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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무심사지 재발굴…고대 영광 드러날까

  • 성보
  • 입력 2021.03.19 20:53
  • 수정 2021.03.19 22:07
  • 호수 1578
  • 댓글 1

불교문화재연, 4월부터 사찰역사 규명할 조사착수
“장보고가 해상권 장악한 시기부터 역할 했을 것”

뭍에서 멀리 떨어져 땅 전체가 하나의 검은 산처럼 보인다는 흑산도(黑山島). 우리에겐 다산 정약용의 형, 손암 정약전(1785~1816)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엔 한중일의 해상교통로이자 국제교류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곳에 절터가 하나 있다. 화려하고 웅장했을 전각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당산나무 한 그루와 석탑, 석등이 텅빈 절터를 채우고 있다.

절터 이름은 무심사지다. 1999년 흑산도 상라산성을 조사하러 온 연구원이 ‘무심사 선원(无心寺 禪院)’이라 새겨진 기와편 하나를 발견했다. 이때부터 무심사지로 불렸다.

신안 흑산도 무심사지. 화려하고 웅장했을 전각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당산나무 한 그루와 석탑, 석등이 텅빈 절터를 채우고 있다.

사라진 역사를 찾고자 2009년 목포대박물관이 한 차례 시굴을, 2015·2016년 전남문화재연구소가 두 차례 발굴을 진행했다. 석탑, 석등 일대에서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건물지와 수혈 유구도 확인됐다. 앞선 연구의 발굴 성과는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섬에 왜 사찰이 지어졌는지, 당시 사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재단법인 불교문화재연구소(소장 제정 스님)가 4월 중순부터 무심사지 재발굴에 들어간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지난 11년간 전국 5738곳 사지를 조사, 관리하고 있는 자타공인 ‘절터 전문 조사단’이다. 김진덕 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 팀장은 “사찰이 세워진 시기와 전체적인 사역 범위를 명확히 파악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며 “흑산도가 국제교류의 중심지였던 시기에 무심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집중 조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 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했던 전남문화재연구소는 2017년 펴낸 ‘신안 흑산도 무심사지Ⅰ·Ⅱ’에서 “무심사는 9세기 후반인 통일신라 말에 세워졌고 중심운영 시기는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중후반”이라 분석했다. 또 “14세기 무렵 공도정책(空島政策)이 시행되면서 공민왕 연간 무렵 폐사됐을 것”으로 봤다.

하지만 불교문화재연구소는 그동안 시·발굴이 크게 미흡했다고 판단했다. 장보고(787~846)가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흑산도에서 무역이 활발히 이뤄진 시기에 사찰도 창건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건시기는 9세기 후반이 아닌 초중반이 된다. 김 팀장은 “장보고 대사가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했던 9세기 초중반, 우리나라는 당과 일본, 남방과 서역 등과 활발히 무역 했다”며 “이 시기 무심사가 국제무역항을 뒷받침하는 특정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일본 천태종 3대 좌주인 엔닌 스님(圓仁, 794~864)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장보고 선단의 신라선 도움으로 당나라를 오갈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신라 불교를 이끌고자 당나라로 유학갔던 7세기 의상 스님(625~702)도 해로로 구법유행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흑산도가 구법승들의 입출국 경유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9세기 후반은 사찰 창건이 오히려 어려웠을 시기였다. 김 팀장은 “통일신라 말은 중앙정권과 지방호족 관계가 좋지 않았고 국제적으로 흑산도에서 무엇을 할 만한 정치적 사건도 없었다”며 “무심사가 9세기 후반 창건됐다는 분석은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상무역의 잔존 세력이 남아 이 무렵까지 번성했더라도 창건은 훨씬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와에 사찰 이름이 새겨졌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규격화된 기와틀로 구운 게 아니라 ‘무심사 선원’이라 새겨진 틀을 별도 제작한 것. 흑산도에는 기와 가마터가 없어 육지에서 기와를 구워 섬으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김 팀장은 “기와틀을 별도로 주문 제작했다는 건 조그마한 사찰이 아니라 사세가 상당했다는 의미”라며 양주 회암사지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하지만 현재 절터로 알려진 부지는 3490평(11540㎡) 정도이다.

추가로 절터가 밝혀질 가능성은 있을까. 불교문화재연구소는 “현재 관아터로 알려진 장소가 절터일 가능성도 있다”며 “적심과 초석이 워낙 커 관아터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곳에서도 ‘무심사 선원’명 기와편이 나와 이번 조사에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둘 예정”이라고 했다. 앞서 발굴되지 않았던 절터의 동쪽 부분부터 조사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추후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방침이다.

이번 연구로 흑산도 무심사의 찬란한 고대의 영광이 드러날까 기대를 모은다.

빨간색 동그라미 부분이 전남문화재연구소가 2·3차 발굴조사한 무심사지 위치.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578호 / 2021년 3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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