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의 노모는 거의 매일 아침 예불을 드리신다. 유년 시절을 돌이켜보면 모친의 거의 유일한 여행은 부처님오신날에 장흥의 보림사로 예불 모시러 가시는 일이었다. 모친 일행과 당도한 보림사 방문이 산사와 맺은 최초의 인연이었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범어사와 통도사의 순례는 극장가는 일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산사 순례는 경서의 반 권을 통독하는 일에 버금갈 정도로 마음을 씻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번 휴일에도 양산 통도사를 순례하였다. 겨울의 통도사는 가지런히 도열한 소나무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통도사 초입에 도열한 소나무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것은 버스만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은 도착할 행선지로 향하는 버스의 정차이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이고 버스를 타고 도착할 목적지에 대한 희망이다. 그곳이 단지 매일 귀가하는 집이라 할지라도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동안의 설렘과 희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도착한 버스는 승차한 승객에게 잔여 감정을 덜 남기지만 떠나버린 버스는 정거장에 남아있는 승객에게 아쉬움과 그 꼭대기에 놓쳐버린 상실감을 남긴다. 상실과 이별은 인간이 피하고 싶은 말이며 상황이지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다. 민정은 여섯 살 때 떠난
첫 장면은 누워있는 드니 라방의 얼굴이다. 드니 라방과 얼굴 클로즈업 그리고 누웠다는 행위는 중요하다. 드니 라방은 ‘나쁜피’와 ‘퐁네프 연인들’에서 레오 카락스의 페르소나였고 퐁네프다리 위에서 ‘나에게 아무도 잊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손을 권총으로 날리는 반항아다. 또한 김기덕의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냉동실에 얼린 고기에 찔려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 드니 라방이 표상하는 프랑스의 누벨 이마주 세대에 대한 성찰을 그의 흐린 시선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는 8분 이상을 누워있다. 차이밍량은 ‘동아시아에서 그림 보기를
철학자는 산책을 생활화했다. 산책은 철학자들이 사유의 나무를 성장시킨 밑거름이었다. 칸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였으며 하이데거도 산책을 즐겼다고 한다. 산책은 철학자에게는 사색을, 작가에게는 창조적 상상력을 싹트게 한다. 가야산의 소리길은 산책의 명소이다. 가야산은 해인사가 1000년 전에 창건된 곳이며 문인이자 정치가 최치원이 세상을 등지고 몸을 의탁한 곳이다. 주말에 가야산 계곡을 따라 초입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소리길을 천천히 걸었다. 소리길 초입은 마을 뒷산으로 난 길처럼 소박하다. 좁은 길은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드
영화 ‘징후와 세기’는 남녀 사랑이야기가 전반부·후반부에 서로 겹치는 데칼코마니 형식이 돋보인다. 불교 영화의 눈으로 바라보면 전반부와 후반부는 윤회와 업보에 대한 서사가 마지막 장면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실내의 풍경과 음악처럼 또렷하다. 전반부는 시골 병원의 여의사와 그녀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멜로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아피찻퐁이 선형적인 멜로 영화에 집중할 감독은 아니며 후반부에 이를 입증하듯이 의사를 인터뷰하는 장면의 앵글이 정반대로 바뀌어 차이와 반복의 형식이 두드러진다. 두 이야기의 겹침과 치과의사
영화는 생산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성장하는 나무와 같다. 한국의 소나무는 한국을 닮고 한국의 멸치는 한국인의 모습을 닮아가고 태국의 소나무는 태국을 닮고 태국의 가오리는 태국인을 닮았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는 태국 종교와 문화가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어린 나이에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아피찻퐁은 ‘엉클 분미’(2010)를 통해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다시 한 번 태국을 대표하는 감독임을 입증했다. ‘엉클 분미’는 가장 태국적이면서 아피찻퐁의 영화 세계를 극명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이 작품은 불교영화 측면
여행은 이곳이 아닌 저곳을 향한 동경이다. 윤영(박해일)과 송현(문소리)은 서울의 노래방에서 취중에 군산 여행을 결정한다. 시를 쓰는 윤영과 조선족 인권 보호를 위한 시위에 참여하던 송현이 만나서 특별한 목적의식도, 준비도 없이 불현듯 여행을 떠난다. 단지 군산은 윤영의 모친 고향이라는 점이 여행의 이유이다. 고향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며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들은 고향의 자력을 더 강하게 느낀다. 이름도 애매하고 “뭐든 하다 말거나 절반만 하는 윤영”은 삶의 뿌리가 허약하며 그의 심리적 공백은 모친의 부재와 연관된다. 윤영은 서
무영탑은 불국사 석가탑의 다른 이름이다. ‘무영탑’은 소설가 이광수와 현진건이 경주를 탐방하고 채록한 전설을 배경으로 현진건이 집필한 소설이다. 전설은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의 불국사 불사 과정에서 석가탑을 조성한 석공 장인의 이야기이다. 석공은 당나라에서 건너온 명장이며 그를 찾아온 아내(누이)는 탑 조성으로 인해 남편과 면회가 불허됐다. 불국사 문지기는 큰 연못(影池)에 가면 석가탑 그림자가 못에 비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알려준다. 아내는 연못을 2년 동안 바라보지만 탑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어 그만 연못에 투신한다. 석공은
감염의 시대는 격리의 시간이다. 강의는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회의도 작은 화면에서 진행한다. 격리의 시대에 집은 안식처이기 보다는 갑옷처럼 일상을 구속한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는 일상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도시를 떠나는 로드무비다. 이 영화는 도시의 권태로부터 탈출하는 중산층 남자 페르디낭(장 폴 벨몽도)과 신비한 마리안(안나 카리나)의 파리 탈출기다. 그들에게 파리는 미궁이며 아리아드네의 실은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다. 그들은 우연한 살인에 연루되어 도시에서 탈출하여 프랑스 남부의 포르크롤 섬으로 도피한다. 그 섬은
영화와 문학은 늘 이웃하여 발전했다. 문학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는 관행을 초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왔다. 문학 작품의 영화화는 두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는 원작을 충실하게 영화화하는 방식이며 둘째는 원작을 재해석하여 창조적으로 영화에 수용한다. 전자는 원작을 영상으로 번역한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문학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며 창조적 재해석은 문학이 영화에 복무한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문학작품을 프레임에 담아내는 무난한 선택을 한다. 함세덕의 ‘동승’(1939, 원제는 道念)은 세 번 영화로 옮겨졌으며 대체적으로 원작에 충실한 영화적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는가. 이 질문에 많은 심리학자들은 답을 찾았다. 상대에 대한 설렘이 동반된 사랑의 유효 기간은 9주 내외라는 통설이 통용되고 있지만 개인마다 기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감정의 유효기간은 사랑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전제로 도출 가능한 개념이다. 사랑지상주의자는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사랑은 어떻게 변하는가’라며 항변할 것이다. 영화에서 소환된 사랑은 대체적으로 유효기간이 없으며 사랑은 영원하다는 이상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최대 유효기간은 두 인물이 만나서 사별할 때까지이기에 유한성에서 벗
2019년 겨울에서 2020년 봄까지 위례의 아파트 건설 현장 부근에 비닐하우스 천막선원을 짓고 아홉 스님이 90일 동안 정진 수행을 감행했다. 수행의 목적은 선풍 진작과 온 세상 평화를 위한 결사였다. 다큐멘터리 ‘아홉 스님’은 90일 동안 동안거 천막 결사에 참여한 스님들의 수행 기록을 카메라에 담았으며 해제된 이후 여러 스님의 인터뷰를 통해 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와 수행자의 소회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기록하고 복제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연출자의 고유한 시선이 피사체에 개입하고 카메라가 피사체를 통해 담
강제규는 ‘게임의 규칙’과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의 시나리오 작가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이미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흥행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출발은 ‘은행나무 침대’였다. 강제규 감독은 “여관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침대를 거쳐 간 수많은 남녀를 소재로 한 영화”를 구상하였다. 이 모티프는 궁중 악사와 공주의 천년에 걸친 사랑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은행나무로 환생을 하고 장인에 의해 침대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은행나무 침대’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충무로에서 천년의 사랑이라는 두 남녀의
무협영화는 협객을 주인공으로 한 강호의 서사다. 협객은 의리와 복수를 숭상하고 결국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강호를 떠돈다. 선과 악은 탐관오리와 그들로 인해 핍박받는 영웅의 대결 구도로 이루어진다. 무협영화는 수도승과 불교 사원을 배경으로 하여 불교영화와 융합되는 경향이 강하다. ‘협녀’도 무협영화와 불교영화가 융합되었다. 중국 무협영화사에서 호금전은 무협영화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린 감독이다. 1965년 한영걸이 쇼브라더스 영화사에 참여하면서 호금전의 무협영화는 빛을 발해 신파무협의 시대를 열어간다.호금전은 한영걸과 호흡을 맞춰
베르나르도 베르돌루치는 부친의 친구인 파졸리니 감독의 조감독으로 입문하여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로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부각됐다. 그 후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다룬 ‘마지막 황제’(1987)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였으며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은 ‘리틀 부다’(1993)로 이어졌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은 법통을 환생한 인물로 승계한다. ‘리틀 부다’는 환생한 라마 도체를 찾는 서사이면서 영화 속 영화로 고타마 싯다르타 이야기가 삽입돼 붓다영화(Buddha film)로 귀결된다.첫 장면에서 양이 전생에 인간이었다는 우화로 환생에 대
소림사는 달마조사의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을 통해 무예를 전승받았다고 한다. 달마조사의 경서가 무술 교본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했다면 소림사는 무예의 도량이라는 등식은 ‘소림사’ 영화의 흥행 성공과 해외 배급으로 뿌리내렸다. 몇 해 전에 필자가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눈에 띄는 변화는 주변에 즐비한 노란색 체육복을 입은 무술학교 학생들의 훈련 모습이었다. 소림사로 가는 길은 좌우로 도열한 무술학교의 사열을 통과하고 비로소 소림사의 일주문에 당도하는 하나의 통과제의처럼 보였다. 영화 ‘소림사’ 시리즈의 성공은 소림사를
시인 황지우는 ‘세상에 대한 한줌의 가망을 벗어버리니 이렇게 홀가분하다’(겨울 숲)고 했다. 기택(송강호)은 ‘계획이 없으니 잘못될 일도 없으며 계획이 없으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무계획 예찬론을 갈파한다. ‘기생충’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계급 문제보다 어쩌면 계획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삶의 자유를 더 강조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사회학적 시각에서 계급의 문제가 두드러지며 장르의 눈에서는 코미디가 잘 읽힌다. 불교영화의 입장에서 ‘기생충’은 배창호의 ‘꿈’과 이명세의 ‘개그맨’을 잇는 일장춘몽 계열의 영화
감염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는 시대에도 꽃은 핀다. 강은교 시인은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에게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달라고 애원했다. ‘꽃’이라는 시이다. 사람이 별에서 꽃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꽃들이 한 잎 한 잎 피어나서 지상의 사람들을 시골 정류장 부근 나무 위로 마중나와 기다리는 봄이다. 감염의 시대와 꽃은 서로 안어울리지만 계절은 부조화 속에서도 흘러간다. 풍경과 시간이 이질적으로 결합하는 시기는 역사적 격변기와 전염의 시간일 듯하다. 수나라 말기 극심한 혼란기에 영웅호걸이 등장하고
홍상수가 등장했을 때 한 평론가는 ‘뒤늦게 도착한 모더니스트’라고 했고 다른 연구자는 ‘일상의 발견자’로 이름 붙였고 보다 진지한 이들은 ‘욕망을 찾아 배회하는 주이상스의 대변인’으로 평가했다. 허문영은 홍상수 영화의 서사를 ‘남자(들)은 여인과 만나 동침하기 위해 노력하며, 여인은 그의 요구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지만 그의 곁에 머물지 않는다’로 간명하게 요약했다. 김시무는 홍상수의 텍스트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으로 보았다. 발자크는 인간희극이라는 이름으로 97편의 소설을 집필하였으며 등장인물이 2000명이 넘고 그중 460명이 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언론은 바이러스 감염자 수를 주식 중계 방식으로 발표하여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국민들은 자가 격리를 하고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다. 바이러스는 우리사회의 면역력 약한 숙주를 식별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허술한 곳에 침투하고 건강하지 않은 집단을 발본하는 역할도 한다. 노인과 병약자가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고 돌봄이 취약한 정신병동에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고 신흥종교집단이 슈퍼 전파의 발원지로 부각된다. 바이러스는 평온한 사회에서 평평하게 존재하였지만 사회의 울퉁불퉁한 모순 덩어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