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민족음악 학술세미나에 참가했다. 행사가 시작되는 날 왕자의 축사가 있어 이른 아침부터 전통 예복을 차려입은 궁녀들이 줄지어 꿇어앉아 의전 준비를 하는데 어쩜 그리도 허리가 잘록하고 가슴과 엉덩이가 볼록한지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만약 필자가 남자였다면 엉큼하다고 주변에서 꽤 흉보았을 것이다. 세미나 일정을 마치고 씨엠립으로 가기 위해 비행장에 당도하니 프로펠러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비행기를 타는 기쁨도 잠시, 프로펠러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를 막아야 했고, 창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기설(對機說)이라 한다. 여기서 기(機)를 조건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큰 잘못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 가르침을 내릴 때의 상황 등에 맞춰서 설해진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을 말하기 전의 근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당시의 역사적 현실이라는 조건인 것이다. 부처님도 그 근본 조건이라는 제약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 근본조건에 맞게 말씀하셨기에,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부처님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대
전염병의 기세가 오래도록 꺾이지 않고 점점 심해져 간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직접 간접적인 고통이 세상을 무겁게 덮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삶의 희망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종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낄 정도로 한심하다. 사회적 고통을 키우기도 하고 고통에 눈감기도 한다. 사람들이 겪는 현실의 고통에 대해서 참된 종교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최근 개신교의 선각자들이 기독교의 절망을 통감하고 적나라하게 교계의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스스로 잘못을
지홍 박봉수(智弘 朴奉洙, 1916~1991) 화백을 언급할 때면 항상 ‘경주출신’이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경주출신, 그러니까 경주에서 태어난 사람이야 많겠지만, 누구 앞에 “경주출신”이라는 칭호가 붙는다는 것은 그만큼 경주를 빛낸 인물이라는 뜻으로서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다고 하는데, 그때의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찍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경주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서는 어린 나이에도 본격적으로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1929년, 그러니까 그의 13세 때 그린
한때 공산주의를 동경했던 버트런드 러셀이 20세기 초반 신생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 이야기가 있다.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던 공산주의자는 날마다 “강한 의지, 애국심, 충성심으로 소비에트 낙원을 건설하자”며 지극히 유심론적인 요소만 떠들고 있었다. 반면에 공산주의자가 유심론자(관념론자)라고 조롱했던 영국인은 재화의 생산과 돈밖에 모르는 유물론자처럼 살고 있었다. ‘이념’이라는 상(相)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목도한 후의 소감이었다.유물론을 추구하는 공산사회에서 왜 사회의 문제를 물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의
철학, 종교, 사상 그리고 예술의 공통점은 ‘삶’을 주제로 한다는 것이다.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묵시적으로 한편에 ‘죽음’을 놓아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는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면, 철학과 사상은 삶의 문제를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반면 예술은 삶과 죽음의 문제 중 어느 하나를, 혹은 그 모두를 동시에 표현한다. 예술가는 어떤 종교인이나 철학자 못지않은 통찰력으로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프란츠 슈베르트는 슈베르티아데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가곡과 피아노곡, 실내악곡들을 주로 작곡하면서 활동했지만, 내적갈등은 점점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중도는 철학적으로 ‘자주(自主)’의 의미를 갖는다. 양변도 아니고 중간도 아닌 새로운 합일로서의 자주이다. 자주는 자유와는 다르다. 자유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함이라면, 자주는 가장 바른 것을 선택함을 말한다. 모든 것이 연기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그 관계에서 가장 바른 것을 선택하는 중정(中正)의 선택이 자주이다.‘스스로 주인이 된다[自主]’고 함은 중도중정의 주체가 됨을 의미한다. 중도중정을 벗어나서는 오롯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없다. 역
2019년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고사리박사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은 장르는 판타지이지만 우리 사회 현실과 삶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웹툰은 비가 오는 날마다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가는 지하철 2호선에 귀신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당산역 귀신’은 자신을 보는 인간에게 다가가 ‘낭만 고양이’를 불러달라고 할 뿐 이렇다 할 해코지는 않는다. 당산역 귀신의 소식을 듣고서 지옥을 관장하는 지장보살을 협시하는 도명존자가 무작정 인간세계로 향한다. 당산역 귀신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이다. 도명
현재 미국에 사는 60대 여성 불자님이다. 불자님은 본래 개신교 모태 신앙이었다. 불교를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했다. 시어머님은 불자였다. 시어머님 따라서 처음으로 절에 가보았다.절에 갈 때마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경을 따라 읽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짜증나고 너무 싫었다.“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왜 읽고 있지?”그러다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이십년 만에 만났다. 동창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동창이 선물로 한 개에 60분짜리 카세트 테이프 8개를 선
출세간 불교보다 입세간 불교를,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의 삶을 돌보는 불교를, 초세간 정신으로 세간 속의 인간을 돌보며 세간을 완성시키는 불교를,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정토로 구현해내는 인간불교를 불러 내보자. 그 인간불교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서원을 발하며 앞서 나간 사람이 대만 불광산사(佛光山寺)의 성운(星雲) 대사이다.성운은 1927년 중국 장쑤(江蘇)성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938년 난징(南京) 치샤산(棲霞山) 대각사(大覺寺)로 출가해 임제종 48대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의 출
부처님 당시 인도인들 중에는 극심한 고행을 통해 어떤 수행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비단 수행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양한 목적을 이루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어떤 목적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목적하는 바가 성취되었을 때 우리는 만족감을 경험하며 흡족해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슬픔에 빠지거나 분노하거나, 때로는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75장은 “‘선(禪)’을 배우는 자가 만일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밝히지 못하면 우뚝 솟은 ‘현관(玄關)’을 무엇으로부터 투과하겠는가? 흔히 ‘단멸공(斷滅空)’을 ‘선’이라고 하고, ‘무기공(無記空)’을 ‘도’라고 해서, 일체가 모두 ‘무’인 것으로 높은 ‘견지’를 삼는다. 이것은 ‘공’을 고집하는 것으로 ‘병’이 깊은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선’을 말하는 자는 흔히 이 ‘병’에 걸려 앉아 있다”이다.중국에서 ‘선’의 어원은 ‘사기·위장군전’과 ‘속한서·제사지’에서 ‘왕위계승을 위해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식’이다. 안세고(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