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이끄는 이번 집행부의, 아니 조계종 전체의 앞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됐다. 봉은사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란들이 바로 그것이다. 봉은사 문제는 단순히 한 사찰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지난 집행부 때의 뜨거웠던 사태는 수도권 포교의 핵심이며, 그러한 위치를 고려해 조계종 직영사찰로 지정한 봉은사가 제대로 그 위상을 지닐 수 있는가의 문제와 직결돼 있었다. 그러니 그 봉은사가 또다시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직영사찰 전환 문제로 홍역을 앓으며 국민의 불교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던 봉은사가 다시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는 것은 사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조계종의 위상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
“그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서 일해 온 30대 노동자 최종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말이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진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서비스의 천안센터 사장과 고인의 전화 통화내용은 충격적이다. 냉장고 소음을 점검하던 중에 ‘고객’이 고인의 태도가 ‘불량’하다며 서비스센터에 항의했다. 센터 사장은 고인에게 전화를 걸어 “센터에서 사과했다”며 욕설을 퍼부은 뒤 “(고객을) 칼로 찔러서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든” 아무튼 더는 항의가 없도록 하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친절’한 삼성전자 서비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을 한 단어로 정의 내린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일이다. 시시각각 변화해 가는 심정이나 기분의 일부분을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의 내리려 하는 건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무리하기 가장 어려운 감정은 무엇일까? 기쁨(희.喜)과 슬픔(애. 哀), 즐거움(낙. 樂)과 분노(憤怒)는 그래도 명확하게 떨어진다. 그렇다면 사랑은? 그 어떤 철학자나 예술인도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해 내지 못했다. ‘아낌없이 줄 수 있어야’사랑이고,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 하지만 이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나타낼 뿐 정의 내린 건 아니다. 국립국어원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사랑 정의는 이러했다. ‘이성의 상대에게
어우야담(於于野譚)은 이조 중엽 유몽인(柳夢寅)의 저술로 대표적인 설화문학의 하나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유몽인의 고조부 호지(好池)는 용력이 대단하여 소년 시절 남이(南怡)장군과 다음과 같이 그 우열을 겨루었다 한다. 즉 서로 나뭇가지로 깍은 화살로서 발바닥을 쏘아서 발가락 하나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갑(甲), 움직이면 을(乙)로 하자고 약속했다. 먼저 남이가 발바닥을 문지방에 걸쳐놓고 유호지가 활을 힘껏 당겨 남이의 발바닥을 쏘았는데 남이는 나무로 깎아 만든 발처럼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갑을 되었다. 다음에 남이가 유호지의 발을 쏘았는데 발가락 하나를 움직였고 결국 그가 을이 되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갑과 을을 정했다고 한다. 해학적이고 가히 대인의 도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첫 번째 정기국회가 열렸다.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문제 등 정치적 사안 때문에 정기국회가 제대로 진행될지 우려스럽다. 예산안 심의도 마찬가지이다. 예산안 심의는 내년도 나라 살림살이 규모를 정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지방의회들도 곧 정기회를 열어 내년도 예산안을 다루게 될 것이다. 더구나 지방재정이 큰 위기를 맞고 있어 어느 때보다도 예산안 심의가 제대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재정은 지방자치의 기본요건이므로 지방재정에 위기가 닥쳤다는 건 지방자치가 위기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가장 부자인 서울시는 영유아보육을 지원하기 위해 지방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지자체인 경기도는 IMF 이후 처음으로 감액추경을 했다. 대전 동구는 공무원
논리학의 오류론에 ‘사람에의 추론’이라는 오류가 있다. ‘추론의 타당성을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그 추론이 누구의 것이냐에 따라 추론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오류’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가 “사람이 어떻다 하여 그 말을 버리지는 않는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오류를 피하라 한 것이겠다. 이러한 오류는 크게 보면 모두 ‘논점 부적절’ 오류에 포함되는 것이며, 우리가 감정을 지닌 인간이기에 자기도 모르게 범하기 쉬운 오류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고, 대중들이 의식하지도 못한 채 휩쓸려 가는 것이 바로 이 ‘사람에의 추론’, 나아가 ‘논점 부적절 오류’가 아닌가 싶다. 정치판이나 그 언저리를 보면 이 오류가 난무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고 있다. 요즈음
몽키 비즈니스. 영국 유력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조계종 기사를 쓰며 큼직하게 단 제목이다. 종단에선 불쾌감 느낄 게 당연하다. 스님 사진과 맞물렸기에 더 그럴 터다. 영어 ‘몽키’는 원숭이 외에도 ‘말썽꾸러기’ 또는 ‘웃음거리’로 쓰인다. 몽키 비즈니스(monkey business)는 그 몽키의 ‘사업’이다. 흔히 ‘협잡’이나 ‘바보같은 짓’을 이른다. 외국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느냐가 중요한 시대는 한참 지났다. 다만, 우리를 객관화해 보는 계기는 된다. 종단 사부대중에게 익숙한 걸 새롭게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듯 바둑판이 옆에서 잘 보이는 이치다. 더러는 몽키 비즈니스로 조계종단을 비판한 기사에 무슨 ‘협잡’이 있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 많은 국가 잡지이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소 길어 보였던 제34대 총무원장 선거가 막을 내렸다. 교단 내 일이라 하지만 선거는 선거이기에 당선의 기쁨과 낙선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은 하루라도 빨리 추슬러 수행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선거 중 제기됐던 온갖 잡음이 사라지고 여법해진다. 선거 과정에서 일어 난 일을 현 시점에서 재론한다는 게 그리 내키진 않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조계종이 합의추대나 직선제로 선회하지 않고 현 방식의 선거인단을 통한 간선제 형태의 선거를 치러야만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321명의 선거인단은 중앙종회의원 81명과 24개 교구본사 각 10명을 포함한 240명으로 구성된다.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대 전제가 필요하다. 선거인단이 대중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쓰나미로 발생한 후쿠시마원전의 붕괴로 인한 재앙이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다. 최근 정부는 후쿠시마원전 근처에서 잡은 수산물의 수입금지 조치를 취했고 이에 항의하여 일본 정부가 사절단을 보냈다. 이 재앙은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원자력산업과 맞물려 일으킨 21세기 최대 재난의 하나로 구분되리라 생각한다. 1896년 6월 15일 일본 동북부 해안의 산리쿠(三陸)지역의 사람들은 축제일의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오후 인근 태평양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발생하여 최대파고 33m의 쓰나미가 덮쳐 축제를 즐기던 22000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고 9000채의 가옥을 파괴했다. 37년이 지난 1933년 3월 3일, 거의 같은 지점에서 발생한 지진의 최대파고 29m의 쓰나미로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3년 식민지 조선의 불교에 날카로운 죽비소리가 울렸다. 근대적인 불교 개혁론을 주장한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이 태어난 것이다. 이 책에서 만해선사는 평등주의를 강조하면서 불교가 미래의 도덕 문명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과 행동을 끌어냈다. 이 책에서 만해선사가 불교유신의 방안으로 제안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원주직(寺院住職)의 선거제 채택’이다. 사찰의 주지를 대중의 손으로 뽑자는 것이다. 당시 조선 불교에는 의뢰주직(依賴住職), 무단주직(無斷住職)의 폐해가 만연했다. 의뢰주직은 권력자에게 부탁하거나 뇌물을 바치고 사찰 주지직을 차지하는 것이다. 무단주직은 폭력 등을 이용해 주지가 되는 것을 이른다. 만해
채 검찰총장이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이 사태의 진행 과정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실은 어디 가고 결국 정치만이 남는가? 검찰총장을 사퇴까지 몰아가고,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그 문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계속 줄기차게 그 문제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까? 진실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던 쪽은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는 아무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문제의 초점이 진실을 밝히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정치로 귀결되면 진실이란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추악한 일을 벌였던
무릇 사람마다 삶의 뜻이 다르다. 많은 이들이 돈과 권력을 좇지만, 평생 그 둘에 고개 돌리고 사는 이도 적지 않다. 누군가는 대통령 자리에 앉고 싶어 민주시민 수백 여 명을 학살하고, 누군가는 대기업 회장으로 천문학적 재산을 주무르길 꿈꾸지만, 그런 무리를 파리 떼나 구더기들로 경멸하는 이들도 있다. 하물며 세속을 벗어나 해탈을 ‘일생일대의 큰일’로 삼은 스님들의 세계에선 말할 나위 없을 터다. 만일 권력과 돈을 추구하는 스님이 있다면, 기실 그야말로 언어도단 아니던가. 권력이나 돈을 좇으려면 아예 출가를 말았어야 옳다. 스님이 권력이나 돈을 중시할 때, 세간의 시선이 유독 차가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총무원장 선거가 혼탁해질 때, 스님들이 도박판을 벌일 때 중생의 눈귀가 쏠리는 까닭은 그만큼 청정 승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