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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마음 숲 찾는 과정 담아낸 해방 후 첫 불교영화

함세덕 희곡 ‘동승’ 영화한 작품
문학적 제목으로 철학문제 사유
인류 보편적 화두인 고향상실을
절에 맡겨진 동승의 심리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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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대체인물 서울아씨에게
양자로 들어가는 게 무산되면서
어머니 동경이 헛된 꿈임 깨닫고
진정한 마음의 고향 찾아 떠나

‘마음의 고향’은 동승의 어머니 찾기라는 맥거핀으로 자신의 숲을 찾는 영화다. ‘마음의 고향’ 캡처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김태리 분)은 고향에 도착하여 요리를 한다. 그가 먹은 음식은 식욕도 정신의 허기도 모두 달래준다. 혜원은 서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신이라는 나무를 이식할 숲을 찾는다. 그러다 문득 집을 떠난 어머니의 숲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동안 엄마에게 자연과 요리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람이 엄마의 작은 숲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혜원은 자신의 숲을 찾아 서울행을 택했지만 결국 귀향하여 정작 자신의 숲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자신의 숲을 찾는 여행자이다.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은 동승의 어머니 찾기라는 맥거핀으로 자신의 숲을 찾는 영화다. 자신의 숲 찾기 서사는 이 작품을 불교영화에서 성장영화로 기울게 한다.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은 함세덕의 희곡 ‘동승’을 원작으로 한 해방 후 최초의 불교영화다. 제목은 ‘동승’이라는 원제 대신 ‘마음의 고향’으로 개명하였다. 함세덕의 ‘동승’은 세 번에 걸쳐 영화화된 불교영화다.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 이후 주경중의 ‘동승’(2003) 그리고 박영철의 ‘내 마음의 고향’(2014)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세 작품 모두 장단점을 보여주지만 ‘마음의 고향’은 함세덕의 원작에 충실하였으며 불교적 색채도 돋보인다.

윤용규 감독은 ‘마음의 고향’이라는 문학적 제목으로 철학적인 문제를 사유한다. 고향의 상실은 현대 예술의 고유한 주제이자 인류 보편의 화두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고향 상실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적시했다. 플라톤은 지상에서 삶은 근원적으로 고향 상실의 상태로 규정했다. 이는 이데아라는 고향에서 떠나온 현존은 늘 고향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 역시 인간은 고향 상실증을 견뎌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이에 호응하듯이 임권택, 장률 그리고 차이밍량 등 동아시아 거장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실향한 디아스포라들이다. 그들의 고향 상실은 정신적 실향과 장소의 떠남에서 기인한다. ‘마음의 고향’의 동승 도성은 개가한 어머니가 세 살 때 절에 맡기고 떠났다. 이로 인해 도성은 지금까지 마음의 창고에 실향감이 가득하다. 도성에게 마음의 고향은 어머니에게 귀향이며 꿈의 8할은 어머니와의 만남이다.

‘마음의 고향’ 캡처

첫 장면에서 스님은 아침 예불을 준비하고 도성은 종을 타종한다. 그리고 도성은 물을 길어오고 빗자루로 경내를 청소하며 마루와 전등도 닦는다. 마을 아이들은 산에서 새를 잡지만 도성은 경내에서 그들을 바라본다. 도성의 시점 샷은 그의 동경을 표현하는 핵심 수단이다. 서울 아씨(최은희 분) 일행이 아들의 사십구재를 지내기 위해 절에 도착한다. 도승은 아씨를 멀리서 바라보고 창밖에서도 내다본다.

도성의 시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의 직접적 표현이다. 심지어 도성은 ‘반야심경’을 암송하면서도 경전 위에 서울아씨의 얼굴이 이중인화 되어 잊지 못한다. 그는 어머니의 대체인물인 아씨에 사로잡혀있다. 나무꾼은 도성에게 어머니 찾는 법을 알려준다. 그것은 염주 안에 부처님 대신 빨간 연꽃이 그려져 있는 염주의 소유주다. 도성은 서울 아씨의 방에 들꽃을 꽂아놓은 다음 염주를 들여다본다. 서울아씨의 털부채는 도성에게 어머니를 위한 털부채 만들기에 착수하게 한다. 산비둘기 털을 이용한 털부채 만들기는 불가에서 금한 살생의 계율을 어기는 일이다. 하지만 도성은 어머니의 선물을 위해 산비둘기를 사냥하여 법당의 창고에 몰래 보관한다.

서울아씨도 자신이 잃은 아이를 대신하여 도성을 양자로 입양하려고 한다. 도성은 어머니가 부재하고 서울아씨는 떠난 아이를 대신할 도성이 마음의 숲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성은 꿈을 꾼다. 화면의 일부만 보여주는 마스킹으로 처리된 꿈 장면에서 도성은 서울아씨를 닮은 어머니로부터 ‘내가 너를 데리러 왔다’라는 말을 듣는다. 꿈은 낮의 세계에서 소원을 성취하는 장이다. 도성에게 아름다운 어머니의 방문과 서울로 함께 떠남은 일종의 숲이다.

서울아씨는 도성을 양자로 삼겠다고 주지스님(변기종 분)에게 간청 드린다. 주지스님은 모친의 업으로 인해 도성은 “남보다 더 많은 공덕을 쌓아야한다”는 이유로 주저한다. 서울아씨의 간청은 결국 주지스님의 허락을 얻어내고 부처님께 고별 향을 올리고 떠날 준비를 한다. 주지스님은 도성에게 속세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과 아침저녁으로 ‘반야심경’을 암송할 것을 당부한다. 도성의 친모는 서울아씨에게 찾아가 도성을 데려가고 싶다는 의향을 밝힌다.

‘마음의 고향’ 캡처

도성은 서울아씨의 방에서 자신의 친모와 상봉하지만 친모는 신분을 숨기고 염주를 도성에게 선물한다. 주지스님은 도성이 산비둘기를 법당 창고에 보관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살생 금지의 계율을 위반한 도성은 서울행이 좌절된다. 서울아씨는 부처님의 자비를 보여주고 주지스님은 계율을 중시한 심판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도성은 친모에게 받은 염주 안에서 연꽃을 발견하고 자신의 어머니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의 반복이다. 스님은 아침 예불을 준비하지만 종루에 도성은 없다. 존재와 부재의 방식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첫 장면에 도성이 있었던 종루에 종은 존재하지만 도성은 부재하며, 물동이와 빗자루는 존재하지만 청소하는 도성은 떠났다. 부재의 자리에는 기억의 발자국만 남아있다. 도성이 염주의 연꽃 그림을 통해 친모를 인지하고 시점 샷으로 친모가 떠나간 길을 보여준다. 길은 존재하지만 그 길을 통해 떠난 친모와 절에 도착했던 서울아씨는 부재한다. 모든 것이 헛된 무(無)라는 사실을 동승 도성은 문득 깨닫는다. 서울아씨도 어머니도 그가 그리던 서울도 모두 헛된 망상이자 그가 꾸는 헛된 숲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절을 떠난다. 그의 여행은 시작된다. 하지만 여행의 목적지는 어머니와 상봉과 서울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이며 자신의 숲으로 귀향일 것이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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