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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아, 억울함은 내가 풀고 갈 테니 마음 편히 쉬길”

  • 사회
  • 입력 2020.10.22 21:54
  • 수정 2020.10.22 21:57
  • 호수 1558
  • 댓글 0

사노위, 10월22일 MBC광장 앞에서 자매 위한 천도재 봉행
“가해자 참회하고 방송계 안전한 근무 환경 조성되길 발원”

“들어주십시오.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자식을 지키지 못한 죄인입니다. 딸들은 나에게 ‘엄마는 강하니깐 대신 원수를 갚고 20년 뒤에 만나자’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딸들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방송계에서 다시는 이와 같은 성폭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단역배우자매 자살사건’의 피해자 고 양소라씨와 고 양소정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방송현장의 성폭력·성희롱 근절을 위한 법석이 엄수됐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는 10월22일 낮 12시 서울 상암동 MBC광장 앞에서 천도재를 봉행했다. 천도재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이 공동주최했다. 지난 2009년 갑작스럽게 두 딸과 남편을 한꺼번에 잃은 어머니 장연록 씨는 황망함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당시 천도재조차 치르지 못했다. 사정을 전해들은 사회노동위원회가 적극 나서면서 11년 만에 천도재가 열리게 됐다.

천도재는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자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어산종장이자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이수자 동환 스님의 집전으로 사회노동위원회 위원스님들과 유가족, 시민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스님들의 독경 소리가 울려 퍼지자 점심을 먹기 위해 지나가던 직장인들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애도를 표했다.

사회노동위원회는 “방송 보조출연자로 일하던 고 양소라씨는 2004년부터 방송관리반장 등 12명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경찰에 고소했지만 2009년 8월 끝내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며 “당시 양씨는 조사과정에서 경찰로부터 합의를 종용당하고 비상식적인 2차 가해를 당했다는 유가족들의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 양소라씨 사망 후 언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던 동생 소정씨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6일 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자매의 아버지마저 두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뇌출혈로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다.

2018년 미투 운동이 이슈로 떠오르면서 ‘단역배우자매 자살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20만명이 넘게 동의하면서 사건 재조사의 단초가 마련되는 듯 보였으나 가해자 대부분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사건 공소시효도 만료돼 진상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노동위 부위원장 지몽 스님은 “천도재는 여전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고 구천을 맴돌고 있을 영가들이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라며 “천도재를 통해 이번 생에서의 괴롭고 부정적인 기억들을 불성의 하얀 빛 속에 모두 녹여버리고, 아미타불세계로 가 왕생하시기를 발원한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어 “가해자들은 하루속히 고인들에게 속죄해야한다. 악행으로 지은 과보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인간세상의 이치다. 그 죄업을 갚기 전에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세세생생 본인을 따라다닌다는 것을 가해자들은 명심하라”며 “딸들의 비통한 죽음의 한을 풀기 위해 십 수년을 거리에서 목 놓아 호소하는 어머님의 외침을 우리 사회가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도 “두 자매가 사망한지 11년이 지났지만 가해자들은 뻔뻔스럽게 방송현장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반성과 사죄는커녕 적반하장식의 가해자들을 지켜보면서 피해자 자매가 어떻게 편히 눈감을 수 있겠냐”며 눈물지었다.

천도재가 진행되는 내내 차가운 아스팔트 위 무릎을 꿇고 울던 자매의 어머니 장연록씨.
천도재가 진행되는 내내 차가운 아스팔트 위 무릎을 꿇고 울던 자매의 어머니 장연록씨.

천도재가 진행되는 내내 차가운 아스팔트 위 무릎을 꿇고 울던 자매의 어머니 장연록씨는 “무심코 TV를 보는데 가해자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 뒤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투쟁해왔다”며 “시위 현장에서는 가해자들로부터 폭행, 욕설, 구정물 세례를 당했으며 수없이 고소도 당했다”고 토로했다. 장 씨는 이어 “더한 것은 경찰이다. 딸들은 경찰들이 죽인 것과 다름없다”며 “성폭행 조사 중 딸에게 ‘(가해자의)성기를 명확히 그려야 한다’ ‘왜 12명을 전과자로 만들려고 하냐’ 등 2차 가해를 가하며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주장했다.

장 씨는 또 방송국 건물을 향해 “방송계는 어떻게 20년이 다 되도록 가해자들에게 끊임없이 일감을 줄 수 있냐”며 “현장 반장들을 교체해 방송계에 만연해 있는 성범죄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여성장관을 꿈꿨던 큰딸, 최고의 탤런트를 꿈꿨던 작은딸을 위해 앞으로 남은 9년 동안 끝까지 싸우겠다”는 장 씨는 끝으로 “아깝다. 보고싶다. 그립다”는 말을 남겼다.

천도재 한 쪽에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와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이 시민들과 함께 자매의 아픔을 공유하기 위해 커피무료나눔 트럭을 준비했다.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보였고, 두 자매를 위해 응원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김내영 기자 ny27@beopbo.com

[1558호 / 2020년 10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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