길이 기억의 저편에서 노크를 한다. 참 어둡던 나날이었는데 지금의 나에겐 어둠이란 있을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니까. 누가 어떻게 불교에 입문했느냐고 물으면 그냥 막연히 `할머니 따라서'라고 대답을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할머니 따라서 절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어쩜 전생의 인연에 의해 자연히 맺어지지 않았나 싶다. 절이란 내게 있어 막연한 그리움이었으니까.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시작되면 가는해를 아쉬워하며 마음이 들뜨기 마련이다. 또 연말이 다가올수록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가족들을 만나며, 망년회다 동창회다 하며 흥청망청 해지기 쉽다. 여러 모임들도 필요하겠지만 사찰에서 송년가족법회를 보며 한해마무리를 절에서 한다면 매우 뜻깊은 연말이 될 것이다. 실제 많은 사찰에서 연말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불광사(주지 지오스님)는 구역단위별로 가족법회를 봉행한다. 오는 13일에는 송파7구 불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저무는 해를 마감하는 뜻깊은 자리를 준비한다. 법회후에는 `즐거운 노래방'을 설치해 함께 시간을 가지며 우의를 다질 예정이다. 지역별 법회활동을 점검하고 내년 계획도 함께 발표한다. 24일에는 한해를 마무리하는 대법회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할 때 어떤 표현을 쓸까? 추억이라든가, 그때가 좋았지, 아! 옛날이여… 등등. 지금 나 또한 지난 과거(특히 조계사학생회 시절)를 돌이켜 볼 때면 `정말 아련하구나'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처음 조계사를 나가게 된 것은 그 당시 대학을 다니면서 불교학생회에서 활동을 하던 삼촌의 권유 때문이었다. 중학교 2학년…, 새침데기 여학생이 첫발을 내딛은 사찰의 풍경은 너무나 한산했다. 앞마당을 오가는 신도들, 그리고 먹물 옷을 입은 스님들의 모습조차 낯설고 신기했다. 그리고 처음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는 과정은 왜그리 계면쩍었는지. 법회를 진행하는 젊은 선생님들과의 산뜻한 만남도 이루어졌다. 지금도 만나면 여전히 반갑게 인사를 하는 우리 담임 선생님은 이제 벌써 아저씨(?)가 되었
새벽 안개가 산허리를 품던 가을을 지내고 이제는 하얀 눈꽃들 속에 파묻혀 겨울잠을 자야하는 산하를 느껴보며 한해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나를 생각해 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어느 산사의 종무소에서 근무했었다. 어린 시절 아련한 기억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절을 찾았던게 고작이었던 내게 종무소직원으로서의 생활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시야를 틔워준 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설프기만 했다. 그러나 차츰 도량에 들어서며 두손모아 합장할 수 있고 법당안의 부처님의 온화하신 모습안에서 평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을때 다시 나는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만났던 많은 스님들과 일반 불자들의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보다 많은 경험과 삶의 지혜를 터득한것 같다. 그리고 아련한
사십여 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뒤늦게나마 부처님을 알게 되어, 동산불교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열심히 하겠노라 다짐하며 막상 입학했지만 1년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입학후 벌써 두 번의 삼천배를 했지만 처음 절을 할 때에는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막상 7시간의 사투 끝에 삼천배 마지막 절을 올리고 불단을 향해 머리를 들었다. 순간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부처님의 상호가 그렇게도 환하고 밝게 황금빛을 발하면서 빙긋이 웃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까지 그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97년 2월 17일…. 이번 삼천배 정진을 통해 진정으로 참회하고 발심하여 불도를 꼭 이루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아내가 정성껏 준비해 준 법복
불광사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처음 그 절을 다닐 때에는 6˙25동란으로 절이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양마저 신도들이 집에서 지어 올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갔습니다. 계묘년에 지금의 주지 스님이신 완공스님께서 이 곳 불광사에 자원해서 오시게 되었습니다. 완공스님은 어려운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굳은 신심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인연 있는 불자님들이 찾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불자님들의 동참과 불사로 지금의 불광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약사전인 만월보궁까지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스님 말씀에 의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땅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로수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그
설악산 신흥사 가사불사 회향식에 동참을 하려고 속초로 먼길을 떠났었다. 일상생활에서 탈출을 하고싶어 남편과 자식을 두고 나혼자만 홀가분히 다녀오리라 마음먹고 아이는 학교에 보내두고 남편은 외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은 시간이었는데 나는 떠났다. 그런데 홀가분 할 줄 알았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늘 아들과 함께 돌아다녔는데 옆에 없으니 허전했다. 평소 말수가 적고 과묵한 남편, 집에서든 밖에서든 대화가 없는 남편때문에 숨이 막혀 버릴것 같아 떠나온 길이었는데 이렇게 마음이 부담스러운것은 무었때문일까 하는 생각 이들어 화두를 들었다. 내가 집에 없으면 라면도 끓여 먹을줄 모르는 남편. 집에 밥을 해놓고 떠나와도 밥에는 곰팡이가 핀다. 그런데 특별한 볼일도 없이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두고 떠나왔으니 마음
그날은 그냥 즐겁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절로 향하는 그 길이 난 그냥 그렇게 좋은 것이다. 시외버스의 털털거림이 좋고 마을마다 서면서 손님을 태우고 내리는 기사 아저씨의 수더분한 목소리가 좋고 또 더욱 좋은 것은 그곳에 가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와 들른 보광사에서 난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넉넉한 풍요로움을 지닐 수 있었다. 고즈넉이 가라앉은 것같은 푸근한, 침체되어 있어서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그러나 매우 강한 율동같은 것, 갑자기 마음이 상당히 넉넉해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마음의 여유였다. 봄에 진달래가 피기 전부터 기초교리 공부를 친구와 시작했다. 강의를 듣고 책을 보면서 난 또 다른 새로
법보신문의 독자와 법보신문을 음과 양으로 성원해 주시는 교계내외의 여러분에게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한해는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났고 그 여파는 우리의 정신과 사회를 피폐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희망찬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우리는 희망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해의 벽두에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하는 현실을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불안에 얽매어 있을 수 만은 없는 현실이 또한 우리의 입장입니다. 올해는 결정코 바르지 못한 묵은 역사를 청산하고 바른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럼으로써 다시는 우리를 분노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일
부산지역에서 부처님의 불법을 춤으로 형상화하고 포교에 앞장선다는 취지아래 우바이무용단(단장 심산스님)이 오는 21일 창단 공연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부산 문화회관 중강당에서 공연을 여는 무용단은 상임안무자 이영미(동아대학교 무용과 강사)씨의 안무로 1부 `바람소리-그대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주제의 오프닝에 이어 `생명의 춤' `북소리-그 울림'을 공연한다. 범패 이수자인 능화(인천 구양사)스님의 범패에 맞추어 나비춤 바라춤도 곁들인다. 2부는 피아니스트 임동창, 가수 장사익의 노래 `하늘가는 길'이 맞추어 단원들이 25분간 실험무대를 펼칠 예정이다. 무용을 전공한 아마추어 무용가 30여명으로 구성된 우바이무용단은 작년 부처님오신날 축하공연 `생명의 춤'을 시작으로 경주 분황사
옛날 물속에 사는 잠자리 애벌레들이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물 위에는 어떤 세상이 있는 것일까? 저 물위로 나간 친구들은 한번 나가면 통소식이 없으니 어떻게 된 것일까? 알수가 없구나." "얘들아! 우리들 중에 저 물위로 먼저 올라가는 친구는 바깥 구경하고 꼭 돌아와서 이야기 해주기로 하자!" "그래! 그래! 그게좋겠다"하면서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그 애벌레 중 한마리가 껍질을 벗고 물위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애! 올라가면 꼭 소식전해라." "그래, 염려마!"하고 물 위로 올라간 그 애벌레는 눈부신 태양열 속에서 허물을 벗으며 아름다운 잠자리가 되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세상 구경하고 보니 이 좋은 구경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물속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해 주어야지 생각하고 자
‘초기-대승불교 정체성 논쟁’과 관련해 불교 저술가인 진현종씨가 다시 기고문을 보내왔다. 이번 논쟁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가 지금까지 논쟁을 지켜보면서 느낀 점들을 적었다. 이를 전문 게재한다.(편집자) 금번 법보신문에 전개된 논쟁을 두고 ‘난데없는’ 혹은 ‘소모적인’ 말싸움으로 치부하는 분이 없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논쟁은 작년부터 교계 일각에서 제기되어온 ‘한국의 대승불교=기복불교=비불교’라는 요지의 주장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난데없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요, 그간의 침체에서 벗어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점검해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이다. 따라서 냉소적인 태도로 관망하거나 애
지난 연말 조계사에서 전국 자원 봉사자에 대한 시상식이 있었다. 자원 봉사자로서 한일도 없으면서 상을 받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으로 법동사회 복지관 이과장, 남편과 함께 서울행 고속 버스에 올랐다. 시상식을 마치고 대전으로 내려오려고 전철을 타게 되었다. 전철 내는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다소 붐비는 정도였다. 그 때 우리들 옆에는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때 마침 자리가 나서 스님이 앉으셨다. 스님은 조금 어색한 기분이신 듯 보였다. 마침 스님 옆자리가 비는 바람에 남편과 나는 앉을 수 있었고 이 과장은 서 있게 되었다. 남편이 앉으면서, "스님 옆에 앉으니까 좋네요"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스님도 환경문제 상의차 조계사에 다녀오시는 길이란다. 평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